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너무 힘들어요. 결혼에 대한 압박도 들고…
결혼은 마흔 살 전에 할 거예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쿨(Cool)하다’는 말이 칭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를 꾸미는 데는 인색한 단어다. ‘쿨한 남자’보다는 ‘쿨한 여자’가 익숙하다.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했다. 영화 ‘어깨 너머의 연인’은 ‘쿨한 여자들’의 영화다. 그리고 묻는다. ‘세상에 진짜 쿨한 여자가 있기는 하냐’고.
‘쿨하다’는 말은 지금까지 오해받아왔다. 가볍게 나풀거렸다. 관례를 벗어나 스타일리시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쿨하다’고 하는 건 그나마 괜찮다. 멋진 스타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자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도 쿨하다고 한다. 혼전순결에 목매는 시대는 아니지만, 여자가 섹스에 대해 거침없이 말한다고 해서 쿨한 사람이 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섹스를 말하는 남자에게는 아무도 쿨하다고 하지 않는다.
단순히 성(性)에 개방적인 태도만 보인다고 해서 쿨한 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연애에는 눈물이 없어야 한다. 남자는 필요조건일 뿐이어야 한다. 쿨한 여자는 주관이 뚜렷하고 당당해야 한다. 당당한 주관은 어떤 명품보다도 여자를 빛나게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쿨한 여자=쉬운 사랑을 하는 여자’ 혹은 ‘쉽게 몸을 허락하는 여자’라는 것은 오해다.
이언희 감독(32)의 영화 ‘어깨 너머의 연인’은 ‘쿨한 30대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표방하지만 그 사랑까지 쿨하지는 않다. 정완(이미연 분)과 희수(이태란 분)는 남자를 만나고, 섹스를 하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눈물 흘린다. ‘주관이 뚜렷하고 당당한’ 그들은 사랑이 고프고, 사람이 그립다. “그냥 한 번 잔거야”라는 말이 마냥 호기롭게만 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누구나 쿨한 척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쿨한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이제는 기존의 ‘쿨함’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정완과 희수만 봐도 그렇죠.”
이언희 감독은 “연인과 이별한 여자가 ‘그냥 보내줬어, 시원하게’라고 말하는 것은 그간의 애정이 가벼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거야’라는 남자의 궤변과 다를 것이 없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시원하게 보내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남자나 여자나,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괴로우면 괴로운 만큼 구질구질하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질척대는 이별이 쿨하다.
영화 ‘어깨 너머의 연인’에서 트렌디한 것은 정완과 희수가 드나드는 호텔과 레스토랑이지 그들 자신은 아니다. 영화는 ‘싱글즈보다 트렌디한 드라마’, ‘한국판 섹스앤더시티’라는 말로 포장됐지만, 감독의 속내를 이해한다면 그게 다가 아니다.
마지막에 그들이 보인 모습이 ‘쿨한 척’이래도 별 상관은 없다. 정완과 희수는 맘껏 고민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한다. 실수도 했다. 그들은 이제 30대 초반이다. 도통한 듯 뒷짐 지고 있기에는 이른 나이다. 2007년, 도시에 사는 30대 여자의 단면이다.
‘...ing’와 ‘어깨 너머의 연인’ 사이
‘어깨 너머의 연인’은 그의 두 번째 영화다. 첫 작품은 ‘...ing(아이엔지)’였다. 임수정과 김래원이 주연했고, 잔잔한 호응 속에 마니아적 사랑을 받았다. “지금까지 ‘...ing’를 몇 번이나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팬들이 있을 정도다. 평단은 그의 첫 번째 영화에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여성적 감수성과 깔끔한 연출력’에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영화를 찍을 때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목적은 있지만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죠. 그런데 막상 ‘감독’이 되고 보니, ‘어떤 감독이 될 것인가’라는 고민이 시작됐죠.”
그의 첫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충무로는 유독 신인 감독들의 데뷔가 많았다. 이언희 감독은 “‘...ing’ 이후 50명 정도의 신인 감독이 데뷔했지만 두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작품으로 일본 영화사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세 번째 영화 역시 찍어야 하니까.
자신이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스크린을 통해 철학이나 예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도 있지만,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업영화의 한계는 생각보다 분명하다.
“영화 한 편에는 정말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요. ‘할 수 있고’, ‘하고 싶고’, 마지막으로 ‘해도 되는 것’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두 번째 영화를 정말 예술가로서, 예술 영화를 찍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나면 영화 인생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웃음). 그걸 고려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죠.”
마초들이 드글대는 한국 영화판에서 여자 감독으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 작품 때는 ‘정신이 없어’ 몰랐지만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절감했다. 그에게 흔히 묻는 ‘충무로에서 여자 감독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질문이 마냥 공허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2000년 당시 영화 ‘행복한 장의사’ 연출부로 있을 때, 만날 혼났어요. ‘충무로 판에 있는 애가 왜 그렇게 여성스럽냐’는 말을 많이 들었죠. 제가 사실 여성스러운 타입은 아닌데. 그때 감독님한테 만날 혼나면서 ‘머리도 짧게 좀 하고, 남자들이랑 이렇게 좀 어울리고’ 하는 핀잔을 자주 들었어요(웃음).”
“하지만 제가 나름의 감수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죠. 그리고 충무로 사람들도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나이 어린 감독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고, 여자 감독에 대한 욕심도 있었어요. 운이 좋았죠(웃음).”
영화 속 캐릭터와 감독 사이
‘어깨 너머의 연인’의 두 여자는 30대다. 이언희 감독은 올해 서른두 살이다. 서른 살이 될 때, 2년 전에는 `‘서른’의 의미를 몰랐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심정도 아니었다.
“서른둘이 되면서 바뀌었어요. 주름도 발견했고, 결혼에 대한 압박도 서서히 들어오죠. 일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해요. 어머니는 한숨 쉬면서 말씀하세요. ‘왜 우리 딸은 시집을 안 가는지, 영화 안 해도 되니까 시집갔으면 좋겠다’고. 결혼, 할 거예요. 마흔 전에(웃음).”
연애만으로 마냥 즐거울 수 있던 시기가 지난 것도 나이가 선물한 현실 감각이다. 연애에 대한 기대가 달라졌다. 눈이 높아지고, 기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거는 기대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말이 맞다.
“나이가 들면서, 이 연애가 나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하게 되죠. 처음 연애했던 친구도 그랬어요. 생각도 어리고, 나이도 어렸고, 집도 가난했죠. 그런데 마냥 좋았어요. 없는 용돈 쪼개서 밥 사주는 것이 행복했고. 지금은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더 이상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간직할 나이도 아니다. 열여덟 살에 운명적인 사랑을 했더라도, 결혼할 준비가 된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이언희 감독은 “그냥 ‘좋은 사람’과 하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뭘 했을 때 보여주는 반응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무작정 ‘너니까 믿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아요.”
촉망받는 감독으로 살고 있지만, 그 역시 ‘오늘’을 살고 있는 30대 여자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진행 중이다. ‘...ing’에서 ‘어깨 너머의 연인’까지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첫 영화는 ‘실현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감독이 된 기쁨으로 작업했다면, 지금은 다른 생각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역시 세상은 단순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런 과정을 이해하게 됐죠. 원래는 사람을 쉽게 믿는 편이었는데, 그게 아닌 것도 같고. 과도기인 것 같아요. 조금 더 살면 너그러워지겠죠. 지금은 좀 ‘뾰족’해요(웃음).”
영화를 본 또래 여자들은 그들의 고민에 공감한다. 그리고 말한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대답해주길 바랐는데, 해답을 주지 않아서 섭섭했다’고. 하지만 영화 속에서 ‘A는 B다!’라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위악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에게 ‘공부 안 하면 고생한다’는 당위적인 조언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 네가 이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니?’ 하고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어요. 영화 속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할지를 끊임없이 물었죠. 그런데 결론이 안 났어요.”
영화를 보면서 속 시원한 해답을 듣는 것은 통쾌한 일이다. 순간 인생을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나이 들어가고 있는 여자 감독의 영화를 만나는 것도 적잖은 위안이다.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친구의 은밀한 비밀 얘기를 듣는 기분이니까. ‘영화를 찍지 않을 때는 항상 영화 생각뿐’이라는 그의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일본으로 떠난 정완과 남편과 다시 만난 희수의 내일이 궁금해지는 것처럼.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민영기 ■장소 협찬 / Cafe Bricklane 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