세계 여자 스포츠 선수 중 재산 1위
테니스계 슈퍼스타, 마리아 샤라포바
샤라포바를 세계적 스포츠 스타로 키운 건 8할이 아버지 유리 샤라포바다. 아버지의 헌신으로 딸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것도 귀족 스포츠라 불리는 테니스 종목에서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헌신형 부모다. 가족의 사랑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나자 부모는 태아를 걱정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샤라포바가 두 살 되던 해, 부부는 다시 러시아의 휴양 도시 소치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체르노빌과 더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곳 소치에서 4세 샤라포바는 첫 번째 운명의 여신을 만난다. 같은 동네에 살던 러시아의 테니스 스타 예브게니 카펠니코프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낡은 테니스 라켓을 선물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아버지와 딸은 인근 공원에서 테니스 연습을 시작한다.
Knowhow 1
강인한 승부욕과 정신력을 유산으로 물려주다
2년간 아버지와 함께 꾸준히 테니스를 해온 샤라포바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테니스 박람회를 방문했다가 우연한 계기에 시범 경기에 참가하게 된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였지만 샤라포바는 타고난 근성과 뛰어난 운동 실력을 뽐냈다. 이를 눈여겨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선수는 샤라포바의 아버지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딸에게 본격적으로 테니스 수업을 시킬 것을 권했다.
그녀의 한마디가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1년 후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아버지와 딸은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한다. 플로리다는 나브라틸로바가 추천한 닉 볼레티에리 테니스 스쿨이 있는 곳이다. 본격적으로 전문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샤라포바의 실력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했다. 시베리아에서 소치로, 다시 플로리다로. 동양에 맹자 어머니가 있다면, 서양에는 유리 샤라포바가 있다고 할 정도다. 맹부삼천지교가 따로 없다.
문제는 경제력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아버지의 주머니에는 고작 7백 달러뿐이었다. 반면 딸의 연간 강습료는 3만5천 달러였다. 아버지는 접시 닦기를 하거나 건설 현장의 일용직으로 일하며 강습료를 모았다. 최저임금만으로 막대한 강습료를 감당하려다 보니 휴일도 반납하며 매일 작업터로 향했다. 사랑하는 딸과는 고작 1년에 두세 번 만날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항상 딸을 향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자 문제로 2년 뒤에야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아버지를 둔 딸은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악착같이’ 테니스 연습에만 집중했고,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윔블던 여자 단식 결승이 열리는 센터코트에 서게 될 날을 늘 꿈꿔왔다”라고 말할 정도로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아버지는 말보단 행동으로 딸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물려준 셈이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샤라포바는 17세에 윔블던에서 우승했을 때 가장 먼저 관중석의 아버지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나눈 것이다.
Knowhow 2 끊임없는 채찍질
정상은 오르기 어려운 만큼 유지하기도 힘든 법이다. 샤라포바는 오랜 기간 동안 톱의 자리를 지켰다. 부상을 입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항상 ‘테니스의 여신’이었다. 테니스 전문가들은 그녀의 플레이는 무뎌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샤라포바가 항상 초심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 덕분이다. 딸이 17세에 윔블던에서 우승했고, 18세에는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아버지는 딸에게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았다. 윔블던 우승 이후로 경제 사정이 나아지자 그는 코치 겸 매니저로 나섰다. 이후 딸과 함께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녀의 경기를 지켜보고 조언한다.
소속된 매니지먼트사가 있지만 대회 관계자를 만나 훈련 스케줄과 코트를 배정받고 테니스 라켓 줄을 대신 매주는 사람은 아버지다. 경기를 마친 딸에게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배달하기도 한다. 아직도 아버지의 삶의 중심에는 딸이 있다.
한결같은 아버지가 있기에 샤라포바는 쉽게 들뜨지 않고 계속 테니스의 여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주위 사람에게 제가 달라지면 머리를 때려달라고 부탁했어요”라며 특유의 근성을 드러냈다.
Knowhow 3 테니스 이외의 세상을 가르치다
샤라포바 부부는 맡은 역할이 달랐다. 아버지가 냉정하고 날카롭다면 어머니는 반대로 자상하고 지적인 편이다.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딸의 전공인 테니스를 책임졌다면, 어머니는 테니스 이외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정서적인 안정을 주었다.
샤라포바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 엘리나 샤라포바는 굉장히 유쾌하며 지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할리우드 배우 우마 서먼을 닮은 어머니는 딸의 내면이 풍요로워지길 원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딸이 모국어를 잊어버릴 것을 걱정해 딸에게 러시아어로 된 책을 읽게 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전화를 하는 대신 러시아어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덕분에 7세에 미국으로 건너갔음에도 샤라포바는 영어는 물론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
또 운동밖에 모르는 스포츠 스타가 되지 않도록 틈이 나는 대로 딸과 함께 박물관에 다녔다. 공연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딸에게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덕분에 샤라포바는 미술과 공연 방면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은퇴 후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싶다고 밝힌 것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기른 예술적 감각 덕분인지 모른다.
엘리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딸을 위해 정서적인 도움도 주고 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경기장을 찾는 것도 꺼리지만 가끔 경기가 끝난 뒤에는 딸과 데이트를 즐긴다고 한다. 프랑스나 호주 등지에서 쇼핑을 하며 딸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유명한 샤라포바지만 한 번은 인터뷰에서 속마음을 밝혔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제 경기에 오지 않으시죠. 저를 위한 배려예요.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와 계시면 제가 경기에 더 부담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미 제 부모님은 딸을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하셨는데,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에서 열리는 경기장까지 오신다면 딸로서 무척 죄송하잖아요.”
엄격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딸에게 웃음과 안정을 주고 운동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창구를 만들었다. 엘리나는 화려한 코트 뒤에서 조용하고 현명하게 딸을 배려하는 자상한 어머니, 그 자체다.
올해 나이 26세. 성적, 재산, 명예, 외모까지 모든 걸 가진 스포츠계의 슈퍼스타다. 2004년 윔블던, 2006년 US오픈, 2008년 호주오픈에서 우승하며 스포츠계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2008년 어깨 수술 이후 슬럼프를 겪었지만 2012년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여자 선수로는 10번째 프로테니스 그랜드슬래머가 됐다. 2005년 「피플」이 선정한 세계 미인 유명인 50명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6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수입을 올린 여자 운동선수 1위를 차지했다.
버핏가의 전통, 투자의 귀재를 만들다
금융의 대부, 워렌 버핏
세계 4위의 거부, 가치 투자의 대가, 오마하의 현인, 빌 게이츠의 절친한 친구…. 워렌 버핏이라는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무엇보다 그는 현재 금융 시스템을 꿰뚫고 주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일군 사람이다. 그 배경에는 버핏가의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볼품없는 이민자 가문이 4대를 지나 세계 4위의 거부가 된 비결의 중심에는 조기 경제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Knowhow 1 아들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면 재능이 보인다
자수성가한 세계 4위의 거부이지만 시작은 단출했다. 1930년 8월 30일, 가족 모두가 모인 자그마한 방에서 세찬 울음소리와 함께 워렌 버핏이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의 소박한 도시 오마하에서 ‘버핏 앤 선’이라는 조그만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이렇듯 겉모습은 평범하지만 버핏가에 내려오는 전통은 평균 그 이상이었다. 버핏가는 유대인답게 자녀에게 철저한 경제교육을 시켰다. 용돈을 받기 위해서는 집안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용돈은 없었다.
증권 중개원이던 버핏의 아버지는 아들이 6세 때 20달러가 들어 있는 통장을 선물로 줬다. 아들에게 돈의 가치와 금융 시장에 대해 설명해주기 위해서였다. 통장을 받은 그는 돈에 대해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돈을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린 버핏은 할아버지에게 힌트를 얻는다. 할아버지 가게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콜라를 동네를 돌아다니며 팔았던 것이다. 꼬마 버핏에게 남은 건 콜라 한 병에 50센트라는 수익금이었다.
콜라를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수학에 재능이 있으며 사업가 기질이 다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내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식 시세판의 주가를 기록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여기서 버핏은 숫자에 대한 감각을 익혔고,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다. 10세가 된 아들은 주식 거래장이 있는 월스트리트를 보고 싶다고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골드만삭스의 전설적인 최고경영자 시드니 와인버그와의 만남을 어렵게 성사시켰다. 30분간의 만남에서 와인버그는 영민해 보이는 소년 버핏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떤 주식을 좋아하느냐”라고 물었다. 훗날 억만장자 투자자가 된 버핏은 자신의 자서전 「스노볼」에서 ‘와인버그는 다음날로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이후 버핏은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선물한 20달러짜리 통장은 70년 후 약 56조원으로 바뀌게 된다.
Knowhow 2 자녀에게 길을 제시하라
버핏이 13세 때 아버지 하워드 버핏은 공화당 하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으로 이사를 갔다. 워싱턴에서 버핏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하다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여기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영민함이 발휘됐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그에겐 1만 달러짜리 통장이 있었다.
버핏은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사업에 도전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버핏은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 펜실베이니아 경영대인 와튼스쿨에 진학하게 됐다. 그러나 버핏은 자신이 교수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생각에 와튼스쿨을 그만두고 고향 오마하로 돌아와버렸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아들을 설득했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으로 버핏은 컬럼비아대학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일생일대의 스승인 그레이엄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수많은 투자 경험을 통해 ‘주가와는 상관없이 오직 회사의 가치만을 보고 투자한다’라는 철통같은 투자 원칙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 논리에 매료된 버핏은 그레이엄 교수를 평생 사업의 모델로 삼는다.
워렌 버핏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세한 길을 제시하진 않았지만 아들이 큰 갈림길에 서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결국 버핏은 아버지의 조언으로 평생의 스승인 그레이엄 교수와 자신의 사업 방법인 가치 투자를 발견한 셈이다.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컬럼비아대학원에 보내지 않았다면 버핏은 그저 오마하에서 유명한 수완 좋은 사업가가 돼 있었을지 모른다.
Knowhow 3 유산은 자녀에게 일하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버핏이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주식 투자의 귀재여서가 아니다. 그의 검소한 생활습관과 기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버핏가의 전통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공화당 4선 의원이었지만 아들에게 경제적으로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1952년, 버핏은 월세 65달러짜리 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쥐가 나오는 최악의 주거 공간이었다. 부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장롱을 침대로 만들어 썼다. 결혼한 지 6년 만에 3만 달러짜리 집을 장만한 부부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집에서 살고 있다. 또 20달러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12달러짜리 이발을 한다. 아들 피터 버핏이 “청소년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가 이 정도의 거부라는 사실을 몰랐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버핏가는 기부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기부하는 것은 버핏가의 가풍이다. “많은 유산은 자녀에게 일하는 즐거움을 앗아간다”라고 말한 그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은 196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 56만 달러를 모두 병원과 대학에 기부했다. 아들에게는 개인적인 소장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 역시 자녀들에게 특별한 유산을 남기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버핏이 돈을 빌리러 온 딸에게 “부모는 은행이 아니다”라며 돈을 내주지 않은 사례는 유명하다.
다만,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직은 장남인 하워드 버핏으로 내정했다. 비상임 이사회 회장으로 하워드가 경영에 개입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버핏은 자신의 회사의 문화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장남이 회장직을 물려받기를 바랐다고 한다. 장남 하워드는 “농사를 계속 지을 수만 있다면 버크셔의 회장직을 맡을 의사가 있다”라고 답한 바 있다. 하워드는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는 농사꾼이자 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농사를 시작할 때 버핏은 “내 땅에서 경작해도 좋지만 임차료는 시세대로 내라”라고 말하며 아버지로부터 배운 독립심을 아들에게도 가르쳤다. 아버지 하워드 버핏의 이름을 따서 장남의 이름을 지을 만큼 버핏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버핏은 하워드 버핏 외에 수지, 피터 2남 1녀를 두었다. 사후에 재산의 대부분은 각종 자선재단에 기증할 거라고 약속해둔 상태다.
올해 나이 82세. 미국의 4대 거부이자 전설적인 투자의 귀재. 재산은 약 5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50여 개 계열사와 21만 명의 직원을 둔 대기업 버크셔 해서웨이를 운영하고 있다. 더욱이 뛰어난 투자 실력과 함께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012년 미국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2011년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한 바 있다.
세계 온라인의 관문을 장악한 구글 창립자
자연스러운 토론 문화에서 성장한
래리 페이지&세르게이 브린
스탠퍼드대학원생 시절에 만났던 두 창업자는 스티브 잡스처럼 타고난 IT 천재도, 빌 게이츠처럼 탁월한 경영인도 아니다. 그들은 엔지니어다. 학구적이고 명료한 사고가 칭찬받는 가정에서 정확하게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엔지니어들의 뒤를 따라가봤다.
Knowhow 1 아버지의 전공을 물려받다
페이지와 브린은 모두 이과 분야를 전공한 부모를 두었다. 내성적인 페이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미시간대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아버지는 미시간대 교수로, 어머니는 데이터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등 공학적 사고가 지배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브린의 가족도 비슷하다. 시끄럽지만 총명하고 통찰이 넘치는 브린은 과학에 푹 빠진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수학 교수와 수학자였다. 이런 환경에서 두 사람은 숫자와 논리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붙이게 됐다.
컴퓨터공학과 인공지능의 개척자였던 래리 페이지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테크놀로지 잡지와 전기공학 리포트를 한아름 안고 들어와 집 안 곳곳에 놓아두었다. 이는 어린 페이지의 관심을 끌었다. 아들의 관심사를 파악한 아버지는 페이지의 일곱 번째 생일에 엑시디 소서러(Exidy Sorcerer) 컴퓨터를 선물했다. 어린 페이지는 곧 컴퓨터의 달인이 됐다. 9세 위인 형 칼 페이지의 분해 기술도 그에 일조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페이지는 자신이 무언가 개발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훗날 형 역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브린의 아버지는 좀 더 직접적으로 아들의 교육에 관여했다. 브린은 4세 때부터 부모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까다로운 개인교사이자 아들의 수학적 재능을 격려해준 중요한 존재가 됐다. 그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가장 훌륭한 자질은 수학과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실행해왔던 아름다운 수학적인 것은 모두 자라면서 얻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학구적이며 명료한 사고를 중요시하는 부모에게서 수학적 배경과 정확함의 추구라는 성공의 키워드를 배웠다. 이는 구글의 검색도를 최고 수준까지 올려놓는 가장 큰 비밀 병기이기도 하다.
Knowhow 2 아이 스스로 공부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한다
러시아의 반유대인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던 브린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온다.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의 원조에 의지했지만 가계는 녹록지 않았다. 메릴랜드대학 인근의 교외에 노동자 계층들이 모여 사는 콘크리트 블록 집을 임대해서 살았는데, 벽이 얇아 옆집의 말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브린의 부모는 아들을 공립 초등학교 대신 인근 사립인 몬테소리초등학교에 보냈다. 아이가 스스로 공부하는 방향과 방법, 속도를 찾게 하는 몬테소리의 교육을 신뢰한 탓이다. 몬테소리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자기 길을 그려나가는 법을 배웠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영어를 거의 못했기 때문에 브린은 수학 퍼즐과 과학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브린은 몬테소리에서 배운 대로 성장했다. 언제나 학교에서 정해주는 작업 속도를 따르지 않았다. 스스로 과제를 찾고, 속도를 정했다. 볼티모어에 있는 엘리너 루스벨트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3년 동안 고교 졸업 자격 취득은 물론 메릴랜드대학의 과학까지 이수했다. 대학에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국립과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스탠퍼드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됐다.
Knowhow 3 식사 시간엔 언제나 토론을 한다
두 창업자는 스탠퍼드대학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다. 이때 두 사람이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면 구글은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또 현재의 인터넷 검색 엔진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봤다. 계기는 논쟁이었다. 두 사람은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든 논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격렬한 논쟁을 벌일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적인 통념이나 문화를 포함해 그들의 토론 주제는 끝이 없었다. 가끔 격한 논쟁으로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맞상대가 될 만한 친구라며 서로를 인정했다.
모든 사안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에 대해 토론한다는 문화는 두 가정의 공통된 전통이기도 하다. 양쪽 가족에게 식탁은 격렬한 토론의 장이었다. 브린 가족은 항상 식탁에서 이야기하길 즐겼다. 가끔은 식사 시간이 2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페이지 가족 역시 토론을 즐겼다. 음식을 모두 먹고 난 뒤에도 대화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페이지 가족의 또 다른 취미는 독서다. 한 번은 오리건주로 여행을 갔다가 옷 가방을 비우고 그곳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가득 담아온 적이 있을 정도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구글의 가장 중요한 운영 철학이다. 구글은 일반 회사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반기를 든다. 기업주의 입장에서 회사를 운영하지 않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것. 다른 포털 사이트에서는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이 사이트에 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광고를 팔 수 있을까, 고민한 반면 구글은 자사 웹 사이트에서 벗어나 더 빠르게 다른 웹페이지로 이동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야후나 네이버처럼 포털의 메인 화면에 뉴스, 광고 등이 없다. 검색만을 위해 최적화된 사이트인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인들이 구글의 기업 철학에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치원 때부터 관습을 받아들이기보단 토론을 하고 자기만의 해답이 있다는 가정교육을 받은 두 창업자. ‘컴퓨터 괴짜’인 그들은 여전히 아웃사이더로 유명하다. 페이지와 브린은 매년 8월 1주일 동안 열리는 버닝맨 축제의 단골 참가자다. 버닝맨 축제는 네바다주의 사막에서 열리는 연례행사다. 무정부주의·애니미즘 분위기가 풍기는 이 행사의 절정은 거대한 나무와 사막 덤불로 만든 ‘인간’ 형상을 태우는 다소 ‘과격한’ 프로그램이다. 이처럼 관심사도 남다른 두 사람은 사업을 하면서도 수없이 질문을 던진다. “최선입니까?” 혹은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입니까?”라고. 두 사람은 암기가 아니라 질문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프론티어 정신을 가지고 있던 부모의 정신을 오롯이 이어가고 있다.
역사상 가장 빨리 성장한 기업이다. 1998년 9월 동갑내기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차고에서 창업했다. 구글은 검색으로 출발했지만 소프트웨어, 통신, 유통, 서적, 미디어, 부동산 등 ‘구글 대제국’을 형성 중이다. 구글 CEO이자 최고경영자인 래리 페이지의 재산은 약 25조원으로, 구글 사장 세르게이 브린의 재산은 약 21조원으로 추산된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박은혜(프리랜서)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백악관·버크셔 해서웨이·미시간대학교·구글 플러스 홈페이지 ■참고 서적 / 「구글드」(켄 올레타 저, 타임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