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놀이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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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식어보다 설득력 있는 솔직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고민정 아나운서. 든든한 남편과 듬직한 아들,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그녀의 감성 육아 에세이를 전한다.

물놀이
[명사:물로리]

① 물가에서 하는 놀이 ② 잔잔한 물이 공기의 움직임을 받아 수면에 잔물결이 이는 현상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물놀이에 얽힌 추억 하나
지난겨울에는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폭설과 혹한이라는 뉴스가 귓전을 때리더니, 이제는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장마와 폭염이란다. 덕분에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옛 추억으로 빠져본다.

그때는 지금처럼 휘황찬란한 워터파크는 있지도 않았다. 그냥 네모난 수영장에 물 한가득 받아놓고 그 주위로 선베드 대신 돗자리 하나씩 깔아놓는 게 다였다. 여자아이들은 빨갛고 노란 수영복에 조잡한 꽃들이 가득 붙어 있는 수영 모자를 썼고, 남자아이들은 어두운 색깔의 헐렁한 사각 수영복을 입었다. 지금처럼 몸에 딱 붙는 삼각 수영복은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조금 더 커서 TV 속 연예인이 입고 나온 걸 보고 민망해했던 기억이 선명한 걸 보면 최소한 1980년대 말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삼삼오오 모인 가족들은 집에서 만든 혹은 수영장 근처에서 사온 음식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입장했다. 그때 우리가 가장 자주 가지고 갔던,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메뉴는 양념통닭이었다. 용인에 있는 한 수영장에 자주 갔었는데, 지금은 워낙 발전해서 다양한 종류의 치킨집들이 있어 골라 먹을 수 있지만 그때 그곳엔 단 한 집뿐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판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갓 잡은 닭으로 튀겨 나온 것만은 확실했다.

그 집 주위로는 항상 닭털들이 날렸었고 조리되어 나온 닭에서는 미처 다 뽑히지 않은 털들이 몇 가닥씩 발견되곤 했다. 그걸 뽑으며 싫은 내색을 하면 아빠는 토종닭을 갓 잡아서 그런 거라며 되레 털을 찾기까지 하셨다. 어쨌든 내게 닭털은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수영장에서 먹는 그 양념통닭 맛만큼은 꿀맛이었다. 집에서 닭 한 마리를 시키면 항상 두 오빠에게 밀려 닭다리는커녕 닭 날개 하나, 가슴살 하나 먹는 게 다였다. 하지만 수영장은 주로 오빠들 빼고 나만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닭은 온전히 내 차지였다. 한참 물장난을 치고 나오면 손가락은 쭈글쭈글 불어 있었는데, 온몸이 젖은 채로 그냥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그 불어터진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먹는 양념통닭은 천상의 맛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준비해오신 수박을 한 입씩 베어 물면 내겐 그게 최고의 피서였다. 수영도 못하고 심지어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였지만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게 된 계기는 다섯 살 때쯤이었다. 온 가족이 실내 수영장으로 놀러 갔는데 다섯 살, 여덟 살 차이가 났던 나는 두 오빠와 함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끼어주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오빠들은 위험한 곳일수록 더욱 재미를 느끼며 뛰어다녔지만 난 어려서 그저 쳐다보고만 있거나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정도였으니까. 그날도 내 또래가 놀 만한 얕은 물에서 첨벙거렸으면 됐을 텐데, 노는 오빠들 쫓아다니는 게 더 재미있었는지 그 주위에서 서성거리다가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오빠들이 잠시 다른 쪽으로 뛰어간 사이 역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한 무리가 실수로 나를 물에 빠뜨리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물의 깊이는 내 키를 훌쩍 넘었고, 수영도 할 줄 모르던 난 엄청난 양의 물을 마시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딸이 없어진 걸 알아챈 엄마가 달려오셨고, 아직도 누가 내 생명의 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후 물 밖으로 건져진 난 사람들에 둘러싸여 숨을 헐떡였다. 그때의 두려움은 평생을 따라다녔고, 그 이후로는 수영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으면 기겁을 하며 뛰쳐나왔다.

물놀이에 얽힌 추억 둘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가만 보면 난 은근히 겁도 많고 소심한 편인데 가끔씩 ‘나름’ 대단한 도전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시위 현장에 뛰어든다든지, 수천 명이 구경하는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한다든지, 한창 방송 잘하다가 느닷없이 휴직을 하고 중국으로 훌쩍 떠난다든지….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를 두고 큰 결심했다고 박수 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그저 순탄한 삶을 지향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중국 유학 시절, 난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깨고자 첫 번째 시도를 했다. 한국에 있을 땐 고등학생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몸매에 큰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난 수영복 입는 것 자체를 꺼리다 못해 몸서리치게 싫어했고, 아는 이들과 목욕탕에 가는 것조차 거부해 심지어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가도 근처 바닷가를 걷겠다는 둥 누가 날 찍을지도 모른다는 둥 핑계를 만들곤 했다. 그랬던 내가 수영장을 내 발로 들어섰으니, 대단한 변화였고 결심이었다.

나 말고도 물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다. 내가 뚱뚱한 몸을 보이기 싫어 수영장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마른 몸을 보이기 싫어 가지 않던 사람이다. 6년을 연애하면서 바닷가를 거닌 적은 많지만 바다에 몸을 담근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이것도 천생연분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우리 부부가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언젠가 아이가 생길 테고 혹시 물놀이 도중 사고가 나면 몸을 던져 아이를 구해야 하는데 수영을 못해 발만 동동 구를 순 없지 않느냐 하는 거였다. 그야말로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예비 부모로서의 준비였던 셈이다.

수영 강습을 위해 중국 수영장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우린 서로의 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래서 당신이 수영장 오는 걸 싫어했구나. 하하하.”
마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던 건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라는 사실. 근처에 한국 교포들이 꽤 살긴 했지만 일부러 그들이 자주 오는 시간을 피해 강습 시간을 잡았다. 올록볼록 엠보싱처럼 튀어나온 살과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실루엣을 대조적으로 갖고 있던 우리는 일단 수영장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만으로도 큰일 했다며 뿌듯해했다. 두 사람 다 중국말이 서툴러 배우는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최소한 물에는 떠야 한다는 생각에 안면몰수하고 열심히 선생님을 따라 했다.

“어! 어! 나도 앞으로 나가네!”
두 사람 다 평생 처음으로 기구의 도움 없이 물에서 떴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겨우 1m 전진했을 뿐인데도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는데도 물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게 무척 신기했고, 이제 우리의 아이를 물에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렇게 수영이 재미있는 건 줄 진작 알았더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배울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 부부는 사이판으로 갔던 신혼여행 때도 스노클링만 겨우 했을 뿐 에메랄드빛 바닷물을 즐기지도 못했다. 그뿐인가. 라오스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속으로 다이빙도 하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기는데, 우리는 그저 강가 오두막에 앉아 코코넛밀크만 쪽쪽 빨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가지 못할 곳에서 재미있는 추억을 남길 수도 있었는데, 둘 다 발만 담그고 대리만족만 해왔으니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태어나 처음 배운 수영 때문에 이곳저곳 근육통으로 시달렸지만 누가 더 오래 버텼다느니, 누가 더 먼저 도착했다느니 하는 얘기들로 중국에서의 추억을 하나 더 만들어갔다. 그래서일까. 이젠 물만 보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기는지 얕은 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옛날 같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서로 피식피식 웃는다.

“물이 저렇게 얕으면 재미가 없지. 레일이 저렇게 적으면 어떻게 수영을 하라고….”

물놀이에 얽힌 추억 셋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이후 은산이가 태어났고 우리는 은산이가 과연 물을 좋아할까 무서워할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엄마, 아빠 둘 다 기본적으로 물을 무서워했지만 수영을 배운 이후에는 마치 돌고래라도 되는 냥 물을 좋아했기에 아이의 본능적인 반응이 궁금했다.

처음 물놀이를 간 건 돌이 채 되기도 전에 간 워터파크였다. 거기에선 어찌된 일인지 연신 시무룩했다. 나름 준비는 철저히 했다. 선배 엄마의 조언을 참고해가며 가방을 싸는데 챙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낯설고, 또 나를 골탕 먹인 건 방수 기저귀였다. 그런 게 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난 기저귀니까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하루 전날까지도 그저 여행 간다는 생각에만 젖어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겨울이라 방수 기저귀가 없다는 것이다. 선배 엄마에게 물어보니 그런 건 미리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한다며, 방수 기저귀를 차지 않으면 일반 기저귀는 물을 흠뻑 빨아들여 엄청 무거울 거라는 둥, 기저귀를 안 채우고 수영복만 입히면 은산이의 응가가 수영장 물에 둥둥 떠다녀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을 거라는 둥 무슨 일이 있어도 방수 기저귀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난 여행 가기 전날 그놈의 방수 기저귀를 찾으러 마트를 몇 군데나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결국 집에서 꽤 떨어진 대형 마트, 그것도 창고 깊숙한 곳에서 방수 기저귀를 찾았고 늦은 시간까지 미처 싸지 못한 짐을 싸느라 분주해야만 했다. 그렇게 어렵게, 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물놀이 여행이었는데 정작 아이는 물속에서도 눈만 끔뻑끔뻑. 물 밖으로 나가겠다는 아이를 몇 번이나 억지로 물속으로 데리고 들어갔는지 모른다.

“은산이는 아무래도 물을 싫어하나봐. 애들은 대부분 물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던데….”

하지만 낙담도 잠시! 돌이 지나고 뛰어다니기 시작하더니 그때부터는 목욕탕에서도 안 나가겠다고 매일 씨름이다. 그 전에는 욕조 안에 앉혀놓으면 얌전히 앉아서 목욕만 하고 조금씩 손으로 물장난 치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샤워기를 뺏어 놓지 않을 뿐 아니라 그걸로 목욕시켜주는 엄마를 공격하느라 정신이 없다. 비가 온 뒤 물웅덩이만 봐도 얼굴에 화색이 돌며 뛰어가 물장구를 치고, 계곡에 가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서도 첨벙첨벙 잘도 논다. 지금도 ‘물’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물장난하게 해달라고 엄청 졸라대니 물을 싫어하는 것 같다던 그때의 생각은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물에 대해 민감하게 구는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에 대한 공포를 내 아이는 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좋은 것만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아이가 물처럼 살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겨우 한두 마디씩 하는 아이에게 좀 어려운 말을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항상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크고 있다고 말이다. 때론 친구로, 때론 뜻을 함께하는 사람으로 산이의 곁을 지키고 싶은 게 진짜 내 마음이니까.

산아, 엄마는 네가 물처럼 살았으면 한단다.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 물놀이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단다. 그처럼 산이도 항상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한단다. 진정으로 높은 사람은 절대 자기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단다. 그렇게 해서 높아진 자리는 당장 좋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금방 무너져버린단다. 나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 높아지는 것이란다. 자신을 낮출수록 사람들은 너를 높여줄 것이고 그러한 자리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쉬 무너지지 않는단다.

그리고 물은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작은 골짜기의 물이 폭포를 만나고 강으로 흘러 마침내 바다로 향하지. 그저 한 곳에 고여 있기만 한 물은 이내 썩어버리고 만단다. 그렇게 작은 물이 거대한 바다를 만나기까지 그저 혼자 흘러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만나는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준단다. 산이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생명과 같은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면서도 그저 지금의 자리가 편하다고 해서 그곳에 주저앉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한단다.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람만이 거대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거란다.

물은 거대한 바위를 만나면 그걸 부수기보다는 돌아서 간단다. 하지만 수만, 수억 번의 물질로 거대한 바위를 작은 모래 알갱이로 만들어버린단다. 평상시에는 유순한 모습으로 산천을 굽이쳐 흐르지만 가끔은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모든 걸 휩쓸어버리기도 한단다. 그처럼 산이도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겐 유순하지만 분노해야 할 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너 자신만을 위한 분노는 스스로를 갉아먹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분노는 모두를 하나로 만든단다. 뿐만 아니라 네가 살아가면서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네게 큰 힘이 되어준단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2004년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2005년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부부가 됐고, 결혼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가 있다.
(@kbsminjung)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원상희 ■사진 제공 / 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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