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인생은 서른 살부터…
모든 걸 다 걸었던 사랑에 상처 받았지만 또 다른 사랑 기다려요”
유난히 “싫어요”라는 답변이 많았다. 딱딱한 인터뷰 분위기가 연상되겠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즐겁고 진지했다. 현실적인 사랑 혹은 헌신적인 사랑, 멋진 차 그리고 유명 브랜드, 배우의 신비주의, CF 퀸… 모두가 ‘Yes’라 할 때 그녀는 당당히 ‘No’라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뿌듯한 거 있죠. ‘나도 촬영하면서 다치는구나’하고. 일종의 훈장이랄까.” 듣고 보니 영화배우도 3D 직종인 것 같다. “영화 ‘기담’ 촬영 때는 영하의 날씨에 신발, 양말 다 벗고 촬영하기도 했어요. 얼음장 같은 계곡 물에 들어가기도 했죠. 그런데 그때뿐이에요. 그게 힘들다고 하면 배우 못해요.” 그렇다면 정작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작품 들어갈 때 외로운 거요. 외롭죠. 캐릭터를 연구해서 소화해내고 연기하는 건 누가 도와줄 수 없거든요. 시나리오를 보며 상상했던 것을 내가 못하고 있을 때, 정말 힘들죠.”
일
“영화 ‘친구’ 때 인기? 지금이 더 좋아요”
김보경은 지난해 두 편의 드라마,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드라마 ‘`하얀 거탑’, ‘깍두기와 영화 ‘여름이 가기 전에’, ‘기담’, ‘은하해방전선’ 이다. 그녀는 이 중 ‘기담’을 인생의 전환점이 된 영화로 꼽았다. “‘기담’을 통해 연기에 더 깊게 다가설 수 있었어요. 연기에 대해 이제야 뭔가를 알 것 같아요. 미묘한 눈도 생겼고요. 빠르다고 보면 빠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걸 이제야 알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비록 흥행은 못했지만 ‘기담’을 통해 그녀는 평론가와 관객의 찬사를 받았다. 배우 김보경의 재발견이라 할 만큼 관심을 모은 것이다.
여러 작품을 거쳐왔지만 그녀는 아직도 영화 ‘친구’의 ‘진숙’ 이미지가 짙다. 이후 그 정도의 임팩트를 주는 작품이 아직 없어서일까? “‘친구’로 인기를 얻었을 때, 그때 잘됐어야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작품을 했더라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녀는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한다. “지금 내가 얻은 것, 내가 깨달은 것을 얻지 못했을 수 있었으니까. 제게는 지금 얻은 것들이 더 소중해요.”
사랑
“제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김보경은 이제 서른두 살이다. 한두 번쯤 사랑에 울어 봤을 나이. “너무나 순수한 사랑을 했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꿨죠. 싫어요. 이제는 안 그럴 거예요.” 상처가 제법 큰 듯했다. 사랑 이야기가 나오니 “싫어요”라는 말을 자주 반복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헌신적인 사랑… 싫어요. 한때는 ‘사랑해’라는 말에 목숨을 걸었고, 그런 사랑을 했었는데, 이제는 무서워요. 제가 또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그녀가 꿈꾸는 사랑은 다분히 이상적이었다.
“이상적인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에로틱한 사랑, 아가페적 사랑… 세상 모든 사랑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랑이겠죠. 너는 나의 연인이자 친구이자 부모인, 고로 나는 너이자, 너는 나일 수 있는 사람.” 그런 상대가 있기나 할까?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람을 만나 사랑을 했다. 비록 지금은 상처로 얼룩진 기억일지라도. “예전 남자친구는 저를 너무 잘 알아주었죠. 그래서 감히 제 100%를 줄 수 있었어요. 그래서 헤어졌을 때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 사람과 헤어져서 슬픈 것보다 한 인간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 그게 더 컸던 것 같아요. 혼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던져진 느낌이었죠.”
이별 후 그녀는 사랑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했다. “이젠 너무 지쳤고, 세상도 알 만큼 알아요. 그런 제가 무슨 사랑을 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이상을 포기하지도,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거든요.” 세상을 알수록 사랑하기는 더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순수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가요? 많이 달라졌죠. 너무 속상해요. 그때 나의 사랑이 원망스러워요. 100%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조금이라도 남겨놓았다면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송두리째 빼앗아갔기 때문에 너무 화가 나요.”
인생
“서른 살부터는 제대로 자기 인생 사는 거죠”
‘깍두기’의 지혜, ‘하얀 거탑’의 희재, 오래전 ‘친구’의 진숙… 김보경이 맡은 역할은 하나같이 ‘센`’ 역할이다. 섹시하고 도도하고 그리 선하지 않은 이미지. “싫죠(웃음). ‘기담’에서 맡은 캐릭터는 굉장히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푸근한 여성이어서 ‘이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기대했어요. 그런데 ‘깍두기’에서 또다시 ‘하얀 거탑’의 이미지로 돌아왔어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굉장히 청순했거든요.” 실제로 만난 김보경은 섹시하기보다는 ‘맑은’ 느낌이었다. “처음 데뷔했을 때는 ‘너처럼 매니저 말 잘 듣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순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마음 약하고, 시키는 대로 했죠. 겁이 많아서 싸우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나쁜 말도 못했어요. 그러면서 많이 깨달았죠.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김보경은 30대가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능동적으로 살아야 되더라고요. 자신에 대해 똑똑해져야 하고. 착하게 대할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이에요. 저는 운명을 믿거든요. 그래서 일이 안 돼도 남을 탓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너무 그렇게만 살아온 것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해요.”
벌써 연예계 생활 10년 차. 그 사이 인기와 슬럼프를 번갈아 경험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어느 순간 정리가 되면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하죠. 연기에 대한 모니터도 잘 듣는 편이지만, 어느 이상은 안 들으려고 해요. 어느 시점부터는 제 생각을 밀고 나가죠. 서른 살부터는 제대로 자기 인생 사는 거잖아요. 남 탓도 못하고요.”
“비싼 옷, 외제 차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김보경. 학창 시절, 그녀가 걸치고 다니는 아이템은 모두 학교에서 유행이 될 정도였다. 사진 촬영에 앞서 의상을 고르고 코디할 때도 그녀의 센스는 빛을 발한다. 일일이 액세서리와 헤어스타일을 노련하게 챙기며 촬영에 임한다. 심지어 기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활용했을 정도. 이런 재능을 살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절친한 친구 손정민(가수 손호영의 누나)과 청바지 쇼핑몰(www.d-brand.co.kr) 사업을 시작했다. 단순한 쇼핑몰이 아니다. 철학이 담긴 청바지를 파는 일이다. “정민 언니와 명상하러 다니다가 쇼핑을 하게 됐어요. ‘청바지가 너무 비싸다’며 아쉬워하다가 청바지 원단을 취급하는 곳을 알게 됐고, ‘그럼 우리가 싸고 좋은 청바지를 만들어볼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됐요.”
디자인에서 판매까지 직접 나서고 있는 김보경과 손정민. 청바지 마니아인 이들은 그동안의 경험을 제품에 고스란히 반영시켰다. “이태원에서 청바지를 많이 샀거든요. 그런데 잘못 사면 골반이 아프고, 엉덩이 꼬리뼈가 아프더라고요. 청바지는 디자인, 원단, 박음질이 굉장히 중요해요. 특히 원단이 제일 중요해요. 세계에서 프리미엄 진을 취급하는 데는 두 군데밖에 없는데 그중 한 곳에서 원단을 공급받고 있어요.”
이들은 6만~7만원대,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청바지를,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들에게 팔고 싶다. “사람들이 청담동, 유명 브랜드 이런 게 아니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차가 어떤 거고, 어느 브랜드 옷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런 것들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유명 브랜드가 아니라도 좋은 질감의 청바지 입기, 비싼 바(bar)가 아닌 한강변에서 몇 천원짜리 샴페인 마시기, 멋진 욕실이 아닌 큰 대야에서 거품 목욕하기… 행복은 마음 안에 있는 거잖아요. 우리 브랜드를 통해서 이런 철학을 공유하고 싶어요.”
김보경은 행복하다. 좋은 친구가 있고, 일이 즐거우며,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아직 두려움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행복을 아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은 분명 다를 테니까.
■글 / 두경아 기자 쭕 의상&엑세서리 / d-브랜드(www.d-brand.co.kr), 막스앤스펜서·헤이린(02-3445-6428),루크루크(www.lukeluke.co.kr), 인핑크(02-508-6033) ■장소 협찬 / 카페 스페이스* C(02-512-6779) ■헤어& 메이크업 / 조성아앳폼(02-517-5436) ■스타일리스트 / 최현주 ■사진 / 이명헌(Pien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