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不在)
[명사] 그곳에 있지 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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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부재
그와 떨어진 지 이제 겨우 5시간 지났다. 영영 이별한 것도 아니고 3일 동안만 헤어져 있는 건데 벌써 보고 싶어진다. 같이 있을 땐 때론 지루하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단 하루라도 떨어져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람. 남도로 떠나는 기차 안에서 피곤함에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잠을 청해보지만 온통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눈을 떠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보면 따스한 손 함께 잡고 거닐었던 순간이 떠오르고, 하늘을 가르는 한 무리의 철새를 보면 함께 손가락으로 새를 가리키며 웃음 지었던 순간이 조금 전 일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겐 남편이 가장 마지막 사랑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남편이 싫어진 건 아니지만 새로운 사랑이 내 마음속을 가득 채워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나의 아픔을 가만히 안아주는 너
눈물 흘린 시간 속엔 언제나 네가 있어
상처받은 내 영혼엔 따뜻한 네 손길만
널 만나면 말없이 있어도
또 하나의 나처럼 편안했던 거야
널 만나면 순수한 네 모습에
철없는 아이처럼 잊었던 거야
내겐 너무 소중한 너
내겐 너무 행복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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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
이렇게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주인공은 바로 매일 밤 함께 잠들어 함께 아침을 맞는 아들 은산이다. 예전에는 아들 바보, 딸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콧방귀를 꼈다. 아무리 자식이 예뻐도 조금 있으면 다른 사람 좋다고 떠날 사람인데 왜 그렇게 집착하나 생각했다. 바보처럼 자식한테 많은 애정을 쏟아 부으면 아이는 엇나가게 돼 있는데 왜들 그렇게 호들갑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그건 집착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임을. 억누르려 해도 쏟아져 나오는 화산의 용암처럼 뜨거운 본능의 감정임을. 그런 마음을 이성으로 다스리며 그 호들갑스러움을 철저히 조절하고 있었을 뿐임을 말이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호텔 침대에 몸을 누인다.
“당신은 은산이 안 보고 싶어?”
나의 대답에 남편은 ‘쿨’하게 답한다.
“음…, 좀 홀가분한데?”
나보다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던 남편이건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남편의 대답이 왠지 모르게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진다. 난 바로 은산이를 돌봐주고 계실 친정엄마께 영상통화를 건다.
“은산아, 엄마야. 외할머니랑 재미있게 놀았어? 저녁은 뭐 먹었어?”
이제 막 말을 시작해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진 못하지만 나름의 미소와 짧은 단어들로 내 질문에 대답하는 녀석이다. 그렇게 아들과 살가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얼굴을 빠끔히 들이민다. 작은 휴대전화 액정 속 카메라에 남편의 얼굴이 작게 잡혔고 그 순간을 놓칠세라 은산이는 몇 배 더 반가운 얼굴과 목소리로 외쳐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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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빠는 너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어. 그런데도 엄마보다 아빠를 더 찾니?”
어찌나 서운하던지. 아빠 얼굴이 잠깐 스치니까 방긋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목소리 톤도 높아진다. 누가 보면 내가 새엄마인지 알 것 같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린이집 끝날 시간이 돼서 데리러 가면 아빠가 왔을 때보다 덜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낳아준 정보다 키워준 정이 더 깊다고는 하지만 열 달 고생해서 내 배 아파 낳았는데, 심지어 난 이토록 짝사랑 아닌 짝사랑을 하고 있는데 무심한 녀석!
나는 은산이를 사랑하고 은산이는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는 게 우리 집 사랑의 구조다. 남편은 아이를 낳기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제일 중요한 건 자식이 아니라 부부라고 말한다.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할 사람도 부부고 가장 못난 모습까지도 끌어안으며 부대껴야 할 사람도 바로 부부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연애할 때부터 나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는 한결같다. 햇볕이 세게 내리쬐는 날이면 얼굴 탄다고 신문지로라도 가려주고, 자신이 하던 일이 있어도 내 말 한마디면 득달같이 달려와준다. 임신 5개월 된 아내의 뒷모습이 예쁠 리 없는데도 종종 감탄의 찬사를 보내주고,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보다 내가 뭔가 성공하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을 때 더 기쁘다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만약 아들 은산이가 남편처럼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냈더라면 아마 남편이 많이 속상하고 조금 소외된 마음도 들었을 거다. 세 사람의 관계에서 두 사람이 눈이 맞으면 남은 한 사람은 자연히 그 관계에서 도태되어지는 것처럼 은산이와 내가 모자간의 은밀하면서도 진한 정을 나눴더라면 은산이 아빠는 아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보니 은산이가 엄마인 나보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씻겨준 아빠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엄마는 아이가 무엇을 해도 천재로 보인다더니 사랑의 삼각구도를 적정하게 유지시켜주는 은산이가 내겐 참으로 영리한 녀석으로 느껴진다.
그 사람의 빈자리
남편이 개인적인 일로 집을 비우게 됐다. 은산이와 내가 단둘이서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잠을 청해야 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과연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긴장되기도 했지만 짝사랑하는 상대방과 단둘이 있게 돼 무척 설랬다. 오늘만큼은 그 사랑 독차지해버려야지, 하는 마음에 신이 났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재는 곧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라 하지 않는가. 저녁을 먹고 목욕을 시키고 분주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순간순간 몰려오는 적막감은 갯벌에 밀물이 들어오듯 금세 무릎까지, 허리까지 차올랐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녀석이지만, 텔레비전 소리, 설거지 소리, 여러 소음들이 뒤섞였지만 지워진 남편의 중저음은 그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불을 끄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내 출근 준비와 은산이 어린이집 갈 준비, 아침에 먹을 음식들을 혼자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온 집 안의 불을 다 끄고 은산이랑 누웠다. 그런데 이 녀석, 쌩쌩해도 지나치게 쌩쌩하다. 평소 불을 끄고도 1시간 가까이 캄캄한 방 안을 굴러다니기만 하던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아주 방 구석구석을 걸어 다닌다. 급기야는 내 얼굴을 덮쳐 한밤중에 터진 입술 사이로 피 맛도 봐야 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잠에서 깨어 일어나보니 새벽 1시였다. 잠이 오질 않았다. 이럴 땐 거실에 나가 재미없는 책이라도 몇 장 읽으면 금방 잠이 쏟아질 텐데 방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 어렸을 때부터 워낙 무서움을 많이 탔다. 귀신도 여러 번 봤고 가위에도 수차례 눌렸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 혼자 잘 때는 책상 위 스탠드를 반드시 켜놓고 자야 했다. 그나마 결혼하고 8년이 지나다 보니 불을 끄고 자는 것까지는 적응이 됐다. 그리고 결혼 후엔 가위에 눌린 적도 거의 없어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무덤덤해졌는데, 막상 남편 없는 집에 있으려니 등골이 자꾸만 오싹해져서 이불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밤새 깨다 자기를 두어 차례. 드디어 아침 해가 밝았다. 그런데 밤새 잘 잤을 녀석이 눈을 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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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아나운서의 감성 육아 에세이]부재
평상시 은산이의 아침잠을 깨우는 건 남편의 몫이었다. 그랬던 아빠가 안 보이자 녀석은 눈을 끔뻑끔뻑하며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아빠가 있을 만한 곳으로 찾으러 다닌다. 서재를 훑어보더니 화장실도 열어보고 부엌에도 가보더니 아빠가 숨바꼭질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꼬리를 올리며 아빠를 부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선배가 떠올랐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만날 때마다 기분 좋은 바이러스를 옮겨주던 분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 셋을 두고서. 그 아이들도 은산이처럼 이렇게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아빠를 찾지 않을까. 이미 중학생이 된 두 아이는 괜찮겠지만 이제 초등학생이 된 막내는 아침이면 아빠가 숨바꼭질을 하는 건 아닌가 하며 찾을 것만 같다. 그러곤 엄마에게 묻겠지. 아빠 어디 갔냐고, 언제 오시냐고. 그 질문에 엄마는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대답하실 거라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떨궈진다. 단 하루의 부재도 이렇게 큰 공백을 남기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부재는 어찌 감당해야 하나.
있을 때 더 사랑하기
은산이와 떨어져 지냈던 동안 은산이가 내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가슴 깊이 느꼈다. 그전까지 육아와 직장 일에 지친 내게 휴가를 주겠다며 은산이를 친정에 맡기고 열흘 정도 어딘가로 떠나야겠다고 계획을 잡았었는데 짧은 이별 기간을 경험하고 나니, 그 계획을 과감히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던 남편의 부재가 내겐 얼마나 큰 공백인지도 알았다.
모든 만남은 이별을 전제한다. 언젠가 아들은 군대에 간다고 오랜 기간 떠나 있을 테고, 딸은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시집을 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가 먼저 떠날지는 모르겠으나 남편과 나 둘 중 한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그곳으로 떠날 것이다. 그럼 그날 이후 가슴에 뚫린 구멍의 크기는 지금의 하루 이틀 자리를 비운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게 느껴질 텐데….
아마도 햇빛 찬란한 날은 찬란한 대로,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서로의 모습을 찾으려 분주해지겠지. 때론 눈물로, 때론 한숨으로, 때론 먹먹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겠지. 그래서 난 오늘 더 사랑하려 한다. 그리고 영원한 부재를 메울 수 있을 만큼 넘쳐나는 추억들을 가득가득 만들어보련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다. 현재 둘째 나무(태명)를 임신 중이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kbsminjung)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원상희 ■의상 협찬 / 엘르 키즈(02-6004-3930, www.elle-shop.co.kr/ba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