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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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푼 기대를 안고 1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 이번 가족 여행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아들과의 오붓한 물놀이를 꿈꾸며 수영을 배운 엄마의 노력은 파도와 함께 물거품이 됐고, 연신 옹알이를 하는 딸 덕에 당분간 외식은 금기 사항이 됐다. 개구쟁이가 된 은산이, 돌고래가 된 은설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다시 만난 제주도
1년 전쯤 이 지면에 제주 여행을 다녀오고 쓴 글이 생각난다. 돌이 갓 지난 은산이와 함께 떠난 가족 여행에서 난 걱정했던 것에 비해 큰 문제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그에 감동해 글을 써내려갔다. 처음 타는 비행기에 겁먹지 않을까,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여행한다는 게 아이에겐 정신적, 육체적으로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등등의 걱정을 했지만 녀석은 매번 내 걱정을 파도가 모래 위 낙서를 지우듯 말끔히 지워버리곤 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남편과 나는 아이가 잠든 밤이면 뿌듯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기억으로 인해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갖고 있는 일명 ‘지랄 총량’ 가운데 일부를 소비한 것일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 난 나름 결론을 내렸다. 아이와의 여행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고.

난 그야말로 서울 토박이다. KBS 입사 후 지역 순환 근무 때 빼고는 서울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고, 바다는 가끔 떠나는 여름휴가 때나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난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남편이 꽃과 나무 이름을 읊으며 그에 얽힌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바닷가에서 자란 화가의 그림 속에서 풍기는 바다 냄새를 보고 맡으며 그러한 풍부한 색감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음에 내 자신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내가 그린 그림의 바다는 그저 파란색일 뿐이었으니까. 이렇듯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던 내게 남편이 그랬다.

“어쩌면 당신 같은 도시 태생들이 오히려 더 시골을 동경하는 것 같아. 나도 물론 도시보다 시골에서 살고 싶긴 하지만 적어도 그곳이 가끔 휴가 때 가서 느끼는 낙원은 아니라는 건 알거든. 나 같은 시골 태생들에게 자연은 끝없이 노동해야 하는 삶의 현장이거든.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땐 도시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컸고. 일단 당신은 바퀴벌레만 봐도 기겁을 하잖아. 귀뚜라미를 보고 바퀴벌레 같다고 했지? 나로선 상상이 안 가는 발상이라고. 그저 글이나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의 시골만 생각하다간 실패하기 쉽지.”

하긴 아프리카에서의 삶을 꿈꾸다가 다양한 곤충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심하게 흔들렸던 나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모름지기 다 닥치면 하지 않을까? 4년 전 중국 소수민족들의 마을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로 생긴 막연한 자신감이다. 검정 때가 꼬질꼬질 낀 손으로 빚은 만두도 척척 잘 먹었고,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의 시커멓게 전 이불 위에서도 잘 잤으니까. 어쨌든 도시를 벗어난 삶을 완전히 져버릴 순 없었다. 그런 내게 제주도는 살고 싶은 지역 중 한 곳이다.

“우리 제주도에서 살까? 아이들이 항상 바다를 보며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잖아. 10분만 달리면 바다고, 또 10분만 달리면 산이고. 집 앞 놀이터에서만 놀던 아이보단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의 정서가 더 풍요롭지 않을까?”

여행 가방을 싸면서도 만일 은산이가 바다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냥 눌러앉을까? 경제활동은 어디에서 할 수 있을까? 학교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등등 구체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조각난 엄마의 꿈
제주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추의 작은집’이라는 곳이었는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돼 깨끗한데다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물놀이하기 좋은 금능 해수욕장과 가까워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정한 숙소였다. 그곳에서 거의 1주일을 머물면서 우린 여러 번 바닷가에서 하루 온종일을 허비했다.

1 나는야, 모래성 쌓는 은산 왕자! 2 은산아, 은설아…, 엄마, 아빠는 어디서 자라고? 3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념사진은 필수!

1 나는야, 모래성 쌓는 은산 왕자! 2 은산아, 은설아…, 엄마, 아빠는 어디서 자라고? 3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념사진은 필수!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었을 때쯤 혹시나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하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배워 멋진 자세와 날렵한 몸놀림은 아니지만 아무런 장비 없이도 물 위에 뜬다는 사실, 느리긴 하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내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영장에 가지 않았고, 해외 배낭여행 중에 만난 멋진 계곡에선 남들 다 수영할 때 난 그저 물 밖에서 구경만 했다. 그런 내가 수영을 배웠으니 어깨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겠는가. 제주 바다에 가면 쪽빛 바다에서 멋들어지게 수영을 해볼 참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은산이를 튜브에 태우고, 난 그걸 잡고 헤엄쳐 나가면 은산이가 신기해하겠지? 진짜 좋아할 거야.’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배영을 하고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조개를 주워오는 상상을 했던 건 무리였던 걸까? 나의 기대는 단번에 무너져버렸다.

“은산아! 바다야! 우와. 파도가 밀려오네. 우리 파도타기 할까?”
바다를 보자마자 물에 뛰어들 거라 생각하고 아예 수영복을 입혀 왔는데 은산이는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선 채 물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 감탄사를 잘 연발하는 아이인데 드넓은 바다 앞에선 그저 무덤덤하다.

“이리 와봐.”
“나 모래놀이 할 거야!”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아들을 낳고 싶다던 내게 누군가 그랬다. 여행을 싫어하고 곤충을 무지 무서워하는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다고. 날파리만 봐도 기겁을 하는 아들이 태어났다. 바다에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해서 자꾸 바다 가자고 하면 어쩌지, 하던 내 말에 또 누군가 그랬다. 물을 무서워할 수도 있다고. 1주일 동안 바닷물에 발목만 담근 아들이 태어났다. 누가 그랬나! 아이들은 다 물을 좋아한다고.

은산이는 평소에도 깔끔한 녀석이다. 밥풀이 손가락에 묻으면 꼭 떼어달라고 했고, 머리카락이며 먼지를 내 눈엔 잘 보이지도 않는데 꼭 집어서 버려달라고 내게 주곤 했다. 그런데 그 ‘깔끔’을 제주 바다에서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다 파도가 크게 쳐 바지에 튀면 마치 구정물이라도 튀어 옷이 더러워진 아이처럼 잔뜩 찡그렸다. 그래도 집에서 목욕할 땐 첨벙첨벙하며 곧잘 노는 편이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전이다. 예상치 못한 은산이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남편이 그런다.

“나도 그랬어. 바닷물이 몸에 묻으면 끈적끈적하기도 하지만 그냥 왠지 온몸에 묻히고 싶진 않았거든.”

어쩜 저런 것까지 아빠를 닮았을까. 그래, 누군가 그랬지. 원래 자식은 안 닮았으면 하는 것만 꼭 골라서 닮는다고. 결국 제주의 바다를 눈앞에 두고 그저 백사장 위에서 장난감 그릇들로 상을 폈다 접었다만을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은 온몸에 모래를 묻혀가며 철퍼덕 앉아 노는데 은산이는 모래 묻는다며 끝까지 쪼그려 앉아서 놀았다. 난 그날로 제주를 비롯한 바닷가 인근에서 사는 꿈은 접기로 했다. 정말 오랫동안 꿔온 꿈이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정리되다니….

‘설핀’ 은설이
난 굳이 출산을 장려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출산과 육아는 분명 어려운 일이고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쉽게 애 낳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 또한 아이가 없던 시절 아이를 왜 낳지 않느냐는 말에 언어폭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느꼈기에 더더욱 그렇다. 난 그저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와 사는 모습, 아이로 인해 생기는 추억들, 아이와 함께여서 더 풍성해지는 내 삶이라는 스케치북의 그림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아이를 낳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낳지 않을 테고. 선택은 온전히 그들에게 맡기고 싶다. 어쩌면 이 지면에 아이와 가족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선택하게 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름 이런 심오한 개똥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녀석들이 영 도와주질 않는다.

아이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입도 입인지라 일단 맛집을 찾긴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구쟁이 31개월 아들이랑 뒤집기와 옹알이를 시작했지만 아직 혼자 앉아 있지도 못하는 6개월 딸을 대동해야 하니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유모차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곳이거나 아기가 누울 수 있는 마루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요즘은 맛집들이 소규모가 많아 유모차 부대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뭔가를 구워 먹는 집도 우리에겐 굉장한 모험이 필요한 곳이다. 연기가 아이들에게 안 좋은 건 물론이고 가끔씩 기름이 튀기 때문에 여간 위험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주에 있을 때 이 집에서만큼은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갔다가 핼쑥해진 얼굴로 나온 일도 있었다. 남편과 둘이었지만 은산이 먹이랴, 고기 구우랴, 연기 쫓으랴, 우는 은설이 안아주랴….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너무 조용하면 우리가 방해될까 봐 안 되고, 아이도 먹어야 하니 매운 음식만 있는 집도 안 된다. 그래도 아이를 키운 햇수가 늘수록 요령도 생겨 나름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먹는 욕구를 해소해왔다. 하지만 이것도 이젠 과거 일. 제주 여행을 기점으로 당분간은 다 함께하는 외식은 자제하기로 했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그 이유는 얼마 전부터 옹알이를 시작한 은설이가 마치 득음이라도 하려는 건지 엄청나게 소리를 질러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명도 붙였다. ‘설핀’. 발음은 ‘썰퓐’. 마치 돌고래 소리처럼 고음의 소리를 내기에 은설+돌핀=설핀. 은산이가 말이 많은 거야 아나운서 엄마를 둬서 그렇다 치자. 마치 확성기로 소리를 내는 듯 높게 찌르는 은설이의 목소리는 식당에 있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처음엔 머리숱이 많네요, 애기가 정말 순하네요, 어쩜 이렇게 귀여워요, 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날 이후 요즘엔 목청이 정말 좋네요, 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그래서 남편과 난 옆자리 손님들에게 끼치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초고속으로 음식을 입에 들이붓고 쫓기듯 빠져나왔다. 우리를 보며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이건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아…, 개똥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드라마에서 보듯 네 식구가 화목한 모습으로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를 하는 때는 과연 언제쯤 올까. 아이들과의 외식은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다.

여행의 재발견
아이들과의 여행, 그것도 환상의 섬 제주도 여행은 날 환상 속에서 끄집어내 현실로 끌어내린 여행이었다. 바닷가에서 살겠다는 엄마의 꿈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은산이, 가는 식당마다 득음의 경지를 보여준 은설이. 깨물어주고 싶은 내 자식들이다. 이 두 녀석의 일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분명 집에 있을 땐 밤에 8시간쯤은 쭉 자서 새벽에 깨본 적이 없어 숙소 주인에게도 우리 애가 새벽에 울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새벽마다 돌고래 소리로 울어댔다. 아기 변기가 있을 리 만무한 여행지에서 은산이는 마지막 날 결혼 안 한 주인 이모에게 마치 강아지처럼 마당에 종이 깔고 응가 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은설이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등까지 적실만큼 엄청난 양의 응가를 방출해 화장실 세면대에서 거의 목욕을 하는 기염을 내뿜었다. 난 그때 이상한 눈빛으로 날 힐끔 쳐다보던 외국인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출발하는 날부터 도착하는 날까지 깨알 같은 추억을 안겨준 내 자식들이다. 친한 친구에게 기나긴 이야기들을 요약해 ‘아이와의 여행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그냥 여행지에서 애 보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이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박재찬 ■사진 제공 / 고민정 ■의상 협찬 / 모이몰른(02-3215-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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