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딸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2014년 3월 6일 오후 12시 47분. 하얀 눈과 함께 은설이가 우리 품으로 왔다. 둘째 아이의 출산은 내게 상당한 긴장감을 안겨줬다. 출산 예정일 한 달 전부터 꿈자리도 뒤숭숭했고, 차라리 빨리 낳았으면 했다가도 눈만 감으면 손에 잡힐 듯한 통증의 공포 때문에 날짜 가는 게 두려웠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대부분이었는데, 둘째 때는 잠시 잊고 있었던 출산의 아픔이 자꾸 떠올라 두려움이 마음을 가득 채우곤 했다.
전날 밤부터 배를 콕콕 찌르는 듯, 싸하게 배 전체가 아파오면서 진통은 시작됐다. 진통이 시작되고 12시간 정도는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아프진 않았다. 그런데 아침 8시 무렵이 되면서 본격적인 진통이 몰려왔고,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으며 눈에는 자꾸 눈물이 맺혔다. 그때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떠올렸던 건 옆에 있는 남편이 아닌 첫째 아이의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었다. 묘하게도 녀석의 웃음소리, 웃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넣자 잠시나마 고통이 지워졌다. 감각을 앗아버리는 마취제만큼이나 강력했다.
“은산아, 엄마 잘해낼게. 보고 싶다.”
반복적으로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럴 때면 반사적으로 은산이의 노래 부르는 모습,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상상은 통증을 버텨내게 도와줬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끝나가는 겨울이 아쉬운지 하얀 눈은 마치 꽃처럼 하늘에서 나풀거리며 내렸고, 은빛 눈(雪)이란 뜻을 지닌 ‘은설’이가 눈(目)을 꼭 감은 채로 내 품에 안겼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딸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남들은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라고 하면 딸이어서 다행이라며 많은 말들을 했다. 둘 다 아들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엄마한테 딸은 있어야 해, 나도 딸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임신할 텐데…. 남아 선호는 이미 구시대의 구호라는 걸 아이를 임신할 때마다 절감했다. 내 주위 대부분의 젊은 엄마, 아빠는 아들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조건 딸을 원했다. 10명 중 1, 2명 정도만 아들을 원할 뿐 대부분은 딸을 선호했다. 하지만 난 달랐다. 첫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둘째도 아들이길 바랐다.
몇 년 전 ‘특명 공개수배’라는 범죄자 관련 방송을 진행했다. 원한으로 사람을 헤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다뤘던 아이템은 상당수가 일명 ‘묻지 마’ 범죄였다. 피해자는 그야말로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누군가를 헤치지도, 누군가에게 분노를 심어주지도 않았는데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그 방송을 하면서 세상이 무서웠다. 언제 나도 그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던 것이. 아들은 그 녀석만 올바른 사고를 하게 키우면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지만 딸은 늑대 같은 남자들에게 언제 힘으로 제압당할지 모르니 자나 깨나 걱정이었다. 성폭행 혹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가해자인 남성을 일벌백계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여성의 행실이 바르지 않았던 건 아니냐며 피해자인 여성에게 눈을 흘긴다. 여기에 대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게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이니까.
또 남녀평등이 이뤄졌다,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내 눈엔 아직도 여자에게 세상은 불평등하기만 하다. 소위 말하는 고소득, 고위직에 분포하는 남성의 비율이 높은 만큼 저소득 직종엔 여성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지만 여기에서 만족하기엔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끝으로 둘째도 아들이길 원했던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첫째 은산이에게 동성의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어려선 24시간 함께 뛰어놀고, 부모인 우리가 죽은 뒤엔 외롭지 않고, 이성(異姓)은 이해하지 못하는 동성(同姓)만이 나눌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동생을 만나 기쁜 은산이.
딸에게
엄마가 가장 힘들어한다는 한 달이 지났지만 이렇게 편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만큼 힘들지가 않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잠과의 전쟁이 제일 심할 시기인데, 둘째 은설이는 어찌된 일인지 낮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젖을 먹으면서 해만 저물면 기본 4~5시간씩은 쭉 이어서 잔다. 더구나 오빠인 은산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쯤 되면 깊은 잠에 빠져 한참을 자고 은산이가 잠들고 나면 일어나 젖을 달라고 엄마를 부른다. 두 녀석이 동시에 날 찾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큰 고민 중 하나였는데, 고맙게도 은설이 덕분에 큰 무리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은설이가 잠든 사이 나와 남편은 첫째 은산이가 엄마, 아빠를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더 많은 스킨십을 나누고 함께 책도 읽고 목욕도 한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의 사랑은 동생이 생겼다고 해서 나눠지는 게 아니라 그만큼의 사랑이 더 생겨난다는 걸 느끼도록 몸의 언어로 계속 말을 건다. 그래서인지 말로만 듣던 첫째 아이의 타오르는 질투심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온 가족의 협동으로 육아에 대한 큰 스트레스가 없다 보니 모유도 잘 돌고 몸도 생각보다 가뿐하다. 잠깐이긴 했지만 내심 아들이길 바랐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특히나 은설이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 미안하다.
안녕하세요, 제가 조은설이랍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이런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겠구나.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 겪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아픔이 무척이나 크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입덧의 괴로움, 10kg이 넘는 무게를 매일 밤 온몸으로 이겨내야 하는 나날들, 출산하는 그 순간, 젖이 터져 나오기까지의 아픔, 출산 후 저려오는 손가락 마디마디, 젖을 물리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날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더구나. 물론 그 아픔보다 더 큰 기쁨이 있지만 이 엄마는 그저 네가 아프고 고생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구나. 엄마가 대신 낳아줄 수도 없고 말이야. 대신 네 아이는 내가 키워줘야겠지?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딸아이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다 보니 진도가 여기까지 나갔다. 나가도 너무 나갔지 하며 혼자 피식 웃는다. 내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보고 자란 게 있어서다. 3남매를 키우시던 친정 엄마는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하시느라 항상 바쁘셨다. 거기에다 개구쟁이 두 아들과 손이 많이 가는 막내딸을 키워야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우리를 돌봐주셨던 건 외할머니셨다. 아주 가끔 엄마, 아빠께서 부부 동반으로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꼭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와 계셨고, 그때 들기름을 넣고 달달 볶아주셨던 김치볶음의 맛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이런 외할머니의 모습은 은산, 은설이의 외할머니이신 나의 친정 엄마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우리 부부는 보통의 맞벌이 부부에 비하면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내가 회사에 가야 하는 직장 맘이긴 하지만 남편이 집에서 작업하는 시인이다 보니 아이를 집에 혼자 둬야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도 간혹 남편과 함께 꼭 참석해야 할 일정이 있을 때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 때문에 사회생활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만 집에 혼자 둘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도움을 주시는 건 친정 엄마다. 이 세상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세 살짜리 천방지축을 돌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도 매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외손자를 돌봐주신다. 당신께서도 젊은 시절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았듯 딸인 내게도 그렇게 든든한 우군이 돼주고 계신다. 아마 친정 엄마가 안 계셨더라면 난 아이를 키우면서 더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엄마는 나에게 대를 이어 딸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쏟아주셨고, 나도 역시 내 딸 은설이가 아이를 낳아 도움을 청하면 모든 일을 제치고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친정 엄마의 뒤를 밟아 나도 또 한 명의 ‘친정 엄마’가 돼가고 있다. 그리고 내 딸도 똑같겠지.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딸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얼마 전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라는 책을 내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됐다며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나보다 한 남자가 더 좋다고 떠나는 딸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아마 다행이다 싶다가도 서운한 마음이 드셨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나도 20, 30년쯤 후엔 딸아이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을 게 뻔하다.
어디 그뿐인가. 남자친구 갖다 준다고 김장 김치며 곰탕이며 몸에 좋은 음식을 싸다 나를 것이고, 밸런타인데이라도 되면 아빠한테는 달랑 초콜릿 하나 주면서 남자친구에겐 직접 손으로 만든 초콜릿을 선물할 것이다. 내 눈엔 내 딸보다 한참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내 녀석이어서 차라리 헤어졌으면 했는데, 그 녀석과 헤어진 게 뭐가 그리도 슬픈지 사흘 밤낮을 울면서 청승도 떨 테고 말이다. 그러곤 결국 제 짝을 만나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결혼식장에 들어서겠지. 그렇게 모든 게 돌고 도나 보다.
어린 시절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면서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 엄마만큼이라도 엄마 역할을 잘하고 싶어 ‘이럴 땐 엄마가 어떻게 했었지?’ 하며 친정 엄마를 따라 한다. 아마 더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 따라 하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내 딸도 아이 엄마가 되면 지금의 나처럼 친정 엄마인 나를 따라 하겠지? 또 하나의 고민정이 생겨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딸이 더 아름다운 여인이 되게 하려면 내가 아름다워지면 된다.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이다.
PROFILE 고민정은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가 태어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사진 / 고민정 ■사진 / 원상희(Aye Studio) ■의상 협찬 / 게스 키즈(02-516-5611), 에뜨와(02-527-1430, www.agabangncompany.com) ■장소 협찬 / 베이비훈 스튜디오(02-573-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