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요동치는 일상과 음악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요동치는 일상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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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덕은 시각장애인이다. 지난 11월 20일에는 어머니를 영원히 떠나보냈다. 그리고 나흘 뒤 결혼식을 올렸다. 찬찬히 들여다보는 전제덕의 이야기는 분명히 ‘감동적’이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지금까지 발매된 두 장의 앨범, 그리고 전제덕의 단호한 입술이 만드는 음악 속에 있다.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요동치는 일상과 음악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요동치는 일상과 음악

단단한 편견에 맞서
시각장애와 하모니카는 전제덕(33)이 맞선 두 가지 편견이다. 지팡이, 선글라스, 안마. ‘시각장애’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는 편견의 반증이다. 하모니카가 환기하는 이미지가 ‘가을’, ‘애상’, ‘구슬픔’이라면, 그 역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것만을 편애하는 우리 사회의 두 가지 편견은 전제덕의 입술 위에서 깨진다.

“시각장애에 대한 편견은 빨리 없어져도 돼요(웃음). 대중은 제 음악을 듣지, 제 일상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모니카와 시각장애에 대한 편견은 비슷해요. 하모니카는 ‘마우스 키보드(Mouth Keyboard)’라고 하죠. 그만큼 다양하고 힘찬 소리가 나요. 독주를 하기도 하고, 현란하게 연주하면 다른 관악기랑 헷갈리기 쉬워요. ‘하모니카=슬픔이 묻은 멜로디’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에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비킴, 박진영, 나훈아, 이승철, 이수영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최근 앨범에서는 그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폭넓은 피처링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주고자 하는 의지다.

전제덕이 시력을 잃은 것은 생후 보름 만이었다. 40도까지 치솟은 열은 시신경을 손상시켰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을 댈 수 없었다. “평생 실명인 채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 고(故) 안재순씨의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시력을 잃은 전제덕을 찾아온 것은 음악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밴드부에서 타악기를 연주했고, 중학교 때는 사물놀이를 했다. 국사선생님이 쥐어준 ‘김덕수 사물놀이패’ 테이프에 담긴 장단은 그를 취하게 했다. 밤 12시까지 연습을 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가 예사였을 만큼 미쳐 있었다.

본격적으로 하모니카를 연주한 지는 10여 년이 됐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세계적인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Toots Thielemans)의 발라드. 투츠 틸레망은 하모니카 연주만 60여 년을 한 거장이다. 전제덕에게는 힘겹게 구한 그의 음반이 유일한 교과서였다. “음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니,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공식이 성립할 때까지 연습하고 또 했다”는 그의 입술은 성할 날이 없었다.

지난 2004년 10월 발매된 1집 「전제덕」은 바싹 마른 대중 음악계를 시원하게 적셨다. 문방구에서도 구할 수 있는 하모니카는 소박한 악기지만, 음악은 달랐다. 힘차고 풍성했다.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은 그의 1집을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로 꼽았다. 언론은 ‘하모니카 마스터’, ‘달인’, ‘영혼을 울리는 하모니카’ 등의 수식어를 쏟아냈다.
“마스터? 달인? 좀 그렇잖아요(웃음). 나이도 얼마 안 먹었는데. 추상적이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아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한’ 어머니의 영원한 외출
지난 11월 20일부터 24일, 전제덕의 일상은 요동쳤다. 모친상과 결혼, 슬픔과 행복이 잔인하게 공존했다. 지난 12월 10일 만난 그는 유머러스했지만, 실은 아무 것도 차분하게 가라앉지 않은채 였다.

“가신 지 한 달도 안 됐어요. 오늘 딱 20일 됐네요. 아직 시간이 좀 가야죠. 지금은, 아직 우리 엄마가 어딜 놀러 가신 것 같아요. 외출하셔서 돌아오지 않은 느낌이기 때문에… 인정을 못하고 있어요. 시간이 걸리겠죠.”

전제덕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지난 11월 20일. 고(故) 안재순씨는 아들의 결혼식을 4일 앞두고 간암 후유증으로 눈을 감았다. 평생 “제때 병원을 찾지 못해 아이를 앞 못 보게 만들었다”는 자책감 속에 살았던 어머니였다. 특수학교를 다니던 아들이 장구에 소질을 보이고, 하모니카에 빠져들면서부터 아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거리에서 과일과 채소를 팔고,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전제덕의 공연, 녹음 현장에는 항상 함께했다.

다른 음악인들과 뒤풀이를 할 때도 아들의 옆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웃으셨다. 하루 3~4시간도 제대로 자기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전제덕은 한 인터뷰에서, “술도 안 드시는 어머니가 왜 간이 나빠지셨겠어요? 저 챙기느라고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 같은데,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요. 제가 일어나면 늘 어머니는 벌써 일하러 나간 후였죠”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3년 전, 서울 성북구 미아동의 스튜디오에서 첫 솔로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울었다. 10여 년 동안 계속된 모자(母子)의 노력이 첫 번째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소화불량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던 어머니는 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전제덕은 “가슴으로는 매일 울면서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 나섰다”고 했다. 수술을 앞두고도 “공연 있다면서 빨리 가라, 게으름 피우지 마라, 내가 미안하다”고 하시던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행복한 때, 참 많았어요. 둘이 아이디어 내서 맛있는 거 해 먹을 때도 좋았고. 어머니가 족발을 참 잘하셨거든요. 우리 엄마 족발을 따라오는 사람을 못 봤어요. 족발만 보면 생각날 것 같아. 계피 향도 살짝 나면서. 아, 그리고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을 때 끓여주시던 동태찌개. 소주 한 잔 마시면서 나누던 이런저런 얘기. 행복했죠.”

눈빛은 읽을 수 없었고, 전제덕은 담담했지만 ‘어머니께서 긴 외출을 나가신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를 다시 울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멀리 가신 어머니에게 전하는 아들의 속 깊은 당부가 귓가에 맴돌았다.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요동치는 일상과 음악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요동치는 일상과 음악

“글쎄요, 그동안 길지도 않은 생을 힘들게 살다 가셨으니까. 이런저런 걱정 다 접어두고. 거기 우리 이모도 있고 외삼촌도 있으니까 만나서 그동안 못한 얘기 하고, 회포도 풀고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대신 ‘마누라’가 들어왔으니 그만큼 열심히 살아줄 것이고. 나중에 만나야죠. 그렇죠?”

전제덕은 지난 11월 24일 결혼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는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너희들 결혼식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탈상도 하지 않은 채였지만 결혼을 강행한 것은, 생전에 아들의 결혼을 간절히 바랐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때문이다. 신혼여행은 유해를 모신 경기 수원의 납골당을 찾는 것으로 대신했다.


죽음과 생명, 아름다운 ‘운명’의 아이러니
전제덕의 ‘마누라’ 양선희씨(33)는 라디오 리포터 출신 연기자 지망생이다. 3년 전, 그들은 리포터와 인터뷰이였다.
“아니, 리포터가 술이 덜 깬 채로 인터뷰를 하러 왔어요. 와서 한 시간 반을 혼자 얘기했어요. 나는 한 30분 얘기했는데(웃음).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심난하고 그럴 때 전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메신저 아이디를 물어보고, 전화하고 그랬어요.”

배우자를 고르는 전제덕의 조건에 ‘외모’는 없다. 대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느낌이 있다. 힘들고 우울해도 같이 있으면 힘이 나는 사람. 어머니 생전에는 ‘이제 아들 하나 빼앗기는구나’라는 농담을 들을 만큼 구석구석 챙겨주던 사람이다.

“제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잖아요. 나만의 뭔가가 있어요. 말로 설명은 못하겠어요. 결혼을 하려면 이 친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애할 때는 진짜 키 크고 예쁜 여자도 사귀어봤죠. 그런데 결혼은 다르잖아요. 결혼은 가족, 그리고 그 외의 것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에 함께 올랐던 데이트는 지금도 생생하다. 열두 시간이 걸렸다. 오전 9시에 시작한 산행은 밤 9시에 끝났다. 양선희씨는 정상까지 전제덕을 이끌었다. ‘기왕 왔으니까, 정상까지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내가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주려고 그런다”며 차분하게 걸었다. 전제덕은 투덜대면서도 끝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100m,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바람이 불었다.

“그런 맛 때문에 산에 오르는 건지. 제가 앞이 안 보이니까, 같이 올라가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한라산이 돌산인데,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제가 중간 중간에 쉬는 바람에 열두 시간이나 걸렸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호흡이 잘 맞았던 거죠(웃음).”

두 사람이 신혼살림을 차린 것은 지난 8월이었다. 몇 개월 늦은 결혼식, 그리고 양선희씨는 지금 임신 4개월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내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뛰고 있어요. 직계가 되는 생명이. 이렇게 생명이 오고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위대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요. 경외감을 느껴요.”

전제덕의 지난 몇 개월은 슬펐지만 허무하지 않았다. 이제는 다시 음악이다. 그에게 연주와 공연은 일상이다. 새해에는 새로운 음악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선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간 것도 운명이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내년부터는 제발, 새로운 해가 되는 것도 좋지만 뭣보다 슬프지 않은 1년이 됐으면 좋겠어요.”


다시, 음악 이야기
모친상과 결혼에 대한 보도가 일간지를 장식한 후에는 국내 여성지에서 인터뷰 섭외가 빗발쳤다. “시각장애인 하모니카 연주자를 뒷바라지하던 어머니의 죽음과 나흘 후에 올린 결혼식”은 드라마 같았고, ‘읽을거리’가 되기에도 충분했다. 전제덕은 말을 아꼈다.

“제가 일반인이 아니라서 그렇죠. 만약 제가 인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제 상황을 이용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건 아니니까. 다 끊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음악과 사생활은 별개다. 대중은 매력적인, 혹은 드라마틱한 일상을 사는 음악인의 음악을 편애하지 않는다. 좋으면 듣고, ‘별로’면 지운다. 간단하다. 클릭 한 번이면 된다. 전제덕 1집의 성공이 시각장애와 하모니카라는 의외성에 힘입었다고 생각한다면, 2집의 실패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여전히 앞을 볼 수 없는 채로 하모니카를 불었다. 성공과 실패의 원인은 항상 음악 자체다.

“2집은 욕심을 좀 부렸어요. 그래서인지 어렵다는 분들이 많았죠. 연주곡이 많았고, 대중에게는 잘 들어오지 않는 음악이었나 봐요. 하지만 보람찬 음반이에요. 지금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대중이 한층 성숙했을 때는 대접받을 음반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전제덕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3층 건물에 비유한다. 원더걸스, 소녀시대는 3층에서 발랄하다. TV 앞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은 3층에 고정돼 있다. TV와 라디오에 지친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는다. 팔팔한 생명력의 인디밴드들은 1층, 혹은 반지하에서 기타 치고 노래한다. 2층은, ‘폭탄’ 맞았다.

“우리나라 문화 자체가, 폭탄 맞은 2층 문화예요. 3층에서 돈은 잘 벌 수 있지만, 포화되면 주저앉죠. 2층이 받쳐주지 못하니까요. IT 강국, 초고속 인터넷은 정부를 업고 팽창했지만, 문화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어요.”

결과에만 집착하는 정책은 IT 강국을 이루고 문화를 죽였다.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10주 넘게 1위를 하고 이승환, 015B가 TV에 나오지 않아도 수십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던 것은 옛날 얘기다.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는 암 말기’라고 진단했다. 음악도, 영화도 ‘공짜’로 퍼주는 초고속 인터넷과 그게 당연한 줄 아는 대중의 불감증 앞에 서툰 규제는 속수무책이다.

“대중은 냉정해요. 똑같이 열심히 했는데 2집은 팔리지 않았어요. 낯설고 듣기 힘드니까 외면하잖아요. 저는 어차피 음악으로 얘기해야 해요. 제가 시각장애라는 것도, 하모니카를 분다는 것도 마찬가지죠. 지금이야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이슈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연해질 거예요.”

전제덕은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양을 떠올렸다. ‘장애’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는 냉정하게 조언했다.
“사람들은 감동적인 스토리를 말할 때 항상 희아 얘기를 해요. 그 친구는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니까, 저보다 신기하죠. 그런데 그걸로 아직도 가고 있어요. 빨리 자기 음악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대중에게 승부를 걸어야죠. 사랑받고, 외면받는 맛을 봐야 해요. 그래야 진정하게 우뚝 설 수 있어요.”

전제덕의 음반을 듣고, 시각장애를 떠올리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지난 한 달 동안 그의 일상을 뒤흔들었던,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감동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그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대중이 전제덕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통로는 음악이다. 선글라스 너머, 두 눈의 초점이 흐리다고 해서 음악을 달리 듣지는 않는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성훈 장소 협찬 / 사다리(홍대 카페) 사진 속 작품 / 김경아, 토리걸 두 번째 이야기 ‘거짓말…’, 김병규 ‘Supreme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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