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을 옹골차게 채운 인터뷰였다. 이제는 끝이겠지 싶어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켜기를 반복하는 것을 감지한 이홍렬의 반응은 ‘오늘도 역시!’. 한 달 전 시작한 사업에 임하는 각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두 아들의 교육 지침, 결혼 20주년을 맞는 소회, 7080 코미디 부활에 대한 열정으로 쉼 없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아주 귀 기울여, 아니 눈여겨봐야 한다. 내 것으로 만들면 좋을 만한 세상 사는 법이 수월찮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TV판 ‘이홍렬쇼’로 토크쇼의 새 장을 열었던 이홍렬이 조만간 라디오판 ‘이홍렬쇼’로 복귀한다는데, 이번 인터뷰는 그야말로 잡지판 ‘이홍렬쇼’와 다름없다.
지난 9월 6일 오전. 이홍렬은 어느 큰 무대에 섰을 때보다 가슴 뛰었다. 조촐하게 치르고자 소문도 내지 않은 ‘개업식’. 지인들이 보내준 화환이 살짝 축제 분위기를 냈을 뿐, 레스토랑 내부에는 비장감마저 흘렀다. 과연 이 굵은 빗줄기를 뚫고 손님이 와줄까. 정식 오픈을 30분 앞둔 오전 11시 30분, 두 명의 여대생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식사를 하러 온 손님인지 확인(?)을 하고서야 손에 들고 있던 1호 손님용 선물을 건넬 만한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15분 후,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손님들이 밀려들어왔다.
크라제버거 통산 22호점인 홍대점이 바로 이홍렬의 새로운 무대다. 워낙 크라제버거를 좋아했던 그는 역시나 크라제버거를 좋아한다는 건물주를 만나 목 좋은 신축건물 1층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건물주는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 음반 제작자 양현석이다.
“음식 관련 사업이 잘 맞는 거 같아요. 레스토랑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울린대요. 일단 가게에 나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명찰을 가슴에 다는 일이에요. 저로서는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죠.”
그의 왼쪽 가슴에는 ‘파트너 이홍렬’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사장이나 (조금 겸손하게) 주인도 아닌 파트너. 방송이 없는 시간에는 늘 가게에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서빙도 한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들어왔던 고객들은 그의 인사를 받는 순간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의 반응이다.
한 달이 막 지난 요즘은 매주 요일별, 시간대별로 고객 데이터가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 꼼꼼하고 알찬 홈페이지(http://hong.leesen.co.kr/) 관리에서 빛난 그의 성정과 매사에 살뜰한 그의 성격이 여기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사업 아이템을 찾는 연예인들이 많아요.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의 수명은 언제 다할지 모르니까요. 평생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으니 부업이나 사업에 관심을 갖는데 아무래도 사회경험이 없다 보니 실패하는 경우가 왕왕 있죠.”
그 역시 세 차례의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쳤다. 2000년 초에는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부천에 노래주점을 차렸다가 건물주가 부도를 내고 해외로 도주하는 바람에 거액의 투자금을 날렸다. 허망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마음을 옮긴 다음 기착지는 펫 사업이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 이홍렬은 성공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프랑스에서 들여온 애완동물 전문 가맹점을 열었으나, 결국 문을 닫았다. 그것도 ‘아주 짤막하게.’
그때 내린 결론이 “내가 자신 있는 내 분야에서 터를 잡자”는 거였다. 하고 싶은 만큼 방송을 해봤으니 이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겠다는 심사에서 시작한 것이 매니지먼트사였다. ‘리센엔터테인먼트’라는 지붕 아래 연예인 후배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소속 연예인의 수입은 일단 그 연예인에게 재투자하는 것이 그의 경영 철칙이었다. 후배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마인드였지만, 돌이켜보니 순진하고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매니지먼트사 사장이라면 무릇 모질게 맺고 끊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그런 걸 못했어요. 믿음 하나로 구두 계약을 해놓고 기다렸는데, 결국 도장을 못 찍고 어그러진 경우가 있어요. 너무 자세히 얘기하면 안 될 거 같아요. 다 내가 덕이 없어서 그렇죠.”
버거 체인점을 통해 이홍렬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지난 6월부터 돌입한 개업 준비는 온 가족의 힘으로 이뤄냈다. 부부는 2주간 본사에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받았다. 온통 영어 위주로 쓰여 있어서 영 낯설었던 메뉴판도 전 메뉴를 다 만들어봤더니 내 손바닥처럼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올 초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큰아들 재혁군은 이태원점에서 한 달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실무를 익힌 뒤 매주 월, 수, 금요일 아버지의 매장에서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큰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제가 강조한 세 가지 약속이 있어요. 첫째, 용돈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준다. 둘째, 공부는 하고 싶을 때까지 시켜주겠다. 셋째, 유산은 한 푼도 안 준다. 아이가 잊을 만하면 얘기했더니 자다가도 대답할 정도로 줄줄 외우게 됐죠.”
학원비와 운전면허시험을 볼 전형료를 준 것이 마지막 용돈이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몇 개월을 버틴 듯한 아들이 ‘협상’ 제의를 해온 것은 늦은 밤 빈털터리 아들을 대신해 택시비 내주는 것도 거부하는 아버지의 단호한 면모를 본 뒤였다. “친구들은 부모님께 용돈을 받더라”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딴 사람과 비교하지 마라, 너는 비교하면 좋겠니?”로 응수했다. “도무지 사정이 어려우니 교통비 10만원만이라도 달라”는 요구에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그때 지원하겠다”고 맞받아쳤다.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는 그릇 닦는 것부터 해야 한다더라고요. 영어 과외까지 하는 것 같더니 지난달에는 제법 수입이 두둑한 눈치던걸요. 공부도 좋지만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는 것에서도 배울 게 많을 거예요.”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것보다 깨어 있는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홍렬. 그의 바지런한 성정은 ‘성실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그의 의지는 고집스럽다고 할 만큼 단단하다.
“1998년 가족과 함께 미국 어학연수 떠날 때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작은 아이가 1학년이었어요. 4년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큰아이는 적응을 잘하는 반면 작은 녀석은 힘들어하더군요. 그래서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장차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죠. 제발 없다고만 하지 마라, 하는 심정으로요. 그런데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아니 ‘숏다리’ 집안의 아들 꿈이 농구선수라니요?”
맏이 재혁군의 키는 176cm, 재준군은 177cm를 넘어섰다고 한다. 아들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어깨에 힘이 단단히 들어간 이유가 있었다. 비결은 최홍만과 아는 의사가 입을 모아서 추천한 우유에 있었다. 그는 “100ml 우유팩에 아이들 이름을 붙여놓고는 경쟁을 붙이는 비겁한(?) 방법을 썼다”고 털어놓았다.
어쨌든 아들의 속내를 알게 된 이홍렬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농구선수 서장훈과 만남을 주선했다. 그리고 아들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여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둘째 재준이가 마음 편히 공부하고 농구할 수 있는 미국 동부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었다. 단, 2년 8개월간 아빠가 기러기 노릇을 한 적이 있으니, 이번엔 아들이 엄마를 포기하고 혼자 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아직 미성년인 막내를 혼자 떼어 보내는 것이 맘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부담이 있었지만 과감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바로 작은아들 나이였을 때, 이홍렬은 개그맨의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해도 해도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일을 이뤄낸 그는 아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다.
“이충희 선수의 일화를 들려줬어요. 모두 잠든 밤 혼자 코트에 나와 수없이 골대에 공을 던졌더니 어느 순간 링이 커지더라는 얘기를. 요즘은 그저 열심히 해서는 살아남기 어렵잖아요. 목숨을 걸어야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줬죠. 아직은 아빠 마음을 몰라주는 거 같아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미국 가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리더십도 발휘하고 주전으로 뛸 만큼 농구도 잘하고 있다니 대견스럽죠.”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이홍렬의 아내가 잠깐 가게에 모습을 비쳤다. 1987년 9월 26일(이홍렬의 홈페이지 ‘역사는 흐른다’ 코너 참조) 결혼식을 올린 여덟 살 연하의 박인규씨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스타의 아내답지 않게 방송 출연은커녕 인터뷰 한번 하지 않기로 소문난 그녀는 “5분만 앉아서 얘기하자”는 제의를 끝내 사양했다. 거부라기보다는 수줍음에 가까운 거절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단정한 인상에 화이트 셔츠를 입은 그녀는 이홍렬처럼 왼쪽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급한 볼일이 있어 인터뷰에 합류하지 못한다며 미안해하던 그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는 역시나 이홍렬의 그것과 같은 무엇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지난 9월 26일 결혼 20주년을 맞이해 특별히 마련한 ‘(크기가) 겸손한’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결혼 10주년 되는 해에는 아내에게 세계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어요. 그래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이렇게 세 개(나라) 여행을 하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거든요(웃음). 20주년에는 이집트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던데, 가게 오픈 준비 때문에 아직 못 갔네요. 그나마도 20주년 전날 부부싸움을 하는 바람에 아주 진땀을 뺐어요(웃음).”
20주년일 아침, 극적인 화해를 한 비밀이 여기서 밝혀진다. 실은 반지만 맞춰뒀을 뿐 이렇다 할 계획은 세우지 못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홍렬이 누군가. 순발력 하나는 타고난 그는 즉석에서 세 가지 이벤트를 준비했노라고 큰소리쳤다. 첫 번째는 ‘영화 구경’, 두 번째는 자신이 진행했던 요리 프로그램에서 왕중왕을 차지한 조리장이 마련한 만찬, 세 번째는 아내가 좋아하는 시내 호텔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 아내가 감동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공교롭게도 두 번째로 내세운 이벤트를 맡아주실 조리장께서 그날이 휴무였던 거예요. 그런데 제 사정을 들으시고는 특별히 스테이크를 만들어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덕분에 이벤트는 대성공을 거뒀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홍렬은 매년 결혼기념일 무렵 가족사진을 찍는다. 이홍렬·박인규 부부의 역사가 고스란히 그 사진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올해는 둘째가 집에 오는 겨울방학에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그럴싸하게 찍을 계획이다.
“아내와 갈등이 왜 없겠어요. 다행스러운 건 우리는 권태기가 찾아올 만하면 떨어져 지냈던 거 같아요. 일본 유학(1991~1993년) 때도 그랬고, 아내와 아이들 두고 저 혼자 한국에 들어왔던 미국 연수 시절도 그랬고. 그때는 졸지에 기러기 아빠가 되어서 가족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몰라요. 또 (권태기가) 슬슬 찾아오는데…. 하하하.”
“요즘 같으면 정말 행복한데…. 한 가지, 더 많은 웃음을 드려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아요. 전 개그맨이잖아요. 들으셨다시피 아직 순발력도 충천하고 열정도 남았는데 말이죠. 우리의 희망이 뭔지 아세요? 송해 선생님처럼 오래 사랑받는 거예요.”
열정을 쏟아 부을 만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 속상하다는 그는 7080 시대 코미디 붐을 이끌었던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갔다. 심형래, 김정렬, 황기순, 이하원, 김정식, 임하룡…. 아직 목이 마르다는 그의 말이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두서없는 얘기 듣느라고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글 / 장회정 기자 ■사진·사진제공 / 원상희·이홍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