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1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정독도서관에서는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원장의 강연이 열렸다. 고전 그림책 「빨간 모자」를 재해석한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를 통해 서 원장은 현대사회의 성폭력 문제와 그 속에 감추어진 아이들의 심리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각각 처한 시대의 메시지가 녹아 있는‘빨간 모자’

그림책으로 이야기하는 아동 성폭력 문제
프랑스의 동화작가 샤를 페로가 1697년에 발표한 동화집에 수록된 빨간 모자의 이야기다. 페로는 빨간 모자를 통해 ‘수상한 사람(늑대)과 이야기하는 것은 늑대에게 저녁을 제공해주는 것과 다름없다’라며 낯선 이에게 함부로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점잖고 예의 바르게 보여도 사실은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경고도 함께 말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유럽에서 교육용 동화로 오래전부터 사용돼왔다. 페로의 빨간 모자 이야기는 그림 형제에 의해서도 다시 쓰였고, 그 이후에도 많은 작가들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재해석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이탈리아의 작가가 쓴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사계절)다.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45)은 샤를 페로와 그림 형제의 「빨간 모자」를 통해 과거의 시대상과 그 속에 담겨진 경고의 메시지를 살펴보고, 또 한편으로는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를 통해서는 오늘날의 시대상과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샤를 페로의 「빨간 모자」는 낯선 남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강하죠. 이야기도 비극으로 끝나고요. 시간이 흘러 그림 형제는 이 이야기에 재치를 불어넣어요. 사냥꾼이 와서 소녀를 구하잖아요. 비극을 극복하는 거죠. 하지만 이것도 한계는 있어요. 실수는 여자가 하고 구해주는 것은 남자라는 인상을 받거든요.”
우리 시대의 빨간 모자 아이들
샤를 페로가 「빨간 모자」를 쓴 4백 년 전이나 그림 형제가 이야기를 다시 만든 2백 년 전이나 그리고 인노첸티에 의해 새롭게 쓰인 오늘날이나 이야기 자체가 변화한 부분은 거의 없다. 이는 여전히 우리 아이들이 빨간 모자로 상징되는 ‘두려움’을 갖고 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그야말로 위험투성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또한 두렵다. 부모가 아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3백65일, 24시간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흉악한 범죄들을 보면 과연 늑대만 피한다고 안전할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아이들을 구해줄 사냥꾼은 여전히 존재하는 걸까. 우리 시대의 빨간 모자를 쓴 아이들은 대체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림책으로 이야기하는 아동 성폭력 문제
서 원장은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의 첫 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청자들이 아담한 집과 예쁜 들판 그리고 녹음이 짙은 숲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아무리 오늘의 현실을 담았다지만 아이들 그림책이고,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은 「빨간 모자」라는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장의 그림은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였다. 독거노인부터 실업자, 싱글 맘이나 부모가 일하러 가 아이들만 있는 집들이 나오는. 비록 외국 그림책이라고는 하나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복잡한 도시의 한쪽 구석 모습이었다. 책의 시작 부분에는 숲에서 일어난 이야기라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그 숲은 분명 울창한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 도시 숲이었다. 작가는 아파트가 있는 도시를 숲이라 했다.
“사실 아이들은 숲에 들어갔을 때 어른들처럼 여러 생명체가 함께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나무에 둘러싸인 자신이 갇혔다고 생각하죠. 지금의 아이들에겐 도시가 그래요. 어느 순간 버려지면 자신은 혼자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어요.”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의 내용은 이렇다. 변두리 아파트에 사는 소피아라는 아이가 있다. 물론 빨간 모자를 썼다. 소피아는 다른 빨간 모자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드리라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받고 집을 나선다. 엄마는 아이에게 사람들이 많은 ‘큰길’로만 갈 것을 당부하지만, 화려한 도시에 눈이 팔린 소피아는 이내 길을 잃고 만다. 후미진 뒷골목을 헤매던 소피아는 불량배, 즉 늑대를 만나지만 사냥꾼 아저씨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여기까지는 비록 도시의 콘크리트 숲이긴 하나 과거의 「빨간 모자」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냥꾼의 도움까지 받은 현재의 빨간 모자 소피아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지 못한다. 소피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림책으로 이야기하는 아동 성폭력 문제
“책을 보면 과거 빨간 모자가 헤매던 울창한 나무숲은 이제는 ‘더 우드’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거대한 복합 쇼핑몰이 됐죠. 하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늑대와 사냥꾼일 거예요.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에 나오는 사냥꾼은 더 이상 샤를 페로나 그림 형제 이야기 속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프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오늘의 현실인 거예요.”
빨간 모자는 분명 불량배라는 늑대를 만났다. 사냥꾼은 그 불량배로 인해 위험에 처한 빨간 모자를 구해주고, 심지어 자신의 오토바이를 이용해 할머니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푼다. 소녀를 도와준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면이다. 사냥꾼이라는 선의 가면을 쓴 늑대인 것이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책을 통해 ‘늑대와 사냥꾼은 한패’라는 오늘의 현실을 에두르지 않고 전한다. 선의 가면을 쓰고 있어 위험을 알아채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은 비단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무서운 사실이다.
“이 책은 어린이에 대한 성폭력이 결코 처음 만나는 늑대에 의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요. 실제로 성폭력 피해 사례를 살펴보면 가해자의 절반 이상은 피해 아동과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거든요.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자기 욕심의 희생양으로 삼는 거죠. 순진한 아이들은 살살 달래는 어른에게 속아 그냥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서 원장은 혼자 있는 아이들이 특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혼자 있는 아이들이란 부모가 한 명만 있거나 모두 없는 경우, 혹은 모두 일하러 가서 부재한 경우를 뜻하지만 큰 의미로는 아이가 혼자 있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경제 수준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아동 성폭력 발생 빈도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사실 수치 자체는 비슷하고 사건의 유형이 다르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우범지역의 저소득층에서 발생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은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형태고, 중산층 이상에서 벌어지는 아동 성폭력 피해는 가족이나 형제 혹은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며 쉬쉬하는 분위기로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가족과 친족에 의한 아동 성폭력이 무려 40%에 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림책으로 이야기하는 아동 성폭력 문제
서 원장은 성범죄자의 접근 유형은 크게 애정 표현(예를 들어 의붓아버지), 도움 요청, 애완동물 관심, 선물 대가 요구, 부모 위급 상황 가장의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가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신고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아이들을 골라 아이가 혼자 있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범행을 저지른다고 한다. 피해 아동에게 성적 행위를 가르치거나 신체에 대한 질문을 하고 성적인 그림이나 사진 등을 보여준다. 아동 성폭력이란 단순 노출에서 성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 아동들에게 비밀을 유지할 것을 강요하는데, 이것은 가해자가 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성폭력을 지속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책 속에 그려진 오늘날의 숲을 한 번 보시겠어요? ‘더 우드’라는 쇼핑몰의 광고들을 보세요. 성이 욕구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소비문화에 완전히 편입돼 있어요. 아이들은 비용이 적게 소요되는 대상이 돼버렸고요. 아이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사랑받기 위해서 어른을 대상화하고 있어요.”
성인 성폭력은 갑자기 위협을 당하지만, 아동 성폭력은 아는 사람이 살살 달래며 시작된다. 서 원장은 우리 아이들 역시 ‘모르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이후 ‘적용’이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가해자가 ‘아는 사람’이라는 착한 가면을 쓰고 아이에게 다가온다면 더더욱.
아이와 함께 방법 찾는 게 현명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는 비극이다. 직접적으로 피해 상황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빨간 모자를 쓴 소피아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짐작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닫힌 결말은 아니다. 수상한 사냥꾼을 발견한 선량한 나무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해 소피아를 구출하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는 사람이 많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빠 개개인은 매우 소외된 곳이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도 나를 보지 않죠.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누군가의 관심만이 희망이라는 거예요. 소피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요.”
아이들은 지금 행복하면 그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고 한다. 반대로 지금 불행하다면 그것 또한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빨간 모자처럼 부정적인 경험을 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괴롭힌 것임에도 피해를 당한 자신이 영원히 괴로울 것이라 믿는다.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변한다고 이야기해준다 해도 아이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 외래진료에서 스토리 치료를 한다고 서 원장은 설명했다. 스토리, 즉 이야기는 작가에 의해 얼마든지 뒤의 상황이 변할 수 있다. 아이들 스스로 작가가 되어 절대 변하지 않을 듯한 현재의 괴로움을 바꾸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은 지금일 뿐이고,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는 그 핵심적인 메시지를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잘 전해주고 있어요. 날씨가 바뀌듯 인생도 달라진다고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날씨가 변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잖아요. 따라서 힘든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계속 이야기해주시길 바라요. 변할 수 있다고.”

그림책으로 이야기하는 아동 성폭력 문제
“이 문제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줄지 부모님들이 많이 어려워하세요. 아이를 도와준 사냥꾼이 사실은 늑대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예외가 아니죠. 숨길 수 없는 현실이라면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고 아이와 함께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해요. 누구를 조심하라는 식의 사람보다는 ‘상황’에 초점을 두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말이에요.”
혹 아이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거나 의심 증후가 보인다면 부모의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서 원장은 강조했다. 부모의 첫 반응이 많은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절대 놀라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가해자의 발뺌을 들어주거나 현실을 회피하려는 자세도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된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책임이 있으며, 아이를 위해 행동할 것을 약속해준다. 그리고 무엇을 묻든지 답해주고 아이의 증상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창피해하지 않도록 한다. 정보를 수집한다며 꼬치꼬치 묻는 것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니 즉각 전문가나 신고 기관에 도움을 청하자.
“우리 아이들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킬 수도, 보호할 수도 없는 게 현실임을 이제 받아들여야 해요. 어차피 맞닥뜨려야 하는 숲이라면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하는 것이 보다 성숙하고 건강한 아이로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될 거고요. 또한 아이들을 지키는 진짜 방법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 숲 자체를 안전하게 바꾸는 길일 거예요.”
경찰의 구출로 무사히 엄마 품에 안긴 소피아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동화책은 마무리된다. 이 시대의 빨간 모자 소피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누군가의 관심이 소피아를 구했다는 것과 날씨가 변하듯 아픈 경험을 한 소피아도 다시 행복하게 변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서 원장이 다시금 「빨간 모자」를 편 이유다.
아동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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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아동센터 02-3274-1375
해바라기 아동센터는 19세 미만의 성폭력 피해 아동과 가족, 성폭력 피해를 입은 지적장애인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수사 증거 자료 확보와 피해 아동 응급처치, 소아정신청소년과와 임상심리 전문가 등 전문가 그룹에 의한 후유증 치료까지 아동의 신체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종합 진료를 아동 중심의 통합 서비스로 제공한다. 이 밖에도 수사 및 재판을 지원하고 소송 안내와 변호사 자문 상담 등을 연계해주며 2차 피해 예방, 피해 가족 보호까지 지원한다. 24시간 아동 성폭력 신고·접수가 가능하며, 전화 및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상담도 할 수 있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프리랜서) ■사진 제공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사계절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