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대중예술인 것은 필연이다. ‘반보’만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대중도 이해하고 평단도 좋아한다. 대중의 지적(知的)·미적(美的)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즐거움 또한 선사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딱 ‘반보’다. 물론, 이명세도 반보만 앞서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걸 어쩌나. 그는 ‘박자 감각’이 없단다. 숫자 감각도 없고 그렇단다. 그래도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선다. “이명세의 영화”가 즐겁고 가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니까.
지난 9월 7일 인터뷰 당시 영화 ‘M’은 토론토 국제영화제 비전(Vision) 부문에 초청된 상태였다. 공개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약 일주일 후, “강동원 주연 ‘M’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기립박수”라는 헤드라인으로 전하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이어 두터운 마니아층을 양산했던 ‘형사(Duelist)’에 이어 ‘M’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신작 ‘M’ 이야기를 주로 했어야 했던 인터뷰는, 종종 ‘산으로’ 갔다. 그리고 산 위에, 구름 사이에, 이명세가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하고.
다시, 새로운 영화. “M”
장기자 ‘M’ 작업은 어느 정도나 마무리됐나요?
완전하지는 않죠. 몇몇 부분이 덜 됐어. 조금 찜찜하면서 후련하기도 하고. 하지만 또 다시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그렇게 자위해야지.
장기자 이전 작품과 비교했을 때 감이 어떠신지? 작업하면서 느껴지는 게 있잖아요?
괜찮을 것 같은데, 모르지. 처음 느낌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때와 같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되면 대박이지. 그런데 모르겠어. 바람은 그래.
정기자 직접 뵈니까, 잡지 인터뷰에서 봤을 때 이미지와는 달라요. 전에는 되게 ‘아스팔트 같은’ 느낌이었어요.
멋있다 그거. 시적(詩的)인 표현인데.
정기자 근데 지금은….
황토벽? 하하. 술이 안 깨서 그럴 거야. 어제 술을 엄청 먹었어요. 영화 내레이션에 도움을 준 채오기(시인)라는 친구가 현대문학상 받는데, 축사하러 갔다가 축하파티 겸 영화 쫑파티 겸 만났지. 근데 기억이 잘 안나. 마지막에 어디서 마셨는지. 이렇게 기억이 끊어지는 게 참 신기하죠. 이번 영화의 모티브이기도 하고.
장기자 “누구나 살면서 잃어버리는 게 있다”는 거죠(웃음). 기억상실에 대해서는 사전조사도 많이 하셨나요?
오래전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계속 풀어나가는 숙제이기도 하고. 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처럼.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누구는 나를 봤고, 그 친구의 기억 속에서는 내가 어떨까. 그것이 아주 궁금해.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이 진실인지. 지금 네 명이 이렇게 앉아 있지만 몇 년 뒤에 지금 순간을 기억해보면 다 다를 거야. 그러나 각자는 모두 자기가 맞는 것처럼 얘기를 하지. ‘기억의 조절 장치’라든지, 그런 것들이 늘 숙제야.
정기자 김언수씨 소설 「캐비닛」에는 ‘메모리 모자이커’라는 사람들이 나와요. 픽션이지만 설득력 있어요. 일기를 쓰면서 기억을 조작해 그걸 실제로 믿는 거죠. 과거를 원하는 대로 만들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변해가는.
일기도 마찬가지죠. 사실은 조작을 하고 있는 거야. 그날의 느낌은 이미 쓰는 순간에는 지나간 것인데 모르는 것뿐이지. 나도 일기를 써요. 내 일기장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본 사람들은 ‘전투 노트’라고 하지. 후배가 그러더라고. “이건 일기가 아니라 전투 노트”라고. 싸워보자, 뭐 이런 거지.
그렇지. 사실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얘기야. `‘다시 살아보자’는 개념을, 전투 재개시라고 썼지. 근데 이제는 전투 개념을 빼야겠다고 생각해요. 점점 물러지는 것 같아. 다시 전투적인 용어를 좀 써야지(웃음). “자, 다시 한번 해보자.” 이렇게 쓰면 힘이 안 나. “어제 촬영은 이랬지만, 내일은 잘될 거야.” 이러면 약해보이잖아. “전투 재개시, 총알 한 발 장전” 이렇게 써야 강하지.
장기자 영화 ‘M’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나요?
미국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찍으려고 준비했던 영화가 있었어요. ‘미리영’이라고. 너무 아트 영화 같다고 해서. 수정도 하고, 그러다가 ‘형사(Duelist)’를 찍은 거지. ‘형사’도 거기서 준비했던 것들을 표현하는 거니까. 묵혀두기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았어. 막 비슷한 다른 영화들이 쏟아지는 것 같은데, 더 나오기 전에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장기자 강동원씨가, 감독님 영화에 종신 출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하하, 모르겠는데? 종신 출연? 그런데 강동원씨는 나랑 유전자가 참 비슷해. 아니, 생긴 거 말고. 정신의 유전자. 뭘 그렇게 당황해. 당황하지 말고. 섭섭하게(웃음).
정기자 강동원씨도 완벽주의자죠?
상당한 완벽주의자야. 낯가림도 심하고. 예전의 내 모습이랑 비슷한 것 같아. 생긴 것만 빼고(웃음). 말을 그냥 알아 듣는다기보다는, 잘 통하지. 신기할 정도로.
정기자 현장에서는 ‘동원이 형’이라고 부르신다고?
난 다 형이라고 불러요. 이름을 부르고. 외우려고 하고. 현장은 바쁘다 보니까 감정적이 되기 쉬운데, ‘형’자를 붙이면 감정이 풀리지. ‘야!’ 하면 감정 조절이 안 되는데. ‘누구 형’ 하다 보면 풀리잖아. 요즘에는 ‘동원이 형, 야이 씨’ 이렇게 넘나들기도 하는데, 하하.
선택과 극복의 인생,
“공포영화를 찍고 싶은 것은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야”
장기자 감독님 영화는 여자 감성이지만, 실은 남자배우들이 돋보이는 영화들이에요.
여성적인 감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내가 추적하는 얘기들이니까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겠지. 하지만 나만큼 여성적인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어. 여자들보다 더 감수성이 예민할 텐데.
정기자 그걸 언제 느끼셨나요? 아, 나는 여자들만큼 감수성이 풍부하구나.
지금 하는 얘기야. 거의 농담이고. 동원이 형도 저랑 비슷해요. 낯가림 심하고, 앞에 잘 못 서고. 내가 가끔 특강을 하는데, 그때도 떨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가끔 특강을 맡는 거죠. 말도 잘하고,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사실 다리는 덜덜덜 떨고 있어요. 무대 공포증이 있어. 처음 무대에 섰을 때도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꼬집으면서 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요. 한번은 연기자가 시각장애인인데 시계를 차고 나와서, 그걸 보고 대사가 머리에서 다 지워진 적이 있어요. 그런 공포감. 아직 극복하지 못했지. 평행봉, 철봉도 한번 하고 싶은데, 되게 떨어져보고 다쳐봐서. 완전히 공포가 몸에 배어 있어. 공포영화를 찍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장기자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은요?
어둠. 이제 좀 많이 극복했지. 어둠을 바라보는 훈련도 하고. 내가 뉴욕에 있을 때도 2년 동안 불 켜놓고 잤어요. 촬영장에서도 불 켜놓고 자고. 낯선 환경에 거의 적응을 못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사람과 만나서 친해지는 것도 10년 정도 걸려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 만에 친해지는 줄 알지. 나도 막 그렇게 얘기하니까.
장기자 그런 공포는 언제부터였나요?
나 스스로 어린 시절의 정신분석을 가끔 해봐요. 문산에 살았을 때는, 무덤가에서도 놀고 그랬어. 여우 잡는다고 그러고. 서울로 이사 오는 와중에 생긴 것 같아. 초등 1학년 때. 그때부터 따라다닌 화두가 죽음이지. 죽음에 대한 공포. 부모님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그런 거 생각하다가 자다가 일어나서 울고. 형한테 매 맞고(웃음).
우리 우성이 형이랑 나랑 ‘정신의 유전자’가 비슷한 거야. 옛 시인들이 사랑받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어지는 거지. 보들레르와 고흐의 정신이라든지. 그걸 왜, 누가 좋아하겠어? 뭔가 그런 비슷한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맥을 이어가는 거지.
장기자 봉준호 감독을 두고 ‘봉테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감독님도 비슷하시죠?
원래 내가 `‘디테일리’였지. 연출부들은 ‘조잡리(Lee)’라고 그래. 너무 조잡하게 한다고. 하하. 조잡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지.
장기자 극복의 인생이시네요.
인생은 다 극복 아닌가? 극복하고 선택하고. 또 극복하고.
정기자 어둠이 무서운 이유는?
상상력이 무서운 거지.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둠이라는 것이 불가지론(不可知論) 적인 것이니까. 확인할 수 없고, 깊이를 모르는 거잖아. 이번 영화 속에도 조금 들어 있어. 그런 모티브가.
달변을 이어가던 이명세는 사실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다. 강동원과 하지원이 칼 겨누는 소리가 키스 같았던 ‘형사’(Duelist)처럼, 보이는 것보다 감춰진 의미가 풍부한 사람이다. 이명세는, `‘예술가’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최근 사회 분위기에 일침을 가했다. 당연히, 귀에 쏙쏙 들어오는 달콤한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곱씹어 삼킬 가치가 있는 화두다.
이명세의 영화를 좋아하는 ‘착한’ 사람들과 예술가
“예술가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이명세는 고정 팬이 두터운 영화감독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형사’(Duelist)만 70번 봤다는 팬이 보내온 ‘영화 티켓 스크랩’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에 대해 말을 아낄 줄 안다. 속 깊은 그들은,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장기자 이명세의 영화를 주야장천 좋아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일까요?
다 착한 것 같아. 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맑아요. 욕심이 없고. 그걸 분석해도 재미있을 거야. ‘이명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정기자 감독님께서 좋아하는 영화는요? 히치콕?
매일 얘기하는 다섯 명의 감독이 있지.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든, 오스야스 지로, 페데리코 펠리니, 자크 타티. 그런 유전자들. 그 사람들은 정말 영화를 영화로 찍는 사람이야. 영화학교가 있다면, 그 다섯 명이 주임교수들이지. 교장은 부처나 장자, 예수 정도. 히치콕은 초빙교수 정도로는 모셔야 하지 않을까. 그 학교는 들어가기도 힘들어. 하하.
장기자 어린 친구들의 감성은 어떻게 따라가시는지?
많이 만나야 하는데. 노력하지. 그런데 어떻게 만나지? 스태프들도 젊긴 한데, 나이가 어린 거지. 쓰는 용어가 애들 용어일 뿐이지. 정신세계가 늙었어.
정기자 ‘늙는다’는 것은요?
호기심 안 갖고, 생각 안 하고. 그냥 흐름을 따라가는 거죠. 친구들은 책에서 찾는 것이 좋은 것 같아. 정말 뛰어난 감수성 가진 젊은 천재들이 거기 다 있으니까.
정기자 그래서 감독님을 고독하다고 표현한 사람이 있었나 봐요(웃음). 워커홀릭에 완벽주의자라는 얘기도.
완벽주의자라는 것도 웃기는 얘기지. 그건 직업윤리야. 기본이지. 서정주 선생은 그랬지. 24시간 시(詩) 생각하고. 보들레르는 심지어 정부의 품에서도 시를 생각하라고 했고.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마땅하지.
요즘은 그렇잖아. 영화는 영화고, 일이 끝난 후에는 여가를 즐겨야 하고. 일과 삶을 분리하는 그런 것들이 권력의 음모라고 생각한다니까. 삶을 단순화시키는 거지. 일과 삶을 분리해서 집에 가면 일하지 말고 즐겨라. 그러면 사람을 단순성 속에 몰아넣을 수 있지. 만약 기자들이 집에 가서도 글을 쓴다면 그들이 엄청 무서울 것이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집에 가서도 정치 생각하면 나라 발전하겠지. 뭔가 장기 집권을 하기 위해서, 권력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미리 묵계적으로 단순화시킨 것 같아. “인생은 이런 거야” “행복은 이런 거야”라고 적당한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해서 압박을 주는 거지.
그렇지, 예측 가능한 삶이 통제가 가능하니까. 집에서 딴 생각하고 있으면 통제가 되겠어? 나를 통제할 수 있겠어? 못하지. 나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해. 예술가는 예언자들이거든. 예술가가 돈을 잘 벌 수도 있고, 정치를 잘할 수도 있어요. 사실은, 다 천재들이니까. 단지 `권력 유전자와 욕심이 없고 싫을 뿐. 만약 미켈란젤로가 뭔가 한다면. 정말 밤새우면서 발이 썩어가도 할 거 아니야. 딴 생각하고, 다른 생각하는 사람들 아니니까. 그 정열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야. 예술가는 실생활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구분하고. 그러니까 예술가들도, “아, 우리는 그런 것들이 먼가 보다” 하고 그 똑똑한 사람들도 음모에 걸려드는 거지. 아, 그래 그러면 우리도 빵이나 먹고 소주 마시고 죽자. 그렇게.
반보만 앞서가려고 하기는 하는데 “내가 박자 감각이 좀 없거든, 천재가 아니니까 열심히 하는 거야”
정기자 항상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죠. 제가 궁금하기도 하고. 대중은 어떤 사람인가요?
대중을 정의하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그들이 질서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어떤 때는 무지몽매하지만 영악하기도 하고.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라고 생각해. 할리우드에서 박중훈씨가 찍었던 ‘찰리의 진실’, 그게 꽤 괜찮은 영화인데, 손님들이 없더라고. MTV, 이런 것이 뜨고. 그래서 고민했지. “이것이, 뭔가. 대체 대중이 뭔가. 정체가 뭔가.” 대중은 그 ‘시대’야. 그 시대가 만들어내는 거지.
정기자 PD는 ‘반보 앞서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라’는 말도 있잖아요. 너무 앞서가면 공중파에서 외면당하니까. 대중이 외면하니까.
나도 반보만 앞서가려고 하지. 그런데 나는 박자 감각이 없으니까. 하하하. 숫자 감각이 없고. 어리바리하니까.
정기자 맞아요. 항상 ‘내 마음 속의 반보’죠. ‘M’은 몇 보인가요?
그건 정말 모르는 거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왔을 때. 영화 관계자들은 다 의아해 했지만 대중은 좋아했거든. 하느님이 영화 하라고 했으면, 그냥 죽이시지는 않겠지. 대충 먹고살기는 하겠지. 어떻게 먹고사느냐가 문제겠지만. 제발 비굴하게만 안 살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웃음).
정기자 어려운 말씀 두 가지를 하셨네요. “굶어죽기야 하겠어?” 그리고 “비겁하게만 안 살면 되지 뭐.” 그런데 그게 너무 어렵잖아요.
정말 어려운 거지. 서로가 존중하고, 그래야 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아파.
정기자 감독님 인터뷰를 한다고 검색을 해보다가 ‘형사’에 대한 텍스트가 너무 많은 거예요. 이상하다 싶었죠. “형사”, 왜 말들이 많았을까요?
알 수 없지만 시대적인 거겠지. 요즘의 추세가, 문제 있는 것이 있어요. 뭔가 열심히 하고 고집스러운 것을 조롱하는 풍토가 있지.
정기자 심형래 감독 생각 나는데요.
아니, 심형래 감독 얘기는 아니고. 나를 빗대서 하는 거겠지. “영상이 빛나면 뭐 하냐. 내용은 감동이 없는데. 대충 해도 감동시키면 된다. 관객이 들면 된다” 그런 것. 하지만 대충하면 안 되지, 열심히 해서, 감동 주는 것이 맞는 거지. 대충해서 빨리빨리 찍고 그런 얘기는 오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기자들이 맞장구를 쳐요. 그런 풍토가 생겼어. 그럼 뭘 열심히 하겠나. 왜 열심히 살아야 하겠어? 같은 철학이지. 우린 여가를 즐기면서 여유롭게 한다. 그럼 좋지.
잘 쓸 수 있는 타고난 천재들이야 좋지. 하지만 대충하는 천재들은 본 적이 없어요. 모차르트도 역사의 모든 음악을 복기한 사람이고. 보들레르도 뭐 술 먹다가 시 쓴 사람이 아니라고. 어떤 천재도 그냥 뽑아내는 천재는 없지. 그것은 축적된 결과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지, 대충 놀다 영감 받아서 쓴 것이 아니야.
“이거 인물 인터뷰 같네, ‘M’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장기자 몇 부 능선인가요, 지금 감독님은?
한참 가야지. 많은 사람들과 더 빨리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공부할 것 많고(한숨). 사람들과의 관계. 영화감독이 영화만 찍는 것이 아니니까. 관계도 잘해야 하고. 그게 가장 피곤해요. 영화 찍으려면 신경 쓸 게 많아. 밥 먹는 시간, 메뉴 결정. 그게 제일 어려워요(웃음). 이거 영화가 아니고 인물 인터뷰 같네. ‘M’ 홍보해야 하는데. 하하.
정기자 그럼 이 질문만 하고, 영화 얘기해요. 감독님 일상이 궁금해서요. 영화 안 찍으실 때 자전거 타시는 거 빼고.
자전거 타면서도, 그냥 영화 생각만 해요. 그걸 좀 구분하려고 하는데, 잘 안 돼.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아까도 밥 먹으면서, 아, 이거 백그라운드 액션을 이렇게 찍어야겠다. 그런 생각하고. 직업이 돼서.
장기자 가족들은요?
가족도 다 포기한 거지. 난 둘 다 잘하려고 했는데, 잘 안 돼. 내 머리와 육체의 한계지. 나는 고질적인 병이 있어요. 십몇 년 됐어. 다리에 물 차고. 신경 많이 쓰면 꼼짝을 못해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두 다리에 물이 차면 기어 다녀야 해요. 뉴욕에서는 화장실 변기 올라타는 데 한 시간이 걸린 적도 있어. 화장실 가서 울고 그랬지. 이제는 병과 친해졌어요. 노력했지. 내가 딴 짓을 못하게 한 거지. ‘소주 한잔 할까?’ 그런 걸 못하는 거지. 운명이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즐겨야지 어쩌겠어. 여기 우성이 형도 나랑 얘기 통하니까 “인터뷰 됐다, 그만 하고 소주나 한잔 할까?” 그런 것도 이제는 못하는 거야.
정기자 아, 저는 “지금 소주나 먹자” 그러시는 줄 알았죠. ‘네’ 하고 대답할 뻔했네요.
나는 알아. 이제는 본능적으로 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도 확실히 알겠고.
장기자 개봉이 잡혔나요?
10월 26일.
정기자 십이륙… 이네요.
날짜는 좀 그런데(웃음). 좋은 면에서의 쿠데타를 일으켜보자.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근데 왜 10·26으로 잡았지(웃음)?
정기자 문화 쿠데타가 되겠네요.
10·26에 과연 문화 혁명이 일어날 것인가, 그냥 쿠데타가 될 것인가. 그런 거지. 하하.
장기자 아, ‘M’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잖아요? 알려진 것 말고 또 다른 의미는?
(속삭이며) 머니(Money).
(일동 웃음)
‘M’의 또 다른 의미는 돈이지. 하하하. 영화는 숙명적으로 대중예술이니까. 영화산업도 돈과 밀접할 수밖에 없고. 자금이 없으면 영화를 만들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원래 의미의 M은 마티에르예요. 장인.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도 장인이고, 그런 의미로.
정기자 기대하겠습니다.
정신없이는 보지. 보고 나서 “뭐가 뭔지”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느낌이 나쁘지만 않다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도와줘야 하는 거죠. “‘혼란’이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해줘야지. 첫사랑이 왔을 때처럼. 사랑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거잖아. 근데 우리는 뭐가 뭔지 모르겠으면 나쁜 것으로 알아요. 뭔가 충격을 받으면 나쁜 것으로. 그것을 나쁜 것으로 유도를 했단 말이야.
혼돈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거죠. 브로드웨이 평론가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그거야. 관객들 반응은 나쁘지. 그런데 연극하던 사람들은 「뉴욕 타임스」의 평을 기다렸어요. 그 평이 좋으면 다시 관객이 몰리거든. 그런데 특히 21세기 들어와서, 전 세계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경멸 현상이 일어났지. 지식인들이 제자리에 없으니까. 그런 풍토 속에서 나쁜 사람들이 나왔어. 이제는 지식 계급에 대한 반동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반동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풍토로 나타나지. ‘야만의 시대’가 다시 온 거예요.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것이 엄청난 ‘진화’라고 생각하지.
인터넷 댓글들은 야만 정도가 아니에요. 익명성은 두려운 어둠과 같은 정체야. 할퀴고 공격하려고 하는. 지식인들이 잘못한 거죠. 본을 보여야 했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이용하고, 조롱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지식인들이 반성해야 할 시기가 왔어요
정기자 아, 이야기가 급물살을 탈 때 시간이 이렇게 되네요.
그렇지 뭐, 그런 거야. 다음에 소주 한잔 먹으면 되지.
정기자 다음에 언제….
전화해, 월급날. 아, 나는 기자랑 술 마시면 술 안 사. 나를 아는 기자들의 묵계지(웃음).
이명세는 이런 감독이다. 영화 얘기하자고 만나서 보들레르, 모차르트, 서정주 시인과 예수, 공자 얘기를 하고, 점점 산으로 올라가는 대화를 다시 끌어내리고 그랬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거다. 어려운 얘기도 아니다. ‘그런’ 얘기를 빼놓고는 이명세를 말할 수 없다. 결국 이 인터뷰도 ‘반보’만 앞서가려다 박자 감각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딱 들어맞는 정박보다는 엇박의 의외성이 좋다.
이명세는 “천재적인 강동원과 이연희의 스타 탄생을 기대해도 좋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M’의 개봉은 10월 26일이다. 쿠데타로 머무를지, 혁명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마음이 내킨다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새로움은 보장하고, 재미와 깨달음은 덤이니까. 이명세의 영화니까.
■기획 / 장회정·정우성 기자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