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무혈성 대퇴골두 괴사로 앨범 낸지 한달만에 활동 중단,
투병 중 완성한 음반으로 가요계 컴백”
얼마 전, 9집 앨범을 발표한 가수 김경호가 무혈성 대퇴골두 괴사로 투병 중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때 걸음도 걷지 못했던 그는 다행히 병세가 많이 호전됐다. 여전히 음악과 함께할 수 있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그를 만났다.
“2007년은 힘겨운 한 해였어요. 몸이 아파서 계속 쉬어야 했으니까요. 건강은 나의 의지와 오기만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한 해였어요. 그래도 9집 앨범을 발표하고 방송 활동도 하고 있으니 참 행복하죠.”
옛말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있다. 지난 2년 동안 김경호는 이 말을 위안 삼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쉴 수밖에 없었던 지난 2년 동안 그는 자신을 되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가요계 데뷔 후 지금까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으니, 한번쯤은 여유를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의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고,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면서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9집 앨범은 투병 중에 얻은 귀한 앨범이다.
‘무혈성 대퇴골두 괴사’는 희귀병이나 불치병이 아니다
무혈성 대퇴골두 괴사. 많은 사람들이 김경호의 병명을 듣고 희귀병이나 불치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이 병은 넓적다리 가장 윗부분의 대퇴골두에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엉덩이뼈가 썩는 질환이다. 김경호에게 이 병이 발병한 건 2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악화될 줄 몰랐어요. 정형외과에 갔더니 종합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종합병원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였어요. 인공 관절을 삽입해야 할 정도에 이른 거죠.”
인공 관절의 수명은 10년. 인공 관절을 삽입하고 10년이 지나면 재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재수술이 까다롭고 위험하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인공 관절을 삽입하라고 했지만 김경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녹아내린 관절이 재생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의원 치료에 매달렸다.
“병 때문에 8집 앨범을 낸 지 한 달 만에 활동을 중단했어요. 그때는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상태였죠. 모든 공연과 뮤지컬 등을 포기하고 ‘몸 추스르기’에 들어갔어요. 한의원에 다니면서 1년 2개월 동안 거의 날마다 침과 뜸 치료를 받았어요. 고통의 나날이었죠.”
다행히 지금은 일주일에 한 차례만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만큼 병세가 호전됐다. 두 시간 이상 서 있으면 힘들지만 걸어 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 한동안 걸음도 걷지 못하던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앨범을 내고 방송 활동까지 하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9집 앨범을 내기 한 달 전에는 녹아내린 연골의 1/3 정도가 재생됐다는 기쁜 소식도 들었다. 그는 언젠가는 연골이 완전하게 재생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투병으로 인한 공백 탓에 오히려 여유롭게 앨범 만들어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인지상정이다. 흔한 감기에만 걸려도 꼼짝하지 않고 집에 들어앉지 않던가. 그러나 김경호는 온전치 않은 몸으로 직접 앨범 프로듀싱을 했다. 그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 9집 앨범 「인피니티(Infinity)」다.
“제가 프로듀싱을 하긴 했지만 곡을 다 받았기 때문에 크게 힘들진 않았어요. 아팠기 때문에 오히려 곡을 구상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앨범 컨셉트를 정하거나 어떤 사안에 대한 회의 등을 할 때도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죠. 여유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앨범이 탄생한 것 같아요.”
김경호의 9집 앨범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한층 부드러워졌다. 타이틀곡인 ‘습관’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기존의 그의 대표곡들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6집 앨범까지는 발라드와 빠른 헤비메탈 곡 위주였어요. 7집 앨범부터는 부드럽게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제 맘대로 잘 되진 않았죠. ‘어설펐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때마다 스스로 변화를 주지 못한 것 때문에 힘들어하곤 했어요. 무조건 지르는 창법에서 탈피한 이번 앨범에서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 김경호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지르는 창법을 기대한 팬들은 실망할 수도 있죠.”
그동안은 크게 내키지 않아도 해마다 관례처럼 앨범을 만들곤 했다. 회사와 계약 관계로 맞물려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픈 뒤로는 달라졌다. 회사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다. 더 이상 대중이나 팬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가요계에 대한 쓴소리도 주저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지도 않는다. 더 이상은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음악을 할 생각은 없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방송 활동이 몸에 무리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의 주치의도 방송 활동을 권했다.
“오른쪽 대퇴골두가 안 좋으니까 제가 상대적으로 왼쪽 다리에 힘을 많이 주는 거예요. 그 결과 오른쪽 다리가 2cm 정도 짧아졌어요. 주치의가 대퇴골두 주변 근육을 자꾸 움직여줘야 연골이 생성된다고 하더라고요. 힘들겠지만 오른쪽 다리로 지탱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대요. 일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하고, 집에서도 꾸준히 러닝머신을 해요. 음반을 내고 방송 활동을 하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될 거예요.”
2008년에는 일본 진출 계획,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
김경호는 투병 중임에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역시 그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자 또 다른 희망이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겸임 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3년째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제가 가르친 학생들 가운데 지금 가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생이 다섯 명이에요. 그 학생들은 학교에서도 보고 가요계 현장에서도 보는 셈이죠. 학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감동이에요. 나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있으면 회춘하는 느낌도 들죠.”
“제 꿈은 두 가지예요. 계속 음악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죠.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경력을 더 쌓아 겸임교수가 아닌 전임교수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이루지 못해 미련이 남는 게 있어요. 일본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거든요. 2008년에는 일본에서 싱글앨범을 발표하고 활동할 예정이에요. 일본의 클럽 공연부터 하나하나 시작할 거예요. 아마 2008년 가을부터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얼마 전 한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경호는 결혼하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내친김에 그에게 이상형과 결혼 계획에 대해 물었다.
“이상형은 특별히 없어요. 얼굴은 예쁘면 좋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예전에는 ‘얼굴 예쁘고 성격 좀 안 좋아도 살면서 고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저뿐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줬으면 좋겠고, 저의 고민까지 다 들어줄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여자면 좋겠어요. 단, 연예인처럼 사람들의 사랑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해요. 그런 사람은 대개 예민하잖아요. 늦었으니까 괜찮은 사람만 생기면 바로 결혼할 거예요. 결혼 준비도 90% 이상 해놨어요. 제가 혼자 산 지 17년이나 됐거든요. 살림살이 다 장만 해놨으니까 여자는 몸만 오면 돼요(웃음).”
김경호는 병을 앓으면서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음악으로 대중에게 기쁨을 전달하고, 음악으로 대중을 위로할 수 있기에 그는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대중과 ‘행복’을 소통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음악인이다.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민영주 ■스타일리스트 / 이호성 ■의상 협찬 / 슬링 스톤 박종철, 로토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