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생각보다 편안하지 않고, 생각보다 덜 어리바리하죠?
일에는 엄격하고, 이야기할때는 정확한 편이에요”
착각이었다. 순하게 처진 눈,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해맑은 웃음, 낮고 느린 목소리…. 이것만으로 김태우를 안다고 생각했다. ‘진짜 김태우’와의 만남은 당황스러움으로 시작해 감탄으로 끝났다. 그리고 만족하기로 했다. ‘진짜 김태우’를 알려면 좀 더 긴 시간과 자연스러운 만남이 필요하겠지만.
리빙 클래식’ 무대 리허설이 한참인 호암아트홀. 기자는 정신없던 오전 일정을 마치고 리허설을 참관했다. 본 공연과 달리 리허설에는 여유롭고 느긋한 맛이 있다. 적어도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김태우와의 약속은 ‘리허설 중에’라고만 정했다. 인터뷰뿐 아니라 리허설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살리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인터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있다가는 시간을 못 낼 것 같아서요.”
눈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에서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배우로서의 또 다른 무대, 리빙 클래식
‘리빙 클래식’은 클래식 음악을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들려주는 음악회다. 연말 공연으로 꾸준히 사랑받아 지난해 3년째를 맞았다.
“3년 전 연주자들과 처음 만났어요. 처음에는 서로 편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은 다들 서로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그런데 배우가 온다고 하니 좀 그랬겠죠. 그렇지만 친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음악 하는 분들이지만 모두 굉장히 털털하거든요. 그래서 무척 잘 맞고, 지금은 개인적으로 더 친하게 지내고 있죠.”
3년 동안 공연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게 연주자들과의 친분 때문이냐고 물으니, 그는 단호히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다”라고 한다.
“웬만하면 연기 외적인 걸 잘 안 하려고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처음 섭외가 들어왔을 때 정중히 거절하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배우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뭔가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것이 부담 아닌 부담이 되기도 하고요. 이렇게 공연으로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연주자들을 만나는 것, 조금 다른 의미로 관객들과 만나는 것도 좋네요.”
출연자 대기실에는 그가 직접 손으로 쓴 듯한 종이들이 여러 장 있었다. 공연 기획사 측으로부터 그가 직접 원고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원고는 없어요. 아, 저 종이요? 그냥 곡명만 써놓은 거예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대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싫더라고요. 연주회의 목적이 클래식을 편하게 전달하는 데 있는데, 곡에 대한 설명을 그냥 써주는 대로 읽는다면 굳이 제가 할 필요가 있나 싶었거든요. 그런 내용은 프로그램에 적거나 아니면 음악 전문가가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피아노 치는 남자 김태우
그는 주어진 원고를 읽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대본 없이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연극배우였다. 좋은 음악은 연주자들이 들려주지만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건 그의 역할이다. 분위기는 그가 미리 준비한 유머에 의해 좌우된다.
“우선 대중이 편하게 느껴야죠. 유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머는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거든요. 또 공연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피아노는 어릴 때 잠깐 배웠어요. 집에 피아노도 없고요. 1년에 딱 한 번 연주해요. 기대하지 마세요. 대단한 연주는 아니에요(웃음). 처음에 종훈이 형(박종훈)이 ‘한번 나가서 쳐봐’ 해서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잘해서가 아니에요. 제가 배우기 때문이죠.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거? 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태우는 이 공연을 진행하면서 클래식 음악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음악 자체에도 관심이 없었던 그다.
“공연을 하면서 클래식 음악이 좋다는 걸 많이 느껴요. 첼로나 클라리넷은 쉽게 접해보지 못한 악기잖아요. 그런데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악기를 접하는데 참 좋다고 느끼고 있어요.”
3년간 공연을 진행하면서 팬층도 넓어졌다. 그가 뿌듯한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준다.
“공연이 매진됐을 때였어요. 일본 분이 저를 좋아하는 팬이라면서, 호암아트홀 관계자들에게 로비에서 TV로라도 보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제가 매니저를 통해 표를 구해드렸어요. 그 이후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 무대 인사 때 직접 찾아오셔서 저에게 선물하고 편지를 주시더라고요. 그때 너무 고마웠다고. 그 일 때문에 일부러 한국에 오셔서 보고 가신 거죠.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정확한 남자, 좋은 사람의 또 다른 모습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빨랐다. 생각보다 건조했고, 또 생각보다 느리지 않았다. 보통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느리지 않았던가?
“저, 생각보다 편안하지 않고, 생각보다 덜 어리바리하죠? 따뜻하고 순수하고 그럴 줄 알았죠?”
그가 기자의 마음을 콕 집어서 말한다. 정곡을 찔린 기자는 “아니 뭐 그게 아니라…”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리허설 중이니 시간에 쫓기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원래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편이기도 해요. 어떤 기자 분은 저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편하게 할 때는 하는데….”
아무래도 인터뷰 일정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리허설은 기자에게는 여유로운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이 공연에서 저는 연극으로 따지면 배우예요. 긴장이 아니라 준비의 문제죠. 그래서 말도 빨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셔도 돼요. 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인데…. 그래도 포용해주고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정확한 사람이다. 부정확하거나 확신이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촬영장에서 같이 일하는 배우들에 대한 배려가 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인터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공과 사를 구분 짓는 사람이었다.
“친구와 영화 약속은 늦어도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일은 달라요. 약속 시간을 어기면 진짜 화를 내죠. 정확해야 하는 거니까.”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공연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나 약간의 유머, 농담들은 즉흥적으로 생각나서 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현장에서 오는 피드백을 받고 하는 거지만 나름 계산을 하는 거거든요. 공연 중에 인터뷰 시간이 있어요. 재미있지만 음악적인 것까지 순서와 배치를 하는 거고요. 어느 정도 편안함이 있지만 관객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편안함이죠.”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바꾸고자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태어나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그는 주저 없이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한다. 그리곤 가족에 대한 기분 좋은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지만, 기사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요즘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느냐고. 그가 브라운관을 떠난 지 벌써 6년이나 됐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기왕이면 영화가 좋았고요. 그런데 2008년에는 드라마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4부작 드라마가 있거든요. 아직 방영 날짜는 잡히지 않았어요.”
이번 드라마는 특별한 경우였다. 100% 사전 제작이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한다.
“작업은 좋았어요. 일본 스태프들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현장에서 잘 바뀌지 않아요. 스태프들은 힘들지 몰라도 반대로 배우한테는 좋더라고요. 딱 정해진 대로만 작업하니까요.”
그동안 영화로 꾸준히 관객을 만나왔지만, 드라마로 만나게 된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6년 전 김태우와 지금의 김태우. 어떤 부분에서 달라져 있을까.
“달라진 건 시청자들이 평가해야 할 몫인 것 같아요. 다만 기존 드라마와 달리 영화처럼 작업했기 때문에 편안하게 연기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제 연기가 더 편안해졌다는 평을 받으면 성공이겠죠. 예전에는 대본을 많이 봤다고 한다면 지금은 생각을 많이 해요. 대본에 안 나와 있는 것을 생각하며 ‘앞에는 어땠을까’, ‘뒤에는 어땠을까’ 등, 신과 신 사이에 있는 일들을 생각해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많이.”
그는 고집이 세다. 특히 일을 할 때는 더 그렇다. ‘사과’, ‘내 청춘에게 고함’, ‘기담’ 등 그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들도 그를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으로 비쳐지게 하는 데 한몫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좋은 작품을 골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본의 아니게 제가 했던 작품들이 대중적이지 않은 것들이 많았어요. 그건 제가 의도했던 건 아니에요. 좋은 작품을 열심히 하고, 그 영화를 많은 관객이 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에요.”
원고를 쓰기 직전, 그와 전화 통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과는 달리 차분하고 따뜻했다. 촉박하게 진행된 그날의 인터뷰에 대해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그날의 공연에 대한 생각, 그리고 지면을 통해 전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여러 가지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건넸다. 2008년의 계획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빨리 좋은 작품에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라며 “좋은 작품에 대한 갈증이 난다”고 했다. 전화로나마 조금 더 알게 된 김태우.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정확했다. 이것이 ‘진짜 김태우’에 대한 느낌일까?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