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제법 말이 많아진 은산이와 대화하랴, 시시때때로 표정이 달라지는 은설이를 지켜보랴, 조금은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두 아이가 주는 기쁨만큼 더욱 풍성해진 미소가 그녀의 행복 척도를 가늠케 한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눈빛으로 대화하는 아이
제 새끼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못생겼어도 세상에서 제일 미남, 미녀라더니 내가 딱 그런 꼴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동그랗게 뜨며 깜빡이는 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당당히 윤곽을 드러냈던 오뚝한 코, 뽀뽀를 부르는 도톰한 앵두 입술, 굵게 자리 잡은 가지런한 눈썹까지 내 눈에 은산이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완벽에 가깝다. 목욕시키고 얼굴에 로션을 바를 때면, 팔베개를 하고 내 품에서 재울 때면, 앵두 입술을 오물거리며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절로 감탄을 하곤 하는데, 이런 날 보며 남편은 또 시작이라면서 옆구리를 찌른다. 물론 지극히 객관적이지 못한 고슴도치 엄마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이 녀석은 눈웃음은 물론이고 눈빛으로 참 많은 말을 건넨다. 상대방의 의사는 귀로만 듣고도 전달이 되는데 녀석은 꼭 얼굴을 쳐다보게 만든다.

“잘 잤어? 엄마?”
늦잠 자는 엄마를 위해 아빠와 거실에서 한참 놀다 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면 쪼르르 달려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침 인사를 건넨다. 혹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내 턱을 잡아당겨서라도 자기 눈을 보게 만든다. 그러고는 고갯짓까지 곁들여 말을 하니 녀석의 두 눈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엄마는 잘 주지 않는,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면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말한다. 주로 군것질거리를 얻어내고자 할 때 그런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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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탕 먹을까? 한 개만!”
아이들이 먹는 영양제라고 해서 주고 있기는 한데, 어쨌든 밥맛을 없애는 달디단 사탕이기에 칭찬받을 일을 했을 때만, 그것도 하루에 딱 한 번만 준다. 일명 토끼까까. 그걸 ‘득템’하기 위해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상의 애교를 부린다. 마치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있는 힘껏 예쁘게, 그리고 크게 뜨고선 간절한 표정을 짓는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1을 만들어 입 앞에 모으고 고개는 15도 정도 살짝 기울인 채 한 개만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한다. 바쁜 엄마와 놀고 싶을 때도, TV 만화를 보고 싶을 때도 은산이의 주특기는 여지없이 발휘된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는 인간의 끈질긴 노력 중 가장 본능에 충실한 방법이 바로 애교라는 걸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사실 누군가로부터 애교라는 걸 받아본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 꽃 같은 20대를 온통 지금의 남편하고만 지낸 데다, 워낙 연애를 오래해서 지금은 이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사랑의 화살을 날렸는지 가물가물하다. 이렇듯 메말라 있는 내게 온 마음으로 사랑을 보내는 은산이란 이름의 한 꼬맹이가 있으니 마음이 녹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하트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자기 기분이 좋아야 한다. 뭔가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엄마가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빗방울처럼 촉촉하던 그 커다란 눈망울이 바늘구멍만큼 작아진다.

“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자기 기준에 이유 없이 혼난다 싶을 때면 꼭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가끔은 내 기분에 따라 그렇게 혼낼 일이 아닌데도 언성을 높일 때가 있다. 그러면 은산이는 여지없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뜨끔! 몰래 커닝을 하다가 선생님하고 눈이 딱 마주친 기분이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엄마로서의 위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훈육 모드로 몰아간다. 그러면 아이의 눈은 처음엔 내가 왜 혼나나, 하는 마음에 당황한 눈빛을 보이다가 그래도 엄마가 계속 무섭게 쳐다보니 억울한 마음에 화난 눈빛으로 변한다. 그러고는 사랑하는 이로부터 예고 없는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서운하고 처연한 눈빛을 보이며 눈물방울을 뚝 흘린다. 난 흥분한 나머지 마음에도 없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철없는 여자가 되고, 아이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로 이별을 준비하는 그런 남자가 된다. 짧은 순간이지만 녀석은 눈빛으로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오해 그리고 화해
눈빛이란 건 참 묘하면서도 강한 매력을 지녔다. 누군가의 눈을 1분만 사랑스럽게 바라보자. 아마도 그런 눈빛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최소한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얼굴이 빨개지는 걸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찡그리거나 화난 눈빛은 말로 하는 싸움 못지않게 상대의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한다. 바로 얼마 전에 내게 있었던 일처럼 말이다.

“남편 눈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거, 그냥 넘어갈 일 아니지 않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이가 무슨 부부야?”

6년이란 긴 연애 기간 동안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의 눈빛은 항상 따뜻했다. 살짝 처진 눈꼬리는 더없이 너그럽게 느껴졌고, 깊은 눈매에는 거짓이란 그림자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결혼 후에도 그 눈빛은 변함이 없었고 사회생활에서 지친 내 두 눈은 그 사람의 눈빛 속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찡그리면서 말하는 그의 눈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분명 화내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을 찡그리니 마음이 불편했다. 나한테 짜증을 내는 것 같아 괜히 내 말투도 곱지 않게 나갔고 그러다 보면 별일 아닌 일로 싸움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난 자꾸만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대화하게 됐고 그러다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내가 언제 짜증냈다고 그래? 난 화난 게 아니었는데 당신은 자꾸 내 표정 가지고 뭐라고 하더라?”

“당신이 하루 종일 얼마나 자주 찡그리는지 알아? 내가 동영상으로 찍어주고 싶다니까? 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올해로 만난 지 꼭 15년이 됐지만 여전히 싸울 땐 원초적이다. 열한 살이란 나이 차이 때문에 싸우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이는 물리적 숫자일 뿐이다. 난 여전히 별것 아닌 일에도 어린애처럼 펑펑 울면서 싸우고, 남편 역시 별것 아닌 일에도 대화하기 싫어하는 사춘기 학생처럼 입을 꾹 다문다. 그날도 역시 그렇게 유치하게 싸우다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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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많이 찡그리고 말하는구나. 의식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데 계속 찡그리고 있네. 이건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잘 안 보여서 그런 건데….”

이런 웃기면서도 슬픈 일이! 나한테 짜증나는 일이 있어 얼굴을 찡그린 줄로만 알았는데 그 원인은 바로 노안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지만 ‘노안’이라는 저 두 글자가 주는 애처로움은 그 시기를 겪은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남편은 평생 안경 한 번 안 쓸 정도로 시력이 좋았는데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슬슬 노안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이든 휴대전화는 자주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찡그리고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나처럼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조금만 시야가 흐려져도 비타민 A를 섭취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남편의 시력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눈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예고도 없이 스리슬쩍 노안이 찾아온 것이다. 애들 커가는 것만 신경 썼지 남편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선 무심했다. 그렇게 그날 싸움의 끝은 우리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씁쓸하면서도 고요하게 평화를 맞이하게 됐다.

맑고 정직하게 세상 바라보기
난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느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 사람의 눈빛에 의해 크게 좌우한다. 100%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눈빛에서 그 사람의 인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인지, 이해득실을 따져 일을 진행하는 사람인지,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사람인지 등등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을 파악하는 데 눈빛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다. 이렇게 눈빛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누군가가 무심결에 보낸 눈빛 하나에 쉽게 상처받기도 하고, 거꾸로 내가 보낸 눈빛에 혹시 누군가가 상처받진 않을까 싶어 땅만 보고 다닐 때도 많다. 나란 사람은 그야말로 눈빛 하나에 울고 웃는 소심한 인간이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잡티 하나 없던 두 볼엔 숫자를 세어보기도 민망할 만큼의 잡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입 주변으론 그랜드캐니언 같은 주름이 팔자 모양으로 깊게 패어 있고, 탄력 있게 올라가던 눈꼬리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은 노화의 현장 속에 하얗고 까만 두 눈동자가 거울에 반사된다. 그 어떤 의술의 힘으로도 고칠 수 없는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별일 없다면 이제 겨우 인생의 3분의 1정도 산 셈인데 아직까진 마음에 든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논할 만큼 연륜이 묻어 있는 건 아니지만 비겁하지도 않다. 맑고 순수하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탁한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다.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빛도 다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예쁘고 밉고를 떠나 모두 정직한 눈빛을 갖고 있다. 아니 정직하지 못한 세상에서 정직함을 지키고자 노력해온 흔적이 보인다. 결국엔 거울 속 내 눈빛을 닮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하나둘 모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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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들의 눈빛은 맑고 영롱하다. 태어날 때부터 탁한 눈빛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눈빛을 뿌옇게 만드는 세상과 자신도 한때는 맑은 눈빛을 지녔던 어른들이 있을 뿐이다. 난 우리 아이들이 지금의 그 눈빛을 지켰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사르르 녹게 만드는, 거짓말을 한 엄마를 오히려 머쓱해지게 만드는 그런 눈빛 말이다. 그러곤 그 눈빛으로 상대방이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 가늠하기보다는 믿음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신뢰의 눈빛을 지닌 한 사람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1백 명의 사람을 만났다고 그 1백 명이 다 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눈빛이 맑으면 맑을수록 그러한 눈빛을 지닌 이들을 내 주위에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부모인 내가 더 이상 울타리가 돼줄 수 없을 때 자신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기를.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가 태어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장소 협찬 / 서주성, 박소현, 정상진(스튜디오 숲 홍대점, 02-334-9598, www.soopstudio.co.kr) ■의상 협찬 / 게스 키즈(02-516-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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