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에 한두 번, 이규찬씨(32)는 좋은 메시지를 담은 글이나 명언을 찾아 삽화를 그리고 칸 만화로 만든 ‘카카오툰’을 제작해 지인들에게 발송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친 일상 속에서도 좀 더 힘을 내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연필을 들어 쓱쓱 스케치를 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두 아이가 저마다 그림 그릴 것을 한아름 들고 다가와 양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덕분에 이규찬씨의 집 한쪽은 아예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가 됐다. 여러 개의 스케치북은 물론 색색의 종이, 다양한 크기의 전지 등이 깔려 있고 각종 물감이며 색칠 도구도 널려 있다. 벽에 붙어 있는 두 아이의 작품들에서는 어른들과는 또 다른, 아이만의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아빠와 그림 그리기-현진·현표 아빠 이규찬씨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고 지금도 미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또 직업과 일상은 다를 수도 있는데 아이와 함께 자주 그림을 그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지금은 아이들이 집에만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종이를 펴고 붓을 드니까 그냥 같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고요. 저도 처음에 아빠란 이름을 가졌을 땐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기만 하더라고요. 아이가 참 예쁘긴 한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게다가 아이가 잘 웃지도 않는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어요. 제가 음악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좀 욕심을 내서 고품질의 오디오와 음반을 사서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곡들을 틀어줬어요. 베토벤이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클래식부터 안숙선이나 황병기 음반, 자연의 소리 모음집도요. 아내는 책을 읽어주고요.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아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자꾸 많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이야기나 생각, 상상 같은 것들. 자신의 안에 있는 것들을 표출하는 데 그림만 한 것이 없지요. 색으로, 선으로, 면으로, 형태로 나타내고 또 이어가면서 점점 아이가 즐거워하고 밝게 웃게 됐어요. 누구보다 아이 스스로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몰두하니까 저로서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죠.
잠깐 지켜보니 아이들이 아빠를 무척 편안해하고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노력의 결과인가요?
저는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 아니어서 생활이 굉장히 불규칙한 편이에요. 대부분의 대한민국 아빠들이 돈 버느라 바빠서 아이들과 마주 앉을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저는 자칫하면 한 달 내내 눈 한 번 맞추기 힘들 때도 있겠더라고요. 애니메이션 작업을 맡으면 늘 새벽에 들어가 잠든 아이들만 보기도 하고요. 문득 ‘이렇게 계속 살면 얘들이 다 커서 날 아빠라 생각할까’ 혹은 ‘내가 만약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사람이 된다 해도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며 손가락질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우연한 계기에 두란노아버지학교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요. 지긋한 연세의 아버님들이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지난날을 후회하시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생각의 전환을 하기로 했죠. 지금 현진이가 이렇게 귀엽게 웃고 현표가 내 등에 업히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아이들도 좋아하고 저도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함께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자는 결심을 했어요. 그게 그림이었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아빠들은 그림을 그려본 지도 오래됐고, 잘 못한다고 생각해서 어려워할 것 같아요. 보통 아빠들은 옆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까요?
미술에 소질 있는 아빠만 함께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에요. 아빠가 먼저 그런 편견을 버려야 해요. 우선 아이가 즐길 수 있도록 아빠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세요.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과 마구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하는 멋진 음악, 오감을 발달시킬 수 있는 각종 도구도 준비하고요. 저는 현진이랑 현표가 작품 활동에 골몰하고 있을 때 주로 치우는 일을 담당해요. 집중할 시간을 늘려주기 위해서죠. 자기가 몰입해서 그리고 있는데 물통이 확 쏟아지면 치우는 게 어렵다기보다 ‘움찔’ 하고 겁을 내면서 결국 그 활동은 멈추게 되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함께하는 거죠. 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제 그림을 그려요. 저희 아이들은 특히 제가 간섭하는 걸 싫어해요.
하지만 보통 미술 숙제 같은 걸 할 때도 부모님들이 많이 도와주시고 함께 완성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아이 그림에 자신이 뭔가를 보태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부모님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아예 무관심한 것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사실 아이가 창작에 몰입했을 때 어른의 개입은 바람직하진 않아요. 대신 저는 시작하기 전이나 끝났을 때 같이 공감하는 방법을 추천해요. 예를 들어 현진이가 나무 위에 예쁜 새를 그렸어요. 그럼 제가 그 그림에다 직접 다른 새 한 마리를 더 그려 넣기보다는 다 그린 후에 “현진이가 그린 그림을 아빠가 계속 보고 있으니까 문득 외롭단 생각이 들었어. 아마 새가 혼자만 있어서 그랬나봐. 아빠는 이왕이면 둘이서 짹짹 노래하고 같이 지내면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라고 얘기해보는 거죠. 아빠의 의사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의견을 전하는 정도로요. 중요한 건 아이 나름의 느낌과 고유한 생각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의 모습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가장 크게 체감한 변화는 무엇인가요?
잘 웃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가족 모두 활기차졌어요. 현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짜증도 안 부려요. 남매간 우애도 얼마나 좋아졌는데요. 먹을 거 갖고서는 서로 양보하라며 싸워도 도화지를 펴놓고는 희한하게 말없이도 딱딱 분업이 돼요. 서로 통하는 게 있나 봐요. 오히려 저나 아내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요. 제가 아이들 미술 심리 수업도 하고 있는데 그림의 안정 효과도 매우 커요. 어떤 특정 부분에 대한 치료제는 될 수 없지만,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증폭된 감정을 한 톤 낮추며 차분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또 미술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죠. 저와 아이들 사이에 할 이야기가 훨씬 많아진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아이들의 모든 표현은 사실 부모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경향이 많거든요. 그림을 통해 저도 몰랐던 아이의 여러 모습을 발견하는 놀랍고도 기쁜 순간을 자주 경험해요.
그러한 모습을 부러워하는 다른 아빠들에게 꼭 명심해야 할 조언을 덧붙인다면요?
그림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상상하는 능력을 확대해줘요. 앞으로 세상은 문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들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더욱 필요할 거라 생각해요. 아이들이 좀 더 그런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아빠가 도와주세요. 그리고 저는 아이가 잘 클 수 있고, 또 아빠와 아이가 잘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건 결국 엄마에게 달렸다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가정에서는 엄마의 역할이 가장 크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빠가 엄마에게 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쏟으면, 아이도 그걸 느끼고 또 좋은 영향을 받는다고 믿거든요(웃음). 표현력이나 감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따뜻한 엄마가 필요해요. 저도 더 노력해야 하고, 모두 아내한테 더 잘하자고요.
아빠의 함께 그림 그리기 노하우
집 안 한쪽에 자유롭게 그림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두세요
저는 방 한쪽에 아이가 언제나 쉽게 만지고 쓸 수 있게 종이, 물감, 색연필 등을 꺼내두었어요. 처음에는 호기심에 만져보던 아이가 점점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꺼내놓게 되는데, 그렇게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해요. 아이가 미술 활동을 하는 중간에는 주변이 지저분해지더라도 청소를 한다거나 정리하지 마시고요. 아내는 아이들이 옷에 물감을 마구 묻히고 바닥에 크레파스칠을 해도 혼내지 않아요. 자신의 창작 공간만큼은 스스로 가장 편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내버려두세요.
재료나 도구, 종이에 제한을 두지 마세요
이왕이면 아이들용 도구가 아닌 고급 미술 재료를 사용해볼 수 있게 하세요. 사치는 이럴 때 부리는 거랍니다. 공장에서 찍어져 나온 색연필이나 물감의 표준색은 사실 자연스러운 색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접하는 색이 지나치게 한정돼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좀 더 다양하고 자연적인 색을 경험하고, 또 서로 다른 질감의 붓이나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그 미세한 차이가 주는 다름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스케치북도 반드시 8절지 안에 세계를 가두지 마세요. 그림이 답답해져요. 저는 규격을 벗어나게 하려고 큰 캔버스나 심지어 벽에도 그려보게 했어요. 덕분에 저희 아이들은 종이 안에 그림을 맞추지 않아요. 바다를 그리다가도 모자라면 종이를 찢어 이어붙이고, 다른 것들을 접목시켜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도 해요.
미술과 음악은 찰떡궁합
미술과 음악은 서로 상호 보완적인 효과가 있어요. 함께할 때 더욱 시너지를 발휘하죠. 이왕이면 메마른 음질의 MP3 파일보다는 풍성한 사운드를 살린 CD를 통해 듣게 해주세요. 촉촉한 원음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몰입의 시간이 배가될 거예요.
끝이란 없다!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이야기를 시작해요
그림을 다 그렸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아빠와 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아이가 완성한 모든 작품은 항상 벽에 붙여두고 관심사와 공감대를 찾아보세요. 훌륭한 대화의 소재잖아요. 단순히 “뭘 그렸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니?”를 묻는 게 아니라 아이와 거울 형상을 만들어보는 거예요. 미술의 좋은 점이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면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생겨난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그림을 완성하는 게 목표라 생각하는데, 실은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있거든요. 그리는 과정만큼 감상하며 같이 나누는 것도 중요해요.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김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