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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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서 구성진 판소리 가락를 뽑아내는 표정도, 정장을 하고 공직에 있었던 모습도 그에게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의 느낌도 그랬다. 온갖 풍진을 겪어왔을 50대 중반의 ‘광대’는 여전히 백지(白紙) 같았다.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7년 반 동안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했던 김명곤(55)이 다시 배우로 대중 앞에 섰다. ‘대조영’에 이어 방송되는 KBS -1TV 대하사극 ‘대왕 세종’(윤선주 극본, 김성근 ·김원석 연출)에서 그는 조선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고려 황실의 후예 ‘옥환’ 역을 맡았다. 고려에는 충신이지만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역적에 해당하는 혁명가다.


귀향한 기분으로 다시 선 놀이판
장기자 고향에 돌아온 듯하다는 소감을 밝히셨는데, 고향이라는 게 마냥 좋고 반갑기만 한 곳은 아니잖아요. 만감이 교차하셨겠어요.
예리하네요(웃음).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살아온 촬영 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머리에 가발을 쓰고 분장을 하고 수염 붙이고, 기다리고. 이런 것이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까. ‘아, 내가 옛날에 이런 생활을 오랫동안 했구나’ 하는 점에서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던 곳이니까요.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설레면서, 묘해요.

장기자 첫 작품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했어요.
뜻밖에 그쪽에서 먼저 제안이 왔는데, 대본도 보고, 역할도 보고.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쪽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아주 젊은, 신인 감독 작품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하게 될 것 같아요. 독립영화라고 할까?

장기자 일을 하면 공부하고 싶고, 공부 하다 보면 또 딴 생각이 나는 법이잖아요. 지금 현재 그런 아쉬움은 없으세요?
그런 것도 있죠. 하지만 그동안 한 가지만 파고들고 그것만 매달렸던 스타일이 아니라, 연기 하다가 연출하고 싶으면 연출하고, 쉬고 싶으면 쉬고 때론 제작도 했죠. 행정이라는 것도 예술하고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니까요. 전 그때그때 다양하게 하고 싶은 것을 했어요. 국립극장장 직에서 물러났을 때도 바로 이어서 연출을 했고. 앞으로도 연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연출이나 제작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그때그때 주어진 일들을 해가는 거죠.

정기자 공직에 계실 때, 답답하지는 않으셨어요? ‘광대’가 못 노니까요.
그때그때 변신해가면서 적응을 잘해요(웃음). 꽉 짜여진 스케줄에 나 혼자 생활이라는 것은 거의 없고. 하나하나 벌어지는 일들이 국가적인 문제,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일이니까 그것대로 생활을 해야 하고. 지금은 나 자신을 위한 생활. 내가 스스로 꾸려나가는 시간을 다시 되찾은 거죠.

오랫동안 예술하고 배우하고 작품하고 할 때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생활했죠. 그걸 난 ‘백수 생활’이라고 얘기해요. 그러다가 국립극장장과 장관, 7년 몇 개월 동안 짜여진 생활을 한 것은 그 나름 보람도 있고 좋은 체험이었어요.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배웠죠. 넥타이 매고 출퇴근 하고 이런 것에 적응하는 데 처음 3~4개월은 굉장히 힘들었지. 하지만 적응했고, 다만 앞으로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리라는 것은 추호도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정통파, 보수파 성향이 강한 영국 국립극장장을 맡아서 개혁을 일으켰던 젊은 연출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나이아가라 폭포 양 절벽에 밧줄을 달아놓고 그 위를 외발 자전거로 가면서 한 손으로 접시 세 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고.

정기자 오, 멋진 말인데요. 접시 세 개를 돌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외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예술과 경영, 예술과 행정 사이의 균형감각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어요. 균형감각이 없으면 떨어지죠. 거기다 접시를 돌리는 것은 고객을 즐겁게 하는 엔터테이너로서 역할, 고객 중심주의를 뜻할 것이고. 저는 문화 행정이나 경영도 수용자 입장에서 봐야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어요.

현장에서 창작활동을 할 때는 고객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보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 나의 표현, 내적 욕구에 더 방점을 뒀는데 지난 7~8년간은 나 자신의 욕구보다는 고객, 문화예술가들의 욕구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엔터테이너 역할을 했어요. 그것을 광대정신이라고 얘기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또 줄 하나 건너 왔어요. 지금은, 그 외줄 타는 자전거에서 내려온 느낌이랄까. 이제는 혼자 타고 가도 돼요. 하하하.

장기자 장관으로 계시던 중 가장 힘들었던 일로 ‘스크린쿼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언제가 가장 힘드셨나요?
스크린쿼터는 내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축소 결정이 났고. 부임하고서는 대화하고 이해시키고 토론하는 그 과정이 힘들었어요. 어쨌든 나름 영화인들은 내 입장을 잘 이해했고 그것에 대한 평가는 FTA와 연결해서 될 거라고 생각해요. 스크린쿼터는 FTA와 떼놓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FTA를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요. 적절한 선택이었느냐 아니었느냐는 몇 년 후에, 여러 가지 경제 상황과 그것으로 인한 영화계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겠죠.

장기자 업무 외적으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런 게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답답하거나 힘들었던 것이 있었다면요?
힘든 게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런 건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겪는 거죠. 혼자서 풀어내기 어려운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인 상황들, 역학관계들. 아무래도 가장 어려웠던 것들은 국회와 연결돼 있는 법안, 예산 문제들이에요.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당연히 진행될 것들이 지체되고, 밀려난다든지 서로 대립한다든지 하는 경우. 그래도 하나하나 풀어나가서 영화진흥법이나 사행성 감독관리법 등이 마지막에는 다 풀어졌어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무척 힘들었죠.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이제 혼자 타도 된다’고 말하며 웃는 그는 가벼웠다.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팍팍한 남도의 돌담길을 덩실덩실 넘어가던 ‘서편제’처럼, 7년 반의 세월을 훌쩍 타넘었다. 다시 ‘백수’가 된 요즘의 일상은 행복하다. 평생 처음으로 아내와 여행도 다녀왔다. 지인들이 ‘왜 그렇게 얼굴이 좋아졌느냐’며 따질 정도로.


다시, 백수가 꾸는 꿈
장기자 임기 마치고 하고 싶었던 것들은 하고 계시나요? 그때는 영화 보러 가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요.
그동안 무척 행복하게 지냈어요. 하고 싶었던 것, 못했던 것도 하고. 영화도 마음대로 보러 다녔고요. 집사람과 평생 처음으로 여행다운 해외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동안은 공연 아니면 세미나, 워크숍, 출장이었지 순수한 여행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일주일간 백두산 근처에 가서 두만강도 보고, 연길 시내에 사는 친구 부부와 아주 재미있게 보냈어요. 그리고 요즘은 아침에 중국어 공부를 하고 서예에 단전호흡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하고 싶었거든요.

장기자 가까운 분들은 얼굴 좋아졌다고 하시겠어요.
네, 얼굴 좋아졌다고 하죠. 왜 얼굴이 좋아졌느냐고 자꾸 따져요(웃음).

정기자 장관 퇴임 후 일주일 동안 꿈을 꿨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퀴담’을 본 날은 ‘서커스 춘향’의 제작자가 되어 춘향의 그네뛰기를 서커스로 만드는 꿈을…이라는 내용이었어요.
밤에 꿈을 꿨다는 게 아니라(웃음), 늘상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작품에 대한 꿈’ 얘기예요.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바로 작품 구상하고 메모하는 시간이에요. 그동안 시나리오 한 편을 딱 완성해놨어요. 틈틈이 시간만 나면 구상하고 초고 쓰고 다듬고 발전시키고. 그게 제일 행복한 건데, 남들이 볼 때는 놀고먹고 있는 거죠. 속없이 백수 노릇 하니까 얼굴 좋아졌다고들 그러네요. 허허.

정기자 ‘백수’ 얘기를 하시니까 생각났는데요. 사고로 죽은 어떤 작가가 있었어요. 보험사에서 보험 처리를 해야 했죠. 직업이 문화예술인이었고, 인정받던 작가였는데 보험 약관에 명시된 직업이 아니었다는 거죠. 문화예술,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생산적인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술이 직업이냐 아니냐’ 앞으로는 하나의 생산직으로 인정을 받는 방향으로 갈 거예요. 이미 프랑스는 그렇게 하고 있고 문화부 정책 방향도 그렇게 가고 있죠. 저도 예술가를 위한 보험이나 복지 기금 문제 등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아직까지 그 단계까지 가지 못했어요. ‘하나의 창조활동이 생산활동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고, 그것이 문화산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인식하는 정도는 됐죠. 한 사람의 창작자가 얼마만큼의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냐에 대한 기준은 앞으로 만들어가야죠. 제 창작활동이 남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백수 같은 생활일 수 있지만, 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하는 편이에요. 그렇게 20년을 살아왔잖아요. 7~8년 전에 아들 녀석이 학교에 써서 내야 한다면서 ‘아빠는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배우나 연출가 혹은 예술가라고도 쓸 수 있었지만, 전 농담처럼 ‘백수’라고 쓰라고 했거든요. 실제로 그렇게 쓴 적도 있고요. 이제 공무원도, 극장장도 아니니까 아들이 ‘아빠, 다시 백수네?’그러더라고요. 난 백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 안 해요. 좋아해(웃음).


전래동화 같은 그들의 사랑 얘기
장기자 국립극장장 되면서 처음으로 아내에게 월급을 갖다 주셨다는 얘기를 듣고, 사모님께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집사람도 7년 몇 개월간 월급생활을 하다가, 그게 끝났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어요? 내가 늘 얘기한 게 있어요. ‘나는 계속 월급쟁이를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몇 년을 설득하더니 이제는 포기했죠. 대신, 같이 생활하는 즐거움도 있어요. 출퇴근하는 그런 남편도 좋아했지만 이 사람은 본래 내가 예술하고 연기하고 작품활동 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요새는 예전처럼 익숙해졌어요.

장기자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신 건가요?
처음 한두 달은 아주 힘들었어요. 내가 새벽에 출근하면 아내도 친구들 만나고 사람들 만나는 스케줄이 있었는데, 이젠 모든 스케줄을 나한테 맞춰야 하니까요. 예전에는 일 있으면 몇날 며칠 밖에 있기도 하고, 일 없을 때는 종일 집에 있었는데 7~ 8년 동안 그걸 다 잊었더라고요(웃음). 지금은 다시 옛날로 돌아갔어요.

정기자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사모님과 통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애기 같아요?

정기자 아뇨, 무척 교양 있는 목소리였어요. 저도 모르게 그 말투를 따라가게 됐죠. “제가 내일까지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지요.” 이런 식으로. 그래서 나이가 지긋한 분일 줄 알았는데 사진을 보니 굉장히 젊고 미인이셨어요.
그거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폼 잡으려고(웃음). 본래 말투가 남한테 공손하고 그래요(웃음). 이제부터 내 매니저 하라고 하고 모든 걸 일임했어요.

장기자 문광부 장관 재임 시절 「레이디경향」과 부부 인터뷰를 통해 두 분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런데 정작 아내 되시는 분이 어떤 점에 반해서 결혼을 하셨는지에 대한 얘기가 없었어요. (김명곤이 독일어 교사 시절 제자인 아내 정선옥씨와 인연이 시작됐다)
교사 그만두고 연극을 할 때 제자들이 공연을 보러 찾아왔어요. 첫해는 1백 명이 왔다면 두 번째 해는 50명으로 줄었고 그 이듬해는 20명으로 줄었어요. 대학교 3학년쯤 되니까 한 5명으로 줄어드는 거예요. 그 속에 아내가 있었죠. 그러다가 극단 스태프로 일해보라고 해서 포스터 붙이는 거며 잔심부름을 시켰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데이트를 시작했어요. 나이도 많지, 선생님이었지, 무명배우지, 집도 없지, 몸도 약하지, 가진 것도 없지. 자신이 없던 시기라 결혼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는데 이 사람은 결혼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다가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축하의 의미로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맥주랑 돈가스를 시켜놓고는 “내가 사정이 여차저차해서 결혼하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했어요. 그때 돈이 없어서 결국 계산도 아내가 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 “왕하고 결혼하면 왕비가 되고, 거지와 결혼하면 거지 마누라가 되는 거죠. 난 거지 마누라가 돼도 좋아요”라고. 그 말 한마디에 제가 "뿅"가서 결혼을 했죠.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정기자 사투를 벌이셨다는 후문이?
사투까지는 아닌데, (처가에서 반대해서) 집사람이 울고불고 단식투쟁도 했죠. 당연히 반대하셨겠죠. 내가 나서지 않으면 이 사람도 포기하겠다 싶을 때 처가에 찾아가 허락을 받아냈어요.

정기자 어떻게 허락을 받으셨나요?
아버님은 내가 판소리 한다니까 좋아하셨대요(웃음).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북도 치고 판소리 좀 하던 분이셨어요.

장기자 아내와 같이 살면서 놀라거나 감동한 순간이 있으셨겠죠?
겉보기에는 그냥 순한 것 같은데, 어려움이 닥쳤을 때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에요. 미래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하고… 미래를 계산할 줄 모르는 거지(웃음). 순수하고 순진한데, 그게 큰 힘이에요. 사람에 대한 믿음, 그거 하나는 잃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정기자 월세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해서 정말 어렵게 생활하다가 불과 8년 전에야 첫 월급을 탄 이야기 하며, 남들보다 늦은 내집 마련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전래동화’를 읽는 듯했어요(웃음). 요즘 친구들만 봐도 ‘집 있대? 차 있대?’를 당연한 듯 읊어대는데 말이죠.
요새는 사귀다가 아니다 싶으면 빨리 헤어지고 그러잖아요. 그때는 순수한 만남이 많았어요. 조건보다는 사랑으로 맺어지는 부부. 그렇긴 해도 이 사람은 유난스럽죠. 그런 거 계산할 줄 모르니까. 그냥 소녀 때 봤던 나에 대한 환상. 그걸로 간 거죠.

정기자 어떤 환상을 보셨기에.
나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이 사람이 얘기해 준 게 있어요. 첫 수업시간에 독일어 선생님이 왔는데 머리는 장발에 얼굴은 창백하니 비리비리한 데다가 아주 후줄근한 낡은 양복에 검은 폴라티를 입었더래요. 그리곤 첫 수업시간에 내가 그랬대. “왜 독일어를 배우느냐? 우리말을 잘하기 위해서다. 우리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음악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 음악을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음악 중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다.” 하하하하. 그리곤 ‘사랑가’한 토막을 들려준 거예요. 첫 수업시간에. 이 사람이 어렸을 때 가끔 아버지가 판소리 하는 것을 들었대요. 자기 얘기로는 그 순간 내 뒤에 빛이 보이더라는데. 그래서 어쩌다가 물어봐요. 요즘도 그 빛이 있느냐고.

장기자 보이신다던가요?
그냥 막 웃어요. 빛이 희미해졌나(웃음)?

정기자 절묘한 판타지가 완성되는데요. 창백한 총각선생님의 검정 폴라티. 장발. 게다가 독일어. 지적인 이미지의 그가 부르는 로맨틱한 ‘사랑가’.
그때 연극과 판소리에 미쳐 있었어요.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 수업시간에도 예술이나 괴테의 시가 주로 화제였어요. 수업 그만하고 사랑 얘기 해달라고 하면 ‘황태자의 첫사랑’ 얘기 해주고, 독일 노래도 가르쳐주고.


다시 돌아보는 한국, 한국의 문화
정기자 문광부 장관 재임 기간 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6H 사업(한글, 한복, 한옥, 한지, 한식, 한국음악을 육성해야 한다는 정책)이라고 하셨어요. 국립극장장은 문화예술인으로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던 경험이라고 하셨고. 여러 나라의 문화를 직접 접하고 나서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한국은 어떠셨나요?

지금 세계적으로 창조산업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어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도 김대중 정권 때부터 문화산업에 시선을 돌렸어요. ‘주라기 공원’ 한 편으로 현대 자동차 1년 판매 수익보다 더 큰 수익을 올리더라며 영화, 애니메이션 이런 쪽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죠. 우리나라의 문화산업 정책은 기초보다 열매 쪽에 더 무게를 둔 데 비해 영국의 창조산업 정책은 기초 쪽에 상당히 많은 방점을 뒀죠. 6H 사업과 문화원형 사업을 시작하고 전통예술과를 신설한 것은 바로 창조산업, 문화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고 그 기초에 현대의 테크놀러지를 연계시키기 위해서였죠.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장기자·정기자의 도발인터뷰] 다시 돌아온 ‘광대’ 김명곤

정기자 영국이 놀라운 것은 모던하고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건축물이나 공산품들도 수년 동안 철저하게 계획한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한국은 청계천도 확 닦아놓고. 빠르고 재미있기는 한데 아쉬움이 남죠. 이제 막 알기 시작하는 단계겠죠?
우리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최근이에요. 불과 1980년대를 생각해보세요, 문화는 중요 의제가 아니라 공보였어요. 선전하고 홍보하는 문화공보부에서 문화교육부가 되고 다음에 문화체육부였고. 문화부가 된 게 김영삼 정부 때죠. 문화와 관광과 체육이라는 분야가 중요한 정책으로 다뤄진 것이 문화관광부가 된 최근이에요. 문화를 건설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서 도서관 짓고 극장 지으면 문화가 발전할 거라는 발상을 한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를 운영하는 단계가 됐어요. 앞으로 미래 사회는 이러한 감성적인 산업이 큰 몫을 할 겁니다.

장기자 영국이나 외국 상황을 보면 조바심이 나서요.
외국은 극장 하나의 역사가 4백 년, 5백 년 되고. 그것은 지켜오는 데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죠. 우리나라는 극장이 지어진 역사가 1백 년이 안 되잖아요. 원각사 창립 1백주년이 내년이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후 최초의 국립극장인 현 국립극장의 역사는 50여 년이고. 그리스 야외극장까지 치면 2천 년 넘어가는데, 우리도 그런 역사를 만들어야지.

정기자 우리는 마당이 있잖아요.
그렇지. 우리 마당의 역사는 또 4~5천 년 되는 거죠. 하하하.


‘하고 싶은 일’에 미칠 수 있게 한 부모님의 힘
정기자 오랫동안 한 길을 간 이들의 얘기를 들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하죠. 워렌 버핏이 “젊을 때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노년을 위해 섹스를 참는 것과 같다”고 말한것을 자주 인용하셨어요. 하지만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처럼 답답한 게 없어요.

그래, 맞아요. 전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게 없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워요. 하고 싶은 것을 10대에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대에 찾는 사람이 있고, 뒤늦게 찾는 사람도 있고 평생 못 찾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하고 싶은 것을 빨리 찾아서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경우가 아니라면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을 잘 조화시키는 방법을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요.

장기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자녀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찾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우리 애들도 찾는 과정에 있어요.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딸은 제 조언을 듣고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어요. 지금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은 아직 갈피를 못 잡았어요. 법관도 하고 싶고 공무원도 관심이 있고, 경영도 하고 싶대고. 그래 그럼 그중에서 아닌 것을 추슬러보자고 했더니 ‘예술가’가 아니에요. 하하하. 신문을 봐도 경제면을 잘 보는데, 전 지금도 경제는 잘 몰라요.

정기자 지금의 ‘김명곤’이 있기까지는 항상 믿어주신 부모님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는 것 같이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부모님보다, “네가 어떻게 해도 너를 믿는다”고 하는 부모님이 더 무서운 법이죠.
나는 그 점에서는 복 받았어요. 좋은 대학(서울대) 다니는 다른 아들들은 아르바이트해서 오히려 집으로 돈을 부친다는데 전 연극한다고 미쳐서 몸 망치고 술 퍼먹고 다니더니 느닷없이 판소리 한다고 북을 뚱땅거리기나 했으니. 보다 못한 옆집 아주머니가 “댁의 아드님이 지금 무당 되려고 그러느냐”고 하더래요. 전 그 소리 듣고 기분이 나빴는데 어머니는 “지가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라고 대꾸하셨어요. 오히려 “너 요즘은 왜 그 무당 소리 안 하느냐?”고 묻는 분이세요. 잡지사 기자니 교사니 다 그만두고 연극한다고 나섰을 때도 부모님은 이해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제 일기를 틈틈이 보셨던가 봐요. 내가 예술을 하고 싶어 하고 직장생활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셨거든요. “사나이는 하고 싶은 거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내 선택을 믿고 책임감을 다졌어요. 부모님의 큰 힘 덕분에 버텼죠. 그런데 직장 그만두고 시작한 연극을 와서 보신 어머니가 “거지 역할은 좀 하지 마라”고 그러시대요. 제 첫 무대 데뷔작 역할이 ‘거지’였거든요(웃음).

장기자 요즘 추세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아내 입장에서는 부모님처럼 마냥 자유로울 수 없을 거 같은데요. 아들의 진로 문제에 관해서 말이죠.
엄마 입장이야 뭐, 아빠처럼 살면 안 되죠(웃음). 자식들이 좀 잘살길 원하겠죠.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전공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고 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아이들도 뭐, 아버지처럼 살려고는 생각 안 해요. 다행이죠. 아무나 직장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충동질 하는 것도, ‘사탄의 목소리’예요. 하하하하.


꿈에 한 발, 현실에 한 발 걸치고서 부르는 노래
정기자 이것만큼은 꼭 하겠다. 내가 꼭 하고 만다. 그런 게 있으신지요? 광대로서. 김명곤으로서.
20대부터 꾸었던 그야말로 망상 같은 건데, 남들이 볼 때는 약간 막연하지만 나한테는 절실한 꿈 하나가 “불후의 명작을 하나 남기고 죽겠다”는 거예요.

장기자 어떤 작품일까요?
대학교 4학년 무렵 내가 연극한다고 미친놈처럼 지내니까 나를 걱정했던지 한 여학생이 “김명곤씨는 꿈이 뭐야?” 묻기에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명작 하나를 남기는 거다” 그랬더니 한심한 듯이 쳐다보면서 “꿈 깨!”라고 하더군요. 허허. 연극이어도 좋고, 영화라도 좋고, 뮤지컬이라도 좋고. 작가로서도, 연출가로서도, 배우로서도 정말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작품 하나 만드는 거. 그 꿈 하나는 간직하고 있어요. 괴테는 ‘파우스트’를 쓰기 위해 60년의 세월이 필요했죠. 20대에 구상해서 70세 넘어 완성했으니까.

장기자 첫 바늘은 꿰고 계신지요?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그것을 위한 시험 기간들이죠. 내가 쓰고 연출하고 출연했던 작품들. 하지만 그것들이 완성된 작품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늘 머리가 바쁘죠.

정기자 그런 적은 없으세요? 내가 땅을 짚고 섰는지 구름을 짚고 섰는지 모르겠다, 싶은.
그렇지, 구름 위에서. 그런데 그렇다고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지는 않아요.

정기자 꿈에 한 발, 현실에 한 발….
그렇지, 한 발씩 걸쳐놓고. 어떤 사람은 가정이고 뭐고 신선처럼 훌훌 살기도 하는데 전 그러지는 못해요. 내가 장남이고, 결혼도 했고. 하지만 꿈은 구름 속에 있는 거죠. 남들이 볼 때는. 허허.

장기자 말 나온 김에 아내에게 한 말씀 하세요.
우리 아버지가 평생 백수였거든요. 그런데 술 취하고 오시면 어머니한테 한 얘기가 있어요. “당신은 천사야” 우리한테도 “니네 엄마는 천사다” 그랬어요. 그 말을 우리 집사람한테 하고 싶어요. 여러 번 얘기하기도 했고. 알아요, 그 사람도.

정기자 선생님한테는 후광이 있고, 사모님한테는 날개가 있는. 그런 커플이네요(웃음).
그런가, 허허허.


공직에 있을 때의 어려움을 말할 때도, ‘미친놈’처럼 살았던 젊은 날을 말할 때도 그는 선선했다. 그리고 통유리 너머로 ‘그림처럼’ 걸어 들어서던모습 그대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선생님, 가실 때 제가 부를 테니까 한 번만 뒤돌아봐주세요.”
“어떻게, 이렇게? 이러면 되나? 허허허.”

오전 11시 40분. 김명곤은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포토그래퍼를 향해 웃고, 손을 흔들어줬다. 이대로 가면 다음 약속시간에 늦을 것이 뻔한데도.

진행 / 장회정·정우성 기자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원상희 장소 협찬 / 카페 PM 3:00(02-
345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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