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세 청년이 진행하는 라디오,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55세 청년이 진행하는 라디오,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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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디오 스타’는 ‘한물간’ 가수의 재기담이다. 영화에서는 요즘은 조용필도 안 된다’며 대중음악 시장을 냉소한다. 그러나 7080세대의 음악은 아직 살아 있다. 현란한 젊은이들의 음악에 가려 희미해 보일 뿐이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로 198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가수 백영규는 올해 초 13집을 냈고, 라디오 DJ로 나섰다.

55세 청년이 진행하는 라디오,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55세 청년이 진행하는 라디오,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55세 청년의 자유와 도전
아직은 라디오 부스가 낯설다. 열흘밖에 안 됐다. 백영규(55)는 “라디오 DJ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들과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다.

“가수는 음악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섭외를 받은 지는 오래됐지만, 그런 생각 때문에 고사를 거듭했어요. 하지만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맛을 보면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결정했습니다. 우리 나이가 되면, 뭔가를 배운다는 것도 어렵잖아요(웃음).”

올봄 13집이 나왔을 때, 오랜만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기자들은 어렸다. 1980년대 초반에 히트했던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란 세대가 아니었다. 50대 중반의 ‘7080’ 가수가 ‘13집’을 내고 돌아왔으니, 당연히 트로트(Trot)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음악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그를 ‘청년’이라고 불렀다. 그의 새 노래들이 담고 있는 도전과 진화의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트로트일 줄 알았던 음악을 들어보고 ‘어, 이게 뭐지?’ 하면서 얘기가 길어지고, 지면도 늘어나고 그랬어요. 생각했던 50대 중반의 모습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웃음).”

최근의 인터뷰에서는 기자에게 음반을 건네며 ‘가수 이수영에게 전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참 좋고, 내공도 장난이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나온 음반을 모두 구입했다”며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13집을 만들 때는 영국 밴드 ‘뮤즈(Muse)’의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뮤즈는 지난 1999년 데뷔, 2007년 브릿어워드(Brit Awards) 최우수 라이브상을 받은 실력파 밴드다.

“내가 카피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런 음악 정도는 만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색과 방향은 다르지만,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배고파야 좋은 음악이 나오는’ 시기는 지났다. 풍성한 경제력이 멋진 음악을 만드는 시대다. 백영규는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자고 결심했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로 대표 되는 이미지로부터의 자유다.

“하고 싶은 게 여럿 있었는데, 이번 음반에서 몇 개는 한 것 같아요. 40~50대가 들으면 난해하다고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맘에 들고, 하하.”

평은 극과 극이다. 힘찬 시도를 칭찬하는 평과 예전의 백영규가 그립다는 평이 갈린다. 그는 개의치 않는다. 굴곡은 있지만 쉼 없이 음악을 해왔던 가수의 마음은 결연하기보다는 선선하다.


직접 하는 선곡, “추억에 젖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라디오 부스 안에서의 그도 다르지 않다.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문자 메시지를 유도해달라”는 작가의 요청에는 “지금 작가가 문자 메시지를 유도하라고 하는데, 문자를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보내주신 분께는 감사드리지만 거기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인방송에서 송출하는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은 생방송이다.

55세 청년이 진행하는 라디오,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55세 청년이 진행하는 라디오,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우리는 음악 전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좋은 음악 트는 것이 급선무고,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요. ‘소개 못해드리는 분들은 이해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진행을 못하더라도 좋은 음악을 선곡하면 듣는 것이고, 그런 식의 방송이에요(웃음).”

이런 식의 ‘담대한’ 진행에 청취자도 이내 적응하고 있다. 열흘 만에 신청곡이 줄었다. 그러나 사연은 줄지 않았다. 의무감처럼 사연과 신청곡을 함께 적어 보내던 청취자들은 이제 사연만 적어 보내는 경우가 늘었다. 디제이의 선곡을 신뢰한다는 신호다. 선곡이 좋다는 반응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매끄럽지는 않지만 솔직해서 좋다는 반응이다.
“잘 알려진 가수의 음반 중에서 노래는 좋은데 타이틀은 아니었던, 그런 노래를 소개하려고 노력해요. 오늘 첫 곡은 정유경의 ‘꿈’이었죠. 2집까지 내고 사라진 가수지만 기억 속에는 살아 있는.”

첫 방송의 첫 곡은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였다. 명혜원의 ‘청량리 부르스’, 박양숙의 ‘어부의 노래’, 윤상의 ‘이별의 그늘’도 틀었다. 하루에 한 곡 정도는 ‘젊은’ 음악을 섞는다. 핑클의 ‘영원한 사랑’, 리쌍의 ‘발레리노’ 등의 신곡을 섞는 이유는 40~50대가 요즘 음악에 느끼는 거부감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다.

“처음부터 젊은 노래를 틀면 거부감을 느끼지만, 익숙한 노래들을 틀다가 한 곡을 섞으면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요. 그리고 설명을 덧붙이죠. ‘멜로디가 쉬운 노래니까, 가족끼리 노래방 가서 아버지가 랩 하시고, 어머니가 멜로디 하시면서 젊은 사람들과의 벽을 넘어서자’고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데, 벽을 쌓고 있으니까. 하하.”
최연소 청취자는 초등학생이다.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한 백영규의 팬클럽 중 한 명의 아들이다.

“병진이가 지금 몇 살이더라? 4학년인가 5학년인가, 그 친구가 MC 몽 노래를 신청했더라고. 그건 아주 특이한 경우고(웃음). 프로그램은 7080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미래적인 음악들을 많이 틀려고 해요. 추억에 젖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서툴지만 솔직하게 끌어가는 ‘두 시간’
형제처럼, 자매처럼 지내는 그의 전국구 팬클럽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라디오 앞에 ‘붙어 사는’ 팬들도 많다. 그들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남을 계속하며 인연을 이어간다. 팬클럽이 모이면 백영규는 ‘왕따’가 된다. 워낙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느새 주인공이 소외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매너’를 아는 친구들이죠(웃음). 오래 같이 지내고 술도 마시고 하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서로 걱정하고. 처음에야 그럴 수도 있지만 10년을 넘게 만나도 그래요. 내일모레도 정기모임이 있어요.”

라디오를 진행한다는 소식은 팬들을 기쁘게 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백영규에게 라디오는 낯선 일이다. 활동 당시 게스트로 출연했던 적은 많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안을 받고 나서 고민을 거듭했던 것도 ‘어딘가에 매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30년 동안 한 번도 묶인 적이 없었는데, 그 중압감 그리고 경험이 없으니까, 잘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죠.”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음악을 쉬지 않았지만, 이제 열흘밖에 안 된 ‘초보 디제이’다. 아직은 라디오 부스에서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다. 작가가 건네주는 원고가 있지만 두 시간 동안 혼자 끌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매일 방송되는 곡을 직접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백영규는 백영규답게, 서툴지만 솔직하게 간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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