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엄마의 보물찾기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22) 엄마의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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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잘한다. 오늘도 아이는 엄마의 칭찬으로 자란다. 작은 단점보다 꼭꼭 숨어 있는 아이의 장점을 발견해 크게 키우는 능력, 오직 엄마만이 할 수 있는 보물찾기다. 은산이는 소심하지만, 세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지만 집중력이 강하다.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소심해도 괜찮아
얼마 전부터 주말마다 첫째 은산이를 데리고 동네 문화센터에 다니고 있다. 하루 종일 뭘 하고 놀아줘야 하는지에 대한 부담도 덜고,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도 찾을 겸 시작한 주말 나들이다. 우리가 간 곳은 은산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그저 춤추고 뛰어노는 신체 놀이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는데, 과정을 등록하면서 은산이가 마음껏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했다. 난 역시 멋진 엄마라는 자부심과 함께 말이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선생님하고 파이팅할까요? 이리 나오세요.”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첫 번째 시간. 30개월 안팎의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선생님께 달려가 손뼉을 부딪치고 안기는 등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은산이는 내게 엉덩이를 붙인 채 꼼짝하지 않는 것이다.

“은산아, 너도 가서 파이팅하고 와.”
엉덩이에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라고 밀어내는 내 손을 온몸으로 저항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폴짝폴짝 뛰며 율동을 하는 시간에도 녀석은 그저 다른 친구들을 쳐다만 볼 뿐 일어서지 않는다. 이런 아이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몇 달 동안 저랑 이 프로그램을 해와서 친숙한 거예요. 은산이도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져서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조금씩 엉덩이를 떼더니 지금은 제법 방방 뛰며 논다. 물론 아직 두 눈엔 수줍음, 몸짓엔 쑥스러움이 가득 차 있지만 말이다. 아이의 숫기 없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쇼핑을 하다 가게 점원이 예쁘다고 말을 걸면 내 치마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 가게를 나올 때쯤 돼서야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요즘은 어린이집 선생님 앞에서도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내 뒤로 숨는 일이 종종 있다. 배시시 웃으면서 말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무척 쑥스러운 몸짓으로 선생님 손을 잡고 있던 사진 속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릴 적 내성적이었던 난 외향적인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보다 먼저 억지로 뭔가를 시키려는 어른들이 참 미웠다. 노래해봐라, 춤춰봐라, 넌 왜 이렇게 조용하니 등등. 나도 무대에 올라가 노래도 잘 불러보고 싶었고, 좌중을 압도할 만큼 재미난 이야기로 친구를 웃겨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간 노래는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똑같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재미가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더더욱 움츠러들고 소심해졌다. 수업 첫 시간에 장기자랑이라도 하라고 하면 고개를 책상에 푹 처박고 있었고, 발표는 선생님이 시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만 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는지 가끔은 내가 봐도 신기하다. 하지만 이렇듯 철저한 ‘소심녀’도 여러 사람의 격려와 칭찬, 관심으로 지금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날 일으킨 칭찬의 힘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셨다. 도회적으로 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때론 차갑게 보이기도 했지만 5학년인 우리들에게 젊고 예쁜 선생님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어느 날 음악 시간.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없는데다 그날 역시 혹시 날 시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책상만 보고 있는데 나를 지목하셨다.

“고민정, 도라지 타령 한 번 불러볼까?”
소심한 아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시키면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난 조그마한 목소리로 최선을 다했다.

“박수! 민정이가 노래를 아주 잘하는데?”
당시 선생님께서는 별 뜻 없이 으레 한 말일 수도 있다. 자라나는 새싹에게 그것도 성악을 전공하는 아이도 아닌 그냥 일반적인 아이에게 굳이 타박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었을 테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는 내게 큰 용기가 됐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

그림에 얽힌 사연도 있다. 난 왜 이리도 예체능에 소질이 없는지…. 음악, 미술, 체육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예체능 시간을 놀이 시간으로 간주해 기다리곤 했지만 난 차라리 국어, 영어, 수학 시간이 더 좋았다. 뭘 하든 잘하지를 못하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더욱 흥미가 떨어지고, 악순환이 따로 없었다. 그때 이런 나를 미술학원에라도 보냈더라면 흥미라도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 두 분 다 직장일로 바쁘신데다 셋째 딸이니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셨을 거다.

그렇게 일상이 지속되던 어느 날 중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수채화를 그리면 매번 스케치북이 물의 과다한 사용으로 울룩불룩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유화를 그린단다. 그것도 명화 따라 그리기. 초등학생의 그림 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난 다른 건 몰라도 그대로 보고 따라 하는 건 곧잘 했다. 게다가 잘못되면 다시 덧칠하면 되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난 또 성실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그림이 우수상을 타게 된 것이다. 그림으로 많은 상을 타본 사람들에게 우수상은 그저 참가상과 같을 테지만, 그림으로 단 한 번도 상이라곤 타보지 못한 내게 그 상은 전국대회 대상 못지않았다. 내 그림은 학교 복도에 턱하니 걸렸고 그 이후 수많은 이사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 집에 잘 ‘모셔놓았다’. 물론 그때 그 상을 받은 이후로 다시는 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 일은 내게 그림 그리는 솜씨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계기가 됐다.

한 사람의 작은 칭찬, 작은 상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까진 아니더라도 용기가 되고 긍정의 힘이 됐다. 움츠린 가슴을 펴게 해주었고, 열심히 하면 나도 할 수 있구나, 라는 걸 스스로 느끼게 해줬다. 만일 누군가 내 소심한 노래를 듣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 들어가느냐는 둥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둥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내 그림을 보고 넌 왜 이렇게 표현을 못하느냐는 둥 창의력이 그게 다냐는 둥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난 더 안으로 침잠했을 것이다. 더불어 나의 쑥스러움 많은 성격을 미워하며 자책했을 게 뻔하다.

끝으로 난 초·중·고, 대학까지 16년 동안 글로 칭찬받아본 적도 한 번 없었다. 글이라고 해봤자 일기나 독후감 정도였지만 언제나 글쓰기는 귀찮은 일이었다. 일기는 개학하기 하루 이틀 전에 몽땅 몰아서 썼고, 독후감은 위인전 제일 뒤에 나오는 요약 글을 짜깁기해서 써가곤 했다. 남편과 연애 시절 썼던 편지를 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정도로 글쓰기에 전혀 소질이 없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책을 읽기 시작하고 한 문장, 두 문장 조금씩 글을 써 버릇하자 어느새 짧았던 글들은 두 권의 책이 됐고, 지금은 이렇듯 지면에 글을 연재하게 됐다. 내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들의 연속이다. 남편이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워주고 못난 내 글에 살뜰한 관심을 가져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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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사랑해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 난 아이가 자신 없어 하고 쑥스러워하더라도 왜 그러냐고 타박하기보다 기다려주고 한 번이라도 더 칭찬해주곤 한다.

“은산아, 쑥스러워서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일어나서 율동하자.”
“괜찮아. 안 해도 돼. 다음에 하면 되지.”
소심한 엄마가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은산이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기에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 성격 또한 제각각이다. 예쁜 얼굴, 못생긴 얼굴은 있을지 몰라도 좋은 얼굴, 나쁜 얼굴은 없듯 모든 성격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트리는 성격, 한 가지에 몰두해 ‘오타쿠’ 기질이 있는 성격,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성격, 사람들을 웃기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성격 등 사람 수만큼 성격의 종류도 수억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리더십이 있고 유머 감각도 있으며 명랑한 성격을 기준으로 삼는다. 마치 드라마 속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누군가 쓴 각본이 아니다. 대범한 사람이 있으면 소심한 사람도 있어야 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 있으면 진지한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숫기가 없는 은산이는 대신 세심한 성격을 가진 아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꼼꼼히 관찰한다. 책 속 캐릭터들도 두어 번만 보면 다 기억해내고, 집 안에 있는 물건들도 평소와 다른 곳에 위치해 있으면 이게 왜 여기 있느냐며 내게 묻곤 한다. 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들이 특히 더 발휘되는 놀이가 퍼즐이다. 아직 세 돌도 안 된 녀석이 80개짜리 퍼즐도 두어 번만 해보면 혼자서도 척척 해낸다. 그러곤 퍼즐 속 작은 그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관심을 보인다.

또 무척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다. 자석으로 된 놀이기구인 ‘맥포머스’로 자동차를 만들어주면 다른 아이들은 금세 손으로 팍 눌러 부수기 일쑤지만 은산이는 끝까지 잘 가지고 논다. 소꿉놀이 음료 병도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입으로 후 하고 불기만 해도 툭툭 쓰러지는데, 은산이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좋아한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신경 쓰여 원목으로 된 튼튼한 걸로 바꿔줄까 고민한다. 또 7개월 동생이 신기해 보이는 구멍마다 손가락을 넣어볼 만도 한데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살살 어루만져준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꽤 길다. 책은 주로 엄마나 아빠에게 읽어달라고 하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혼자서 책을 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도 앉은 자리에서 수십 권의 책을 꼼짝도 않고 읽어내려간다. 그때는 아무리 밥 먹는 게 급해도, 자야 할 시간이어도 간섭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 대략 30~40분은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가, 눈으로만 보기도 했다가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퍼즐도 10개가 넘는 종류들을 앉은 자리에서 다 완성될 때까지 집중한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다는 것에만 신경 썼다면 아이의 이런 보물 같은 장점들을 짚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아는 일은 참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돼서도 ‘내 꿈이 뭐지? 내가 잘하는 게 뭐지?’ 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다. 내성적인 내게서 아나운서의 기질을 발견하고 글 쓰는 소질을 끄집어낸 내 남편처럼 말이다. 엄마로서 나의 역할이 아이의 장단점을 찾아내 알려주는 데 있다면, 아이는 자신의 기질, 성격을 정확히 파악함과 동시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것과 남을 귀히 여기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스케줄로 녹초가 돼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안 자고 밖으로 나왔다고 아빠한테 혼날 것 같았는지 문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다. 괜찮으니 이리 나오라고 하자 내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은산이. 그러면서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예쁘다.”
이어서 힘들어 한숨을 푹 쉬는 내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내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한다. 그러곤 이렇게 말한다.
“엄마 이제 기분 좋아?”
난 이렇게 매일 아들에게서 세심한 배려로 치유받는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박재찬 ■의상 협찬 / 모이몰른(02-3215-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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