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나마스테, 네팔!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24) 나마스테,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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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두고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네팔. 그곳의 어머니를, 그곳의 딸들을 만나면서 잠시 아이들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 은산이와 은설이는 떨어져 있는 동안 부쩍 성장해 있었다. 때때로 떨어짐은 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고, 엄마 역시 성장하게 한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엎친 데 덮친 격
“네팔에 가서 열흘 정도 촬영해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저야 당연히 좋죠!”
섭외를 위해 걸려온 작가의 전화에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지라 앞뒤 잴 것도 없이 일단 흔쾌히 수락했다. 게다가 남편과 함께 가는 촬영이라고 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호시탐탐 어느 나라를 갈까 궁리하는 내게 해외 촬영 제안은 육아휴직 후 받는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은 싱글벙글,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이미 마음은 인천공항에서 이륙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룰루랄라 하다가 아뿔싸! 아이들 생각이 났다. 세 돌이 얼마 남지 않은 첫째 녀석은 요새 한창 엄마한테 온갖 사랑을 쏟고 있는데 과연 떨어질 수 있을까? 기껏해야 하루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본 것이 전부인데…. 어디 그뿐인가? 이제 겨우 7개월을 넘긴 둘째 녀석. 이유식을 하루에 두 번 먹긴 하지만 여전히 모유 수유 중인데다 엄마, 아빠랑 단 한순간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데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여러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기댈 곳은 부모님뿐. 결국 양가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당신들은 자식들의 일을 위해 열흘간의 고생을 기꺼이 해주기로 하셨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젠 여행 가방만 싸면 되겠지?’ 했다. 그런데 웬걸? 출국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가방은커녕 애들 보낼 짐도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있던 설이가 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폐렴 전 단계까지 갔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아마 지난주에 고열이 났던 게 폐렴이 살짝 지나갔던 것 같아요. 아이가 아주 강한데요? 보통 아이들 같으면 입원했을 텐데 장하네요. 그래도 고비가 지났을 뿐이지 당분간은 치료를 받아야 해요.”

출국을 4일 앞둔 날이었다. 촬영을 취소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게다가 이유식을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먹고 나머지는 모유 수유를 하던 설이. 신생아 때 젖이 돌지 않아 분유를 먹어본 경험이 있어 분유도 당연히 잘 먹겠거니 했는데, 먹지를 않는다. 혹시 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싶어 다른 종류의 분유를 사다 날랐고, 혹시나 애 엄마인 친구들은 알까 싶어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기엔 내게 시간이 없었다. 결국 떠나기 전날까지도 설이는 분유를 거부했다.

설상가상 산이는 감기에 중이염까지 겹쳤다. 아이들에게 중이염은 흔한 병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산이가 열흘 동안 지내야 할 곳은 소아과 하나 없는 시골 동네다. 만일 열이라도 나면 응급실이 있는 시내까지 1시간은 가야 하는 곳 말이다. 육아에 대한 정답지까지는 아니어도 참고서쯤은 써서 시부모님께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산이는 갈수록 엄마에 대한 사랑이 넘쳐 잘 때도, 일어날 때도 “엄마 사랑해”라고 속삭인다. 내가 없는 동안 매일 밤 엄마에 대한 배신감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 어쩌나 또 걱정이다. 결국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들에 짓눌려 출국 전날까지 마음속 갈등은 정리되지 않았다. 시간에 떠밀려 출국 전날에야 둘째 설이를 애들 외할머니께, 남편은 첫째 산이를 애들 친할머니께 맡기고 돌아왔다. 집이 무척이나 적막했다. 마음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아까 당신이 산이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울컥하더라고. 꼭 영영 못 볼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국 운전하면서 한참 울었어. 엉엉거리면서. 설이도 친정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다행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잘 놀더라고. 내가 간다고 울지도 않고. 오히려 내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 당신 올라올 때 은산이는 어땠어?”

“할아버지 집에서 열 밤 자면 만날 수 있다고 얘기했더니 알겠다고 하던데? 역시 쿨해.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은 좀 무지근하더라고.”

우린 그렇게 텅 비어버린 집에서 아이들 얘기로 시간을 채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
6시간이 걸려 도착한 네팔 카트만두 공항. 히말라야 산맥이 그림처럼 걸려 있는 곳이었다. 시골 간이역 분위기의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아이들 걱정은 내려놓기로 했다. 네팔에서도 마음이 한국에 가 있다면 촬영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얻은 열흘이 허망하게 흘러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번 촬영은 ‘리얼 체험 세상을 품다’라는 프로그램 촬영차 간 것이었는데, 기본적인 컨셉트는 부부의 배낭여행이다. 거기에 적십자의 초청을 받아 몇몇 마을에서 봉사도 진행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카트만두 도심에 위치한 한 빈민가. 그저 얇은 판자로 세운 집들은 비를 겨우 피할 수 있을 정도였고, 전깃불도 없는 집 안은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각 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곳 빈민촌의 사연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절망 그 자체였다. 난 그중 남편의 외도로 집과 논밭을 잃고 이곳까지 떠밀려온 한 여인을 만났다. 아픈 시어머니와 딸들을 부양해야 하는 그녀는 눈이 무척 크고 예뻤다. 처음엔 우리의 방문을 웃음으로 맞아줘 마음이 가벼웠는데, 속사정을 이야기하며 이내 눈물을 보여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원망과 그리움, 배신감과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까지 그 모든 것을 한 줄기의 눈물이 말해주는 듯했다.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착잡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서는데 한편에서 남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촬영 팀에게 물어보니 아마 아이들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둘러보니 집앞 마당에서 한 아기가 흙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설이랑 똑같은 7개월이었다. 그리고 아기의 엄마, 아빠는 이제 갓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역시 이곳 빈민가에서 살아왔고, 아이도 이곳 천막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실 물조차 마땅히 없는 그곳에서 사는 아이의 건강이 걱정됐고, 서울에 있는 설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며 괜한 미안함마저 들었다. 신이 계시다면 이곳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축복을 내려주시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반면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기 위해 중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러 간 사이에 아이들만 두고 온 집이 산사태로 인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한 어미의 눈물도 봐야만 했다. 단 열흘 헤어져 있는 건데도 그리움에 눈물을 쏟았던 나인데, 하물며 몇 년씩 떨어져 있어야 했던 그 부모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생살을 베어내는 아픔으로 비행기를 탔을 텐데, 잠시의 이별이 가족에게 더 큰 안락함과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해준다면 이쯤이야 하면서 이를 악물었을 텐데 그들에게 돌아온 건 아이들의 사망통지서 한 장. 산사태로 한 마을이 폐허가 돼 인근 군부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난 지역에서였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공동묘지가 돼버린 고향 마을과 초점을 잃은 퀭한 눈빛이었다. 도저히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없어 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었다. 그러곤 죄어오는 가슴을 손으로 세게 두드려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단어로는 미처 설명이 다 되지 않을 끔찍한 고통이, 더 흘릴 눈물마저 사라져버렸을 어미의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네팔 소녀, 타미
그렇다고 네팔이 구호단체에서 하는 캠페인 광고처럼 항상 빈곤과 슬픔만 넘쳐흐르는 곳은 절대 아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수수빠체마와티라는 마을은 달랐다. 그곳 역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웃음과 여유, 행복과 포근함이 가득한 곳이었다.

산이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상당수의 논밭은 계단식인 다랑논이었다. 우리는 마을로 가기 위해선 등산을 하거나 지프차로 곡예를 하며 올라가야 했다. 추수가 한창이어서인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모여 벼를 베고 이삭을 줍고 새참을 먹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마스테”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면 모두들 밝게 웃으며 “나마스테”로 화답을 해주었다. 마을에 수로를 놓기 위해 여자들은 흙을 나르고 남자들은 돌을 부수고 옮긴다. 갓난아이는 바구니에 담겨 일하는 엄마 옆에 누워 쌔근쌔근 잠들어 있고, 여인들이 모인 곳에선 여지없이 웃음과 수다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학교에선 국어시간인지 저학년 아이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운동장까지 새어 나오고, 좀 더 큰 남학생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규칙도 없어 보이는 축구를 하느라 열심이다. 구멍가게에선 시간이 멈춘 듯 주인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계시고, 가게 앞 한쪽에서는 연신 닭이 울어댄다. 그야말로 평화가 깃든 동네다.

며칠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단연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방문했다고 마을 주민들은 성대한 잔치를 벌여주었다. 이슬이 채 떨어지지 않은 싱싱한 금잔화를 하나하나 실에 엮어 우리들 목에 걸어주었다. 대표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모두 걸어주니 수십 개는 목에 건 듯하다. 나중엔 꽃목걸이의 무게에 못 이겨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곤 이어지는 각종 공연. 그중 열세 살 타미라는 소녀가 그들의 전통춤을 보여주었는데 몸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리듬이 몸에 익은 듯한 춤사위랄까? 덕분에 우린 조금 친해졌고 같이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이상으론 우리가 아줌마, 아저씨로 불려야 마땅하나 난 언니, 오빠라는 단어를 가르쳐줬다. 그랬더니 우리가 떠나는 날에도 언니, 오빠를 크게 외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가 언제 또 언니, 오빠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그리고 또 한 명의 타미가 있었는데 그녀는 열여덟 살 여고생이었다. 수로 만드는 공사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친해졌다.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되레 내 걱정을 해주었다. 큰 돌은 무겁다며 작은 돌만 갖다 주고, 자신은 슬리퍼를 신었으면서 등산화 신은 내가 미끄러질까 노심초사했다. 그녀의 눈빛, 몸짓, 손길 하나하나에는 배려의 마음이 그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미가 잘 있는지 궁금해 집으로 놀러 갔다가 다친 손을 보게 됐다. 전날 낫으로 벼를 베다가 다쳤다고 했다. 별다른 의약품이 없는지라 그저 천으로 동여맸을 뿐이었다. 난 약이라도 발라줘야겠다는 생각에 헝겊을 풀고 한국에서 가져온 밴드를 붙였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피가 밴드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때부터였다. 손을 치료해주겠다고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데다, 며칠간의 피로 누적 그리고 엉겨 붙은 피를 보고 쇼크를 받았나 보다. 지금도 내 증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응급 상황이었다. 갑자기 내가 쓰러져버린 것이다. 피가 쏠리면서 심한 현기증이 나더니 급기야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고 손발이 심하게 떨려왔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떨렸고 열 손가락이 곱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배 속 내장까지 저려오고 굳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태프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일이 순식간이었다. 남편은 연신 뜨거운 물로 손을 녹여주었고, 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라마즈 호흡을 계속했다. 출산할 때 하던 호흡법이 이런 응급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스태프는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모두 벗어 내게 덮어주었고, 동네 주민들은 전기 포트는커녕 가스레인지조차 없어 장작불로 물을 끓여 날라주었다. 작은 보건소라도 가려면 1시간에 걸쳐 험한 산길을 내려가야 하는 산골 마을이었기에 앰뷸런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태프는 헬기로 이송해야 한다며 서울과 카트만두 등 비상망을 가동했고, 난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굳었던 손가락이 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호흡이 편안해졌고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끝까지 내 곁을 지켰던 사람이 바로 열여덟 살 타미였다. 혹시 자신의 상처 때문에 내가 쓰러진 건 아닌지, 만일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계속 걱정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마치 잘 짜인 영화처럼 타미가 나와 똑같은 증상을 보이며 쓰러진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의료봉사진이 와서 낫에 베인 상처를 치료받으러 갔는데, 피를 많이 흘리지 않았는데도 심하게 떨며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극심한 통증으로 인한 쇼크가 아니었을까. 이번엔 내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눈 사이가 됐다.

지금도 내 손엔 그녀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마을을 떠나는 마지막 날 난 내가 입고 갔던 후드 티셔츠를 선물로 줬다. 나를 기억할 수 있는 내 물건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옷 한 벌 살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일 텐데도 자신의 손에 있던 은반지를 기꺼이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아쉬운 헤어짐을 해야만 했다.

다시 고마운 일상으로
열흘간의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들은 손주 한 명씩을 집으로 데려다 주셨다. 집 현관을 열자마자 “엄마” 하고 달려와 내 품에 안기며 다시는 가지 말라고 울부짖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애들이 남다른 건지, 내가 너무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울기는커녕 한 번씩 깊게 포옹을 하고는 끝이다. 한마디로 ‘분리불안’ 같은 건 없구나 하면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쿨한 녀석들의 반응에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잠시. 부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분유를 안 먹었던 설이는 하루에 이유식을 세 번이나 먹고도 분유를 200ml씩 벌컥벌컥 마신단다. 감기도 다 나아 약을 안 먹는 건 물론이고 잘 웃던 녀석이 아프면서 웃음이 줄어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눈만 마주치면 방긋방긋 함박웃음을 짓는다. 산이는 노인 회관 어르신들께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온갖 사랑을 독차지했단다. 할머니가 해주신 밥도 척척 잘 먹고, 자기 전에 엄마가 보고 싶다고 몇 번 말하긴 했지만 울거나 그러진 않았다고. 지금도 가끔 시골 할머니 집에 갈까 하고 물어보면 냉큼 그러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잘 지내고 온 것 같다.

여행은 떠나기 전 자료를 찾으며 한 달은 들뜬 기분으로 지낼 수 있어 좋다. 현지에선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이 주는 느낌이 신선해서 좋다. 다녀와선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지루하게 여겼던 일상도 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설이 이유식을 먹이고 있다 보면 아기바구니에 누워 나와 눈을 마주치던 네팔의 아기가 생각난다.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면 열여덟 살 타미 손은 다 나았는지, 추위 때문에 더 고생하는 건 아닌지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은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아닌 어려운 나라에 있는 또래의 친구들과도 함께 살아가야 함을 아는 아이들로 자라주길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네팔은 날 한 뼘 더 자라게 해주었고 내게 풍요로운 마음을 선물했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는 이달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사진 / 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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