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5년, 무대 위에 선 진심 가수 박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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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래하면서 바라는 것은 ‘위로’ 딱 하나밖에 없어요”


언제부턴가 ‘미사리의 서태지’라는 이름이 따라붙었다. 4천명을 앞에 둔 무대 위에서는 눈물이 났다. “내가 4천명 앞에서 노래를 하다니.” 분명, 슬픔은 아니었다.


이유 있는 눈물
지난 10월 12, 13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 박강성(47)의 데뷔 25주년 콘서트 “진성(眞聲)”이 열렸다. 2회에 걸쳐 8천여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했다. 티켓은 전석 매진됐다. 13일 공연은 일시 중단됐다. 4천 명의 관객 앞에서 그가 보인 눈물 때문이었다. 2분여간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90년대 초반 술을 마시고 육교 위에 올라가 뛰어내려 자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고맙습니다. 받은 사랑은 죽는 날까지 노래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가수의 눈물을 보고 덩달아 숙연해진 객석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데뷔 25년, 무대 위에 선 진심 가수 박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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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하나로 4천 관중을 숨소리 하나 안 나게 만들어야 했어요. ‘나'를 얘기해야 했죠. 4천 명 앞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기가 막히고 감사해서, 감정이 복받쳤어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박강성은 한국 가요계에서는 드물게 활발한 공연을 펼치는 ‘공연형 가수’다. 동년배 가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수천 석 규모의 공연을 겁 없이 펼칠 수 있는 가수다. 지금이야 전국 어디를 가도 매진 사례지만,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1982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이후 10년은 무명이었다. 첫 히트곡 ‘장난감 병정’(1989) 이후에도 내리막을 걸었다.

“최성수, 김범룡, 임지훈씨가 다 스타가 됐을 때 저는 ‘찌그러져’ 있었어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죠. 그때 소원은 ‘나도 스타가 되는 것’이었어요. 겉으로는 ‘방송에도 관심 없고, 스타가 되고 싶지도 않다’고 했지만 다 거짓말이었죠. 그렇게 말해야 음악성도 있고 그럴듯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철없던 시절이었고, 솔직하지 못했다. 매일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술자리는 초라했다. 술을 마시면 몸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만 도태되는 것 같은 자괴감과 쓸쓸함을 술로 달랬다. 남들 앞에서는 음악성 있는 가수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스타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던 자신이 싫었다.

“진짜 술 많이 먹었어요. 스물일곱부터 서른아홉까지. 그러다 보니 노래가 잘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많아졌죠. 술 때문이었어요. 깨달은 다음부터는 술을 끊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몸을 만들었습니다. 노래 듣고, 연습하고. 레퍼토리도 늘어가고. 잘되는 날이 늘어갔어요.”

청평에서의 2년은 동년배 스타들과 경쟁 상대로부터, 그리고 스타가 되고 싶었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 노래를 그만두고 ‘밤업소’ 무대만 올랐다. 더 이상 음악으로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의정부, 포천 일대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진 박강성의 노래는 관객이 먼저 알아봤다.

“그제야 깨달았어요. 거기는 경쟁 상대가 없었어요. 음악, 노래가 재미있어지고, 돈도 벌고 생활도 안정되면서 좋아졌던 거죠. 사람들이 왜 저를 찾아오는지 몰랐어요.”

30대 후반, 술을 끊고 적극적으로 몸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날개가 돋쳤다. 박강성이 서는 무대는 평일에도 만원이었다. 환호는 어색했다.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반응이었다. 1990년대 후반. 미사리에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데뷔 25년, 무대 위에 선 진심 가수 박강성

데뷔 25년, 무대 위에 선 진심 가수 박강성

‘미사리’와 박강성
미사리에 라이브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박강성이 미사리에서 노래를 시작할 당시는 ‘카루소’와 ‘록시’ 두 곳뿐이었다. 초반에는 드라이브를 가거나 ‘닭도리탕’을 먹으러 찾는 곳이 미사리였다. 방송 무대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 밀려나는 곳이라는 편견 때문에, 미사리를 은근히 괄시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사리 라이브 무대는 ‘쇼’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가수와 관객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흡할 수 있는, 진검 승부가 펼쳐지는 몇 안 되는 무대다.

“과거에 유명했던 사람들이 미사리로 오는 경우가 많죠. 가수들의 이름이 널려 있어요. 거기서 두 달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겁니다. 노래로 승부할 수 없는 사람은 미사리 무대에 설 수 없어요. 노래 못하면 당장 ‘아웃’이죠. 과거에 잘나가던 가수들도 자기 계발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 미사리입니다.”

방송은 10대, 20대 위주가 된 지 오래다. 미디어는 노래만 하는 가수를 환영하지 않는다. 7080세대의 감수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가수는 방송에서 점점 멀어졌다. ‘댄스’ 아니면 ‘트로트’였다.

“문화적 비주류가 된 30~50대가 갈 곳이 없었어요. 그때 미사리에 라이브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세대가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된 거죠.”

전국적으로 통기타 업소가 봇물 터지듯 들어섰다. 교복을 입고 무대에 서는 가수도 있었다. 7080세대의 감성적인 수요가 미사리의 시발점이다. 다섯 곡 정도의 히트곡이 있는 가수는 미사리에 설 수 있지만, 히트곡만으로는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다. 그때그때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감각, 자신만의 무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히트곡만으로 미사리에서 노래하려고 했던 사람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미사리는 냉혹한 곳이에요.”

박강성은 그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박강성 마니아’가 양성됐다. 지방에서도 그의 공연을 보러 미사리를 찾아오는 팬들이 늘었다. 슈퍼주니어 멤버 강인의 아버지는 아들이 데뷔하기 전에 아들과 함께 그의 무대를 찾았다. ‘가수가 되기 전에 네가 꼭 봤으면 하는 무대가 있다’며 미사리를 찾았다.

“방송국에서 강인을 만났는데,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랑 같이 가서 노래를 들었는데, 놀랐다고.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하면서요(웃음).”

‘미사리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90년대 말 단 두 곳뿐이었던 라이브 카페는 2000년을 넘어서면서 백여 개로 늘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열 개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적어도 양적으로는 위기라는 말이 맞다.

“거품이 빠지는 시기죠. 노래에 대한 열정이 없는 가수들로 대충 때웠던 무대가 비로소 사라지고 알차고 값진 가수, 그리고 그런 무대를 제공하는 카페가 두각을 나타낼 겁니다. 미사리가 잘되니 심지어 컴퓨터 노래 반주기로 노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아무리 젊어도, ‘좋은’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대는 관계없다.


뛰어내리고 싶었던 그 다리
‘죽고 싶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하지만, 진심으로 그 언저리에라도 들어서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말을 아낀다. 박강성의 경우, 그 언저리는 서울 독산동의 어느 육교였다.

“말 그대로 죽고 싶었어요. 죽고 싶었어요. 그날도 친구랑 술을 마시면서 신세 한탄을 좀 했죠. ‘왜 나는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할까’ 자책하면서요. 친구가 가고, 걸어서 집에 가는 길에 육교를 건너는 중이었죠.”

술에 잔뜩 취한 채, 절망만 안고 걸었다. 정신은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혀도 굳었다. ‘술 먹고 혼자 밤길을 걷고 있는 무명 가수라니, 얼마나 초라한가’라는 생각에 참담했다. 육교 난간에 다리를 걸쳤다. 한쪽 다리는 육교 밖으로 나갔다. 난간은 다리와 다리 사이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다리 밑으로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손만 놓으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놓아버릴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 밑에 떨어져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불쌍했어요. 지금도 불쌍한데, 육교 밑으로 떨어져서, 차에 치이고 만신창이가 되면 얼마나 처참하고 불쌍할까. 그러고도 죽지 않는다면 또 어쩌나. 평생 불구로 살겠구나. 아프지 않을까? 그런 생각.”

데뷔 25년, 무대 위에 선 진심 가수 박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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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도로 위에 쓰러진 자신이 더 불쌍하고 분해서 다시 내려왔다.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육교를 건넜다. 용기가 없어서 죽지도 못하는 자신이 더 미웠다.

“생생해요. 위치도 기억나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하지만 그런 시간이 꼭 필요했어요. 저한테는 필요했어요. 그게 있어서, 지금 웃을 수 있는 거죠."

박강성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방송 무대에는 설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여유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 바닥까지 몰린 동안 박인 굳은살이 그를 강하게 했다. 이제는 거짓말도 못한다. 스타가 되고 싶으면서도 ‘관심 없다’고 거짓말하며 자신을 속였던 세월이 너무 길었고,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철이 없었죠. 솔직하지 못했고. 음악에는 경쟁 상대도, 골인 지점도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노래예요. 그걸 더 잘하고 싶은 생각뿐이죠. 잘한다는 소리 듣고 싶어요. 감동을 주고 싶어요. 오늘 내 일에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진심은 통한다’는 진부한 말
재미와 자극은 달콤하지만 금세 질린다. 쇼는 쾌감을 주지만 일시적이다. 박강성은 ‘본질’에 집착한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가수의 본질은 노래고, 노래·음악의 본질은 흥미 유발이 아니라 감정을 위로할 수 있는 깊이예요. 자기 노래를 잘할 수 있는 가수가 아니라, 어떤 노래를 불러도 감동을 줄 수 있어야죠. 요즘은 노래를 빼어나게 잘하는 가수가 없고, 모두 트렌드만 좇고 있어요. ‘기획 상품’에 지나지 않죠.”

음악은 항상 당대의 젊은이들이 주관했다. 젊은 감성은 유연하고, 흡수와 표현이 자연스럽다. 박강성은 “음악이 빨라지고 ‘흥미’에 집착하면서 노래가 재미에 국한됐다”며 “본질을 잃었다”고 말했다. 노래에 대한 철학이 없는 가수들을 향한 박강성의 일침은 따끔하고, 대중은 예민하다. ‘본질’에 충실한 뮤지션은 알아보게 돼 있다. 그는 타이거JK와 바비킴을 최고로 꼽았다.

“JK의 랩은 최고예요. 정말 잘하죠. 개념이 달라요. 감성에 있어서는 바비킴이 탁월합니다. 한국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감각이 있어요. 노래를 못해도 느낌이 좋죠. 노래는 느낌이에요. 바비킴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최근 박강성은 ‘리하’라는 중국식 레스토랑의 사장으로 나섰다. 서울 구의동에 식당을 열고 처음으로 식당업에 뛰어들었다. 경기도 구리 인근에 자리한 단골집과의 7년 인연이 시작이었다. 앞으로는 프랜차이즈로 발전시킨다는 포부도 있다. 노래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지난 25년을 생각하면 의외의 행보지만, 의미가 있다. 관객에게 통했던 그의 진심은 손님에게도, ‘리하’의 종업원에게도 통했다.

“처음에는 직원들과의 교감이 어려웠어요. 저에 대한 신뢰가 없었죠. ‘가수? 그냥 업주지 뭐’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마음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죠. 문제는 시간이었어요. 일부러 잘해주려는, 혹은 못해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어요. 운영권은 직원들에게 있고, 손님들은 음식과 사람, 음악과 분위기를 보고 오는 거니까요(웃음).”

스타가 되고 싶었던 무명 가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찾았다. 삶의 유일한 목표가 거품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미사리의 서태지’ ‘라이브의 제왕’이라는 수사가 따라붙지만 개의치 않는다. 우직하게 노래하는 ‘돌쇠’일 뿐이다. 2월에는 대구, 3월에는 전주에서 콘서트가, 5월에는 서울에서 디너쇼가 이미 예정돼 있다.

“내가 노래하면서 바라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제 노래를 듣는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열심히 할 거예요. 전 그게 있어요, ‘돌쇠 정신’. 그것만은 잊지 않아요(웃음).”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원상희 장소 협찬 / 서울 구의동 ‘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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