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짜일 때 더 행복한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은 보통 무능력한 개인이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시작된다. 욕망을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속으로 꿈꾸는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A양의 사건은 단순한 언론의 오보나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천재 소녀의 거짓말은 학벌 지상주의로 점철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민낯이다. 200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의 학력 위조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능력보다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병폐가 ‘한국형 리플리 증후군’을 만든 것이다. 학벌 콤플렉스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부모들에 의해 생겨난 국민적 정신병과 같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배제한 채 학벌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모든 사람이 꿈꾸고 인정하는 학교에 못 가면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삶의 가치를 다른 곳에서 부여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은 결국 인정받기 위해 사회가 바라는 허구적인 삶을 꾸밈으로써 애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에서 아이들이 성장한다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살아남고 남보다 앞서기 위해 부정과 위선에 대해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짙다. 이런 기조 아래서는 리플리 증후군이 발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제와 논문을 표절하고 자기소개서를 대필하거나 학력을 위조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논문의 부정행위가 발각돼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기 때문에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전문가들은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행동이기 때문에 과도하게 나타나면 사기와 절도, 심각하게는 살인 등 강력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A양의 경우도 대학의 합격증 위조가 큰 문제가 됐다. 이는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하는 중범죄로 결국 다니고 있던 학교에서도 제적이 됐다.
학벌 중심주의는 대학까지도 병들게 하고 있다. 석·박사 학위 타이틀에 목을 매며 쉽고 편한 성취를 위해 논문의 표절·위조·변조 등이 만연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해외에서 한국 대학의 석·박사 학위는 잘 안 쳐준다”라는 자조 섞인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고위 공직자 후보자나 유명 인사들의 논문 표절과 학력 위조도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부정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까지 잃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학벌 중심주의가 변하지 않는 한 부정행위의 근절은 쉽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표절을 타인의 지식과 업적을 훔치는 범죄행위로 인식하고, 대학생들의 일반 보고서나 리포트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다루고 있다. 앞으로 우리 사회도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학문 윤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학벌을 타파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가짜일 때 더 행복한 리플리 증후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님과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학업에 대한 거짓말도 모두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비롯된 것이다. 어른들과 열린 대화를 나누며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을 때 스트레스와 기대에 대한 압박감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공부 이외에도 다른 재능과 진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나는 공부는 부족하지만 이런 부분이 괜찮아. 그래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면 굳이 가상의 현실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수와 실패에 대해 대처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법을 배울 때 아이들은 성장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애정과 인정을 갈구하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천재 소녀의 거짓말에 분노하기보다 연민을 느껴야 할 이유다.
Mini Interview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 숙제입니다

가짜일 때 더 행복한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의 원인은 무엇인가? 주변의 과대한 기대와 압박 때문이다. 아이들은 성적과 연관된 거짓말이 가장 많은데, 커닝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낮은 성적 때문에 매를 맞아야 한다면 거짓말을 하고 커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과도한 기대와 공포는 아이를 극단으로 밀어 넣는다. 거짓말 장애는 결국 부모가 만드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은?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아이와 갈등에 휩싸였을 때 ‘저 시절 내가 부모님께 가장 고마웠던 때는 언제인가?’ 하고 되돌아보는 것이다. 아마도 시험을 망쳐서 혼났을 때보다 따뜻하게 품어줬을 때의 기억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또 아이를 독립된 개체로 생각하고 부모의 삶을 가꾸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부모 스스로 즐겁고 재미있게 살면 아이에게 덜 집착하게 된다. 쉽지 않겠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첫걸음이 된다.
증상이 있을 때 치료는 어떻게 하나? 약물치료가 주된 방법이다. 리플리 증후군이나 조현병(정신분열증)과 같은 망상 장애는 말로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아이는 설득으로 꺾을 수 없다. 그럴 때는 “세상이 네 생각을 받아들여주지 않아 힘들겠구나. 네 마음이 괴로우니까 치료를 한번 해보자”라며 공감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좋다. 이런 증상은 주변 환경에 의해 발병하기 때문에 부모 역시 자신의 어려움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입시에 필요한 능력만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재능에 대해 좀 더 폭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분 좋게 말을 잘하는 것도 영업 분야에서는 큰 재능이다. 실존 지능이라는 재능도 있다. 이를 타고난 아이는 괴로운 일이 생겨도 금방 툭툭 털고 잘 살아간다. 이럴 때 부모들은 걱정 없는 ‘한심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아이는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재능을 가진 것이다. 산을 잘 타고 식물을 잘 기르는 것도 자연주의 재능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 그 안에서 아이의 재능을 찾는 것이 부모와 아이 모두 행복해지는 길이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보라(프리랜서) ■사진 / 이소현 ■도움말 / 최명기(정신과 전문의,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