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

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최불암’이라는 이름 석 자의 무게를 가늠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좋은나라운동본부’ 본부장이라서 담배를 끊었고, ‘내가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뒤집히는 거’라며 맥주 한 모금도 참는다. ‘김 회장’으로 아랫목을 지킬 때는 TV 앞에
앉아 있을 한국의 모든 아버지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풍기는 체취는 ‘그냥 무의미하다’는 배우 최불암의 11월 11일.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그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몇 번이나 전화벨이 울렸다. 이날의 인터뷰도, 최불암(67)에게는 두 번째였다. 기대앉은 빨간색 배경은 최불암과 잘 어울렸다. 그는 꺼지기 직전에 화륵거리는 촛불처럼 힘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먼지처럼 가볍지만, 지나온 그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벌써,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하는 친구들
젊은 사람들 모이는 데 가면 조심스러워지고, 그들이 불편할까봐 눈치를 보게 됐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유’를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삼십대’나 ‘사십대’ 같은 인생의 한때 느껴지는, 작은 조각 같은 감상이다. 늙어갈수록 지켜야 하는 ‘수칙’들은 점점 많아지고, 놓치기 싫은 것들이 늘어가는 만큼 커지는 건 아쉬움이다.


이거 괜히 고생시켰어. 내가 일요일밖에 시간이 안 되니까. 그래도 나이 먹은 사람이 이런 데 오니까 싱그러움을 느끼는데.

정기자 그러세요? 근처에 계신다고 해서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에요.
나이 먹고 어디 들어가기도 조심스러워. 와인 마시고 이런 데 들어가면 젊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거 아냐. 그럼 주인이 좋아하겠나. 그러니까 눈치 보면서 들어가. 우리는 그런 걸 느끼지.

정기자 우리 아버지도 쉰여덟이신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걸 굉장히 인식하고 계세요.
그럼 아직 젊은이지(웃음).

장기자 요즘 여운계 선생님도 그렇고 정정하시던 분들이 많이 아프신 것 같아요. 여운계 선생님은 곧 다시 활동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인생에 생로병사(生老病死)야 늘 따라다니는 거니까. 그런데, ‘병(病)’, ‘사(死)’가 문제지. 늙어가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병이 들면 고통스럽고, 죽으면 세상을 두고 가는 거니까 아쉽지. 요즘 친구들 만나면 시간이 없다고 해. 벌서 그런 얘기가 나와. 이제 촛불이 다 타서 꺼질 시간이 된 거지. 지금 내 기분 같아서는, 초가 꺼질 때 팔랑대는 불길 있잖아? 그때 화력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아. 확 타고, 탁 쓰러지는 거지.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 같아.

장기자 인터뷰 준비하면서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 줄 처음 알았어요.
그러니까 펄럭이고 있는 거 아냐(웃음). 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체력이 뒷받침되니까 하는 거야. 내가 술을 많이 먹거든. 어제까지도 닷새째 계속 먹었어. 우리 집사람이 돈 사람 같다고 해.

정기자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럼, ‘아, 지겹다, 무슨 술을 그렇게 먹느냐’고. 그런데 술이 그렇게 맛있어. 가장 좋은 친구지. 먹으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이 따라가주고. 책에도 썼지, 한 잔 술은 마음을 연다고. 담배는 생각을 열어주고, 한 잔의 커피는 대화를 열어준다고 하지. 담배는 진짜야. 생각을 열어주지. 글 쓸 때 담배 없이 글 쓸 수 있어? 빨리 끊어, 나중에 큰 병났을 때 담배 먹은 사람은 치료가 어려워.

장기자 지금은 선생님도 끊으셨죠? 계기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KBS-2TV ‘좋은나라운동본부’ 할 때 방송에서 한 친구가 “선생님도 담배 끊으셔야죠?” 해서 “예” 그랬어. 무심코 그랬던 거지. 그리고 몇 주 지나서 술집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어떤 노신사가 나한테 와서, “담배 끊으셨다더니 안 끊으셨네요” 그래. “내가 언제 담배 끊었소? 누가 나 담배 끊었다고 그래요?” 하고 되물었는데, 이 사람이 아주 이상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말이야. “`방송에서, ‘좋은나라운동본부’에서 그러셨잖아요” 그러는 거야. 아, 그게 충격이야. 그래서 당장 재떨이에 비벼 껐지. 그게 마지막 담배였어. 끝냈지. 방송에서 거짓말하면 금방 사기꾼 되잖아. 난 담배 끊다가 아주 죽다 살아났어.

정기자 아니 왜요?
뭘 왜야. 일단 잠이 안 와. 잠은 오는데 금방금방 깨. 한 10분 자고 깨고, 한 시간 자고 깨고. 밤새도록 담배의 환몽이야, 환몽. 굉장했었어. 병원 가서 주사도 맞고.

장기자 그럼 지금은요?
담배는 끊는 게 아니야. 계속 참는 거지. “그래 그 아저씨 보면 이제 담배 끊었다고 그래야지. 내가 이걸 피우면 먼지를 들이마시는 거나 같다”고 생각하면서 순간순간 참아야 하는 거야. 애초에 시작하질 말아야 해. 난 애들한테도 늘 그랬어. “자식아 진정한 예술을 술, 담배 없이 어떻게 하니? 담배 안 피우고 어떻게 문학적 정서를 갖고 대본을 읽어?” 그랬던 장본인이라고 내가. 담배 없이는 예술도 없고, 생각이 깊어지지도 않고 말이야. 그런데 담배 끊고 술이 거의 두 배가 됐어. 요즘은 거의 매일 마시는 것 같아.

장기자 주로 누구랑 드세요?
귀천 없어. 친구 만나면 친구와. 후배 만나면 후배와. 누구든지.


“지금 체취는, 그냥 무의미해”
지난 10월 1일, 최불암은 책을 냈다.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이다. ‘텔레세이’라는 형식의 책은 그대로 인터뷰집이다. 그의 말을 풀어 만들었다. 문장의 대부분은 신문 기사처럼 건조하지만, 간간이 느껴지는 ‘날것’의 최불암이 반갑다.



장기자 책이 출판된 다음에는 기분이 어떠셨어요?
내 친구가 이걸 보고, “야, 사람도 안 보이고 인생도 없다”고 그래. 나도 읽고 그렇게 느꼈어. 젊은 사람이 썼는데. 자료 전부 가지고 와서 내용을 물어오면, 내가 얘기해주고. 그러니 내가 보일 리가 있나. 내가 쓴 글도 아니고, 대필도 아니고. 묘하게 된 거야. 내 친구가 “야, 평상시 하던 재미난 얘기들은 왜 없니?” 그래서 깨달았어. 나는 보통 때가 더 재미있나봐. 연기도 그렇지만 “뭘 해야 되겠다” 마음먹었을 때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저절로 했을 때 뭔가 나오지.

정기자 신문 기사처럼 건조하게 읽히다가 “아, 이건 최불암 선생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구나.” 그런 문장이 몇 곳 있었어요. 예를 들면 146쪽 “내 사랑 정동마님”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그랬다!”라는 문장.
그걸 느꼈어? 그래, 그건 내가 진짜로 말한 거지. 하하하.

정기자 그런 문장이, 아 이건 ‘텔레세이’구나 하고 느끼게 만들었죠. 아무리 선생님이 안 보이는 책이라고 해도, 그런 재미는 있었어요.
지난 사건들을 가지고 얘기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아. 더 뭘 만들어.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배우’라는 이름으로 평생 만들어온 것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를 수식하는 다양한 직함들. 한때는 국회의원이었고, 지금도 다양한 ‘홍보대사, 이사,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후회가 남는다. 말을 멈춘 것은 잠깐이지만, 한숨은 깊다.


세상이, 정치도 철학도 종교도 교육도. 휴우. 한이 많아. TV는 어느 집이든 값싸게 들어가고, 그게 재미잖아. 재미를 추구하다 이 꼴이 됐는지는 몰라도. 뭔가 좀 배울 수 있고 인생에 도움이 돼야지. 그런 게 전혀 없어, 요즘은.

드라마 ‘전원일기’가 80년대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디졸브’(dissolve:앞 화면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다음 화면으로 이어지는 기법) 되면서 태어난 거란 말이야. 그리고 23년 동안 세상이 변하고, 핵가족화 되면서 ‘아버지’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지. 그때 ‘전원일기’가 그나마 그걸 붙잡고 있었던 거야. 4대를 거느리던 남자가 있었으니까. 그런 보람이 지금은 없어.

세상에 가족 이상의 행복은 없거든. 가족 떠나서 단둘이 ‘랄라랄라’ 그거 안 돼. 둘이 싸움밖에 할 일이 없어. 정치 필요 없어. TV만 잘되면 돼. TV의 힘은 대단해. 전원일기 ‘김 회장’이었을 때 내가 아랫목에 앉아 있으면,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게 앉아 있는 느낌이었단 말야. 그치? 그건 저절로 느껴지는 거야.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거든. 하찮은 한마디에도. 가장으로서 위치가 있었지. 그런데 요즘은 가장으로서의 축도 없어지고, 아버지도 없어졌어.

정기자 흔히 한국 문화를 비판적으로 말할 때, 유교 문화나 가부장 문화를 빨리 해체해야 하는 문화로 지목하곤 했어요. 특히 90년대에.
가부장이 권위주의는 아니야. 어른이라는 게 권위인가?

정기자 그럼 ‘어른의 자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회의 어른으로서, 아버지로서.
나는 자연주의야. 서로 불편 없이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아. 난 애들보고 공부하라는 얘기 안 해. “책 읽으면 인생에 도움이 되더라”,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낫지” 정도는 얘기하지. 그러나 해라 마라 한 적은 없어. 연기도 마찬가지야. “너 연기가 틀렸어”라고는 못하지.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즐겁지만 난잡하지 않고,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다)”야. 중용을 지키라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항상 중도에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까?

장기자 ‘전원일기’ 끝나자마자 출연하셨던 분들을 뵌 적이 있어요. 아쉬움이 무척 커서 후유증을 앓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 이미지가 오래갔지. 책에는 반반이라고 썼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TV 인물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 TV 앞에선 속일 수 없지.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데.

정기자 선생님도 후유증이 있으셨나요? 상실감이나 아쉬움이 없을 수 없겠죠. 뭔가 가슴이 휑한.
일주일, 이주일에 한 번 고정적으로 했던 시간들. 그런 게 버릇처럼 몸살이 오더라고. 정신적인 몸살이지. “아, 오늘 녹화 날인데….” 하고 벌떡 깨고. 차 타고 논밭을 지나가면 “여기 전원일기 촬영하기 좋은 곳인데” 하고. 이젠 많이 잊었어. 벌써 5~6년 지났나. 그리고 요즘은 집사람이 그래. 내가 무슨 얘기 하면 “꼭 전원일기 김 회장 같은 얘기 한다”고. 그때는 내 안에 ‘김 회장’이 살아 있는 거야. “당신 앉아 있는 뒷모습 보면 꼭 김 회장이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그런 거야. 요즘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아. 그래도 어디 가겠어? 23년을 가지고 있었던 정서가? 허허.

정기자 요즘은 어떤 체취가 나세요?
요즘 냄새는… 그냥 무의미해. 독특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스타일이 언제 있었나. 연기자는 백지(白紙) 같아야 해. 빨간 잉크 쓰면 빨개지는 거고 파란 잉크 쓰면 파래지는 거고. 남의 영혼을 내가 가지고 들어오는 게 연기니까. 배우는 영혼이나 생명을 주입시켜서 제2의 인물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자기’가 뚜렷하면 안 되지.


잠깐의 침묵 뒤에 이어지는 ‘무의미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노란 벽이 일렁였다. 배우의 얼굴에 잡힌 주름 때문이었을까, 눈물이 어렸기 때문일까. 속없는 계절 이야기로 가벼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유난히 아름다웠던 낙엽이 지는 계절이라서, 슬픔이 가시진 않는다.

정기자 선생님은 가을 타세요?

자동차가 지나가면 떨어져 있던 낙엽이 차 뒤로 확 딸려오지. 낙엽에 밟히고. 깔리면 그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 올해 단풍은 그야말로 아름답더구만. 봤어? 젊은 사람들은 낙엽 볼일이 없지 뭐. 그런데 우리 눈에는 단풍이 눈에 잘 띄어.

장기자 선생님, 이게 12월호라서요, 얘기가.
크리스마스 쪽으로 가야 해? 하하.

장기자 하하, 대선 얘기요. 여자들이 보통 정치에 관심 없잖아요. 대통령 뽑는 일 앞두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세요?
경제 살리고 그러는 거 다 필요 없어. 가장 정치를 잘할 때는 무치(無治)야. 다스리지 않을 때, 이래라 저래라 안 할 때, 세금 내라 독촉 안 할 때가 제일 좋아. 그 다음이 유치(有治). 그건 문화야. 삶의 기쁨이 있게. 그 다음이 정치(政治)란 말이야. 다스리는 자 없이 스스로 깨달아서 살아야지. 이래라 저래라 해서 나라가 잘되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교육이 잘돼야 해.


자식 같고, ‘배우’같은 젊은이들
정치와 대선에 대해서는 아꼈던 말이, 후배들을 칭찬할 때는 거침없다. 남상미와 김래원은 ‘아이돌’이었고 황홀한 스타덤을 경험했지만 머무르지 않았던, 또래 집단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다.



장기자 책에서 남상미씨 칭찬하셨죠? 남상미씨가 보면 무척 좋아하겠어요.
그 아이가, 참 이뻐. 나 보면 막 따라와. “선생님!” 그러면서. 걔는 거울 안 봐. 다른 아이들은 한 컷 찍고 머리 만지고 깃 세우고. 그게 촬영을 너무 방해하거든. 배우는 그저 흘러가야 하는데. 그렇게 자꾸 정지하게 만들어. 그래서 나는 코디 보면 “그걸 그냥 내버려둬야지, 만지작거리면 부스럼 생기겠다”고, 나가 있으라고 그래. 그런데 남상미는 지가 하고 들어와. “넌 왜 거울 안 보느냐?” 그랬더니. “밖에서 다 봤어요” 그래. 그 모습이 나한테는 신선했던 거야. 요즘은 남자 녀석들도 한 컷 찍고 거울 보거든. 아주 깔고 앉아 있어 거울을. 난 분장 끝나면 거울한테 인사하고 들어가지. “최불암씨, 여기서 잠시 쉬게나. 난 잠깐 딴 사람 연기 하고 올 테니” 하고.

아, 그리고 난 이번에 아주 재밌는 젊은이를 봤어. 김래원이. 뭐 ‘지붕 꼭대기에 앉은 고양이’였나?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정기자 ‘옥탑방 고양이’요?
그 녀석이 전에 어떤 영화에서는 섹스하는 것도 찍고 그랬거든. 그래서 나는 “불량기가 있는 녀석이구나” 생각했는데, 전혀 딴 놈이 됐어. 걔 한번 취재해봐. 재밌어. 그리고 애가, 배우가 될 수재를 다 가지고 있어.

한번은 술자리에서, “얘, 술 한잔 먹어라” 그랬더니 “선생님, 전 오늘 삼가겠습니다” 그래. 지 아버지 하고 낚시 가서 한 3개월 동안 술을 그렇게 많이 먹었대. 그래서 내가 “야, 태공은 세월을 낚는다고 하더니, 넌 아버지하고 인생을 낚았나보다” 그랬지. 3개월 동안 낚시만 하고 외롭게, 아주 쓸쓸하게 지낸 거야. 그 화려한 것 같은 애가 사실은 엄청난 쓸쓸함의 공간에 있었던 거야. 마음이 확 가더라고. 배우라는 게, 화려한 것 같지만 쓸쓸함 속에 묻혀 있는 거니까.

얼마 전에는 이 녀석 허리가 아파서 며칠 촬영을 못했어. “너 인마 키가 커서 그래” 그러면서 좋은 한의원 소개시켜주고 했지. 어제 전화가 왔어. “이제 다 나았습니다” 그래. 어린 후배 놈이 우리 나이 또래한테는 그렇게 가깝게 못하거든. 그런데 나았다고 전화하고, 아프다고 전화하고. 지 아버지하고 놀던 놈이라 그런가봐. 나도 우리 아들 만나면 술이 끝이 없어. 하여간 취해도 너무 취해. 뭐가 맞으니까 그렇게 먹는 거거든. 하하. 이건 내 자랑이지.

정기자 저도 대학 땐 아버지와 종종 술을 마셨는데, 취직하고 나서 좀 소홀해졌어요. 죄송한 마음이 항상 있어요. 아들, 이놈 좀 멀어졌다, 그런 적은 없으세요?
그래? 효자구만(웃음). 아들은 지금 따로 사니까, 지 가정에 충실하지. 그게 고마운 거야. 아이들 건사하고, 와이프도 잘 맞춰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전화 한마디가 힘들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나 얼마 전에 손녀 생겼잖아. 그런데 한 친구 놈이 그래. “손주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동포일 뿐이야.” 그냥 동포일 뿐이래. 그 말이 쑥 귀에 들어오는 거야. 며느리 앞에 가서 애 이쁘다고 달라붙지 말래, 안 좋아한다고.

그 얘기도 있지. 부모가 아들 잘 키워서 국회의원이나 장관 만들어놓으면 그건 ‘국가의 아들’이래. 돈벌이 좋게 만들어놓으면 그건 ‘사돈의 아들’이고, 한 달에 5, 6백만원씩 버는 샐러리맨은, 그건 ‘며느리의 남편’이래. 그 다음이 걸작이야. 그럼 내 아들은 누구냐. ‘백수’나 ‘병자’일 때만 그렇다는 거야. 자식? 기대할 거 없어. 그런 것들이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거지.


‘김 회장’과 ‘정동마님’의 로맨스
“나는 눈이 작고,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든”

국립극단에 들어가고,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세를 위해서, 눈이 크고 지적인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장기자 너무 바쁘게 지내셔서 아내 김민자씨하고 두 분만의 시간은 없을 것 같아요.
왜? 두 사람 시간 참 많아. 나이 먹으니까 그게 좋더구만. 오전 6시면 둘 다 깨거든. 그러면 차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 그 시간이 참 아름다워. 그럼 점점 여명이 밝아오면서, “아유, 오늘은 참 날씨가 좋겠다”, “오늘은 좀 춥겠지?`” 하는 날씨 이야기. 그리고 밥 하러 부엌에 들어가면 난 신문 들고 돋보기 쓰고 집사람 근처로 가. 신문 읽으면서 “뭐 이런 놈이 있어!`” 하고 욕도 하고. 신문 읽어주는 거지. 아침밥을 뭘 할지도 기대되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렇게 재미있어. 그리고 아내가 돌아가신 양반들 제사를 잘 지내줘. 아주 철저하고. 그게 너무 고맙지.

장기자 사모님 너무 예쁘세요. 사진 보니까.
그땐 예뻤지.

정기자 하하, 방금 ‘너무 아름다운 아침’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원래 연출을 공부했잖아. 그런데 배우가 돼버렸단 말이야. 그래서 내 외모에 굉장한 열등감이 있었어. 그래서 “2세는 잘생긴 놈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그래서 그렇게 눈 크고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골랐어. 나는 감성적이니까. 이런 얘기를 옛날에 총각 때 친구한테 했더니 “야, 김민자가 딱이다. ‘정동마님’ 보면 나온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국립극장 앞에 빵집에 가서 공중에 하나 달린 TV로 봤지. 한복을 곱게 입고 나오는데 눈도 크고, 내가 바라던 그대로더만. “아, 저 사람하고 나하고 합치면 괜찮은 놈이 나오겠구나” 그래가지고 쫓아간 거 아니야.

장기자 아내도 알고 계시나요?
너무 잘 알지. 그래서 친구한테 “김민자를 어떻게 만나느냐” 그랬더니, 점심 때 방송국 매점으로 가래. 여자들은 점심 때 밥 안 먹고 커피하고 빵 먹는대. 그래서 좋은 옷을 입고 갔지. 아내가 친구들하고 같이 들어왔어. 그래서 내가 차를 마시고 나가면서 “얼마유? 저쪽까지 다 낼 거요.” 그랬어. 이 사람이 깜짝 놀라서, “아니, 왜 내세요?” 그래. “아, 내가 좋은 사람이니까 내지.” 그랬더니 네 여자가 다 놀란 거야. 그러나 난 쳐다보지도 않았지. “누구신데요?” 하고 묻길래, “응? 나 최불암이요” 그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어. 그때 집사람은 나를 이미 알고 있었어. 연극 ‘따라지의 향연’을 보면서 그냥 죽을 뻔했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변소도 못 가고. 내가 그걸 잘했거든(웃음).

장기자 요즘 연예인 부부들 많이 어려운데, 조언 좀 해주세요.
애들이 돈이 생기니까 전부 집을 박차고 나와 살더라고, 아파트 같은 데. 그러나 가족만큼 행복한 것도 없어. 불행에서 건져주는 것도 가족이고. 행불행(幸不幸)은 다 가족으로부터야.

장기자 두 분 다 연예인이셔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같은 직업이라면 한 사람이 희생당해. 두 사람 다 날뛰면 집안이 유지됐겠어? 이번에 이영하하고 선우은숙.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 둘 중에 한 명이 희생되거든. 나는 우리 집사람이 들어앉은 거야. 집사람은 스스로 그랬어. “당신이 열심히 일할 때는 집을 지키겠다”고. 프로그램 와도 안 하더라고.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장기자 정기자의 도발인터뷰]⑦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배우 최불암의 체취

장기자 요즘 여자들은 자기 일 갖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 같고 그렇잖아요.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좀 덜 벌더라도 한 사람은 가정을 지켜주는 게 좋아. 돈 많으면 조금 편안하기는 하지. 그 때문에 행복감을 느끼지는 않아. 아 이것이 내 몫이구나. 그것만 알면 돼.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세상에 먹을 떡이 다 지 떡인 줄 알면 어째.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근데, 차 가지고 왔어?

정기자 아니오. 걸어왔어요(웃음).
그러면 맥주 한 잔 마셔. 여기 맥주 좀 갔다 줘요. 난 안 돼. 운전해야 해. 여기 좀 팔아줘야지. 먹을 만큼 먹어. 안주가 뭐유? 소시지? 여기 소시지 하나 줘요. 일에 치여서 배고프잖아. 난 못 먹어. 내가 음주운전으로 걸리면 사회가 뒤집히는 거야. 하하하.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거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살았지”
말이 많은 날은 후회한다. 정신이 피로하다. 최불암도 그랬다. 연달아 이어진 두 개의 인터뷰, ‘생각이 고갈’됐다. 하지만 요즘은 자전거가 그렇게 좋고, 젊은 사람이 빠르게 앞질러 가면 고맙다는 그는 아직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막을 내리면 사라지고 말더라도, 마지막으로 ‘좋은’ 연극 한 편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장기자 선생님은 뭐 좋아하세요?
응? 술?

장기자 하하. 아뇨, 그냥 뭐 좋아하시냐고요.
뭐 좋아하느냐고? 뭘 좋아하지? 술 좋아하나? 아, 자전거 타. 요즘 걷는 거 하고 자전거 타는 게 좋아.

정기자 자전거가 왜 좋으세요?
욕심이 없어져. 걸어봐. 전부 내 땅이야. 그치? 특히 한강 둔치가 좀 좋아? 자전거의 8학군이야. 집사람 동창이 미국에서 40년 살고 있는데, 한국 와서 한강을 걸었대. “야, 세상에 이런 좋은 나라가 어딨니.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왜 걷는 사람도 없고.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지 않니?” 그랬대. 워싱턴에 사는 사람인데, 하루도 안 빼놓고 한강 둔치를 걸었대. 나는 자전거 타고 반포부터 성산대교까지 왔다 갔다 해.

바람을 맞이한다는 것,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것. 해를 보고 하늘빛을 보고, 들꽃들 보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가을 되면 코스모스가 지나가니까. 국화는 이제 다 졌지. 아직 코스모스 조금 남았더만. 수시로 변하는 야생식물들을 보는 것도 좋고. 대한민국, 참 행복한 나라야, 정치만 잘하면(웃음).

정기자 제 친구는, 자전거가 내 몸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속도를 주니까, 그래서 사랑한대요.
힘차게 타도 땀이 안 나는 건 섭섭해. 바람이 부니까 땀이 안 나. 젊은 사람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 씽- 하고 앞으로 달려가면 서운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나도 젊을 때는 그렇게 힘을 썼지. 이제는 되지 않는 사정에 “그래, 나는 잘살아왔다”면서 숙연해지고. 또 고맙고. 그런데 건강에 치우쳐서 중독되게끔 하지는 마.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좋아.

정기자 젊을 때는 호기가 있잖아요.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건 중용에서는 벗어나는 얘긴데.
그건 벗어나려야 벗어나지지 않아. 우리 그만 얘기하지 인제. 뭐 더 나올 얘기 있어? 이리 와. 마셔, 야 이거 안주 멋지게 나온다.

정기자 아까 촛불이 펄럭이는 시기라고 하셨잖아요. “죽기 전에 뭔가 해야겠다” 그런 게 있으세요?
책도 만들었잖아. 펄럭이면서(웃음). 이제 좋은 연극을 한 편 했으면 해. 연극은 고향이니까. 나이에 걸맞은 좋은 영화도 좋고.

장기자 김명곤 전 장관도 같은 말씀을 하셨죠. “불후의 명작을 한 편 남기는 것이 소망”이라고.
그렇지. 그런데 영화는 필름이 오래가지만 연극은 무대 위에서 단숨에 끝나잖아. 그래도 연극으로 가고 싶어.

정기자 연기자가 연극에 갖는 애정은 문인들이 시에 갖는 것과 비슷하겠죠?
애정 때문이지. 연극이 남는 게 뭐 있어. 시도 모든 문학의 원류니까.

정기자 내가 지금까지 괜찮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세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았지. 잘살았지 뭐. 지금도 난 참 미련해. 생각을 많이 안 해. 그 우직한 거.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거.


집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던 오후 6시는 이미 지났다. 전화가 왔다. 통화가 끝났고, 인터뷰도 마칠 시간이 됐다. “이제 가, 나 집에 가야 돼. 여기 맥주 세 병 더 주슈. 시원한 걸로.” 의자에 걸쳤던 재킷을 다시 입고, 계산을 마친 최불암은 ‘빼빼로’를 선물받았다. “아, 오늘이 빼빼로데이구만! 고맙수다. 이거 나만 받아서 미안한데.”

그는 항상 ‘어른’이었다. ‘최불암 시리즈’는 그를 가볍게 만들었고, 오래된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는 로맨스의 주인공 ‘캡틴 박’이었지만 그저 유쾌했다. 한없이 가벼워질 때도, 어른일 때도 ‘배우는 백지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가 지키는 어른의 자리는 굳건하다. 따라 나오지 말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를 알아본 젊은 부부가 인사를 건넨다.

기획 / 장회정 기자·정우성 기자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주석 장소 협찬 / 압구정 cafe 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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