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이혼 후 싱글맘과 배우로 살아가기까지의 인생 스토리”
기껏 ‘본드걸’ 외에 내세울 만한 이력이 없었던 무명 배우 테리 해처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날아들었다.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오디션 제안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못 가요”. 만약 정말 이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땠을까? 한물간 중년 배우에 두 번의 이혼을 경험한 가난한 싱글맘. 성공보다 실패에 더 익숙했던 그녀가 들려주는 희망 메시지를 전한다.
한물간 중년 배우가 제2의 전성기에 접어들기까지
“‘위기의 주부들’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 할리우드의 여느 중년 여배우들처럼 사실 저도 한물간 처지였어요.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오리라고는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았죠.”
테리 해처는 ‘위기의 주부들’에 캐스팅되기 전까지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그녀에게 실패는 친근한 단어였다. 어쩌다 캐스팅 후보에 오르더라도 “더 젊은 배우를 좋아할 거야. 금발 미녀를 찾겠지. 왼손잡이를 더 선호할걸”이라고 단념했다. 섹시 스타나 본드걸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위기의 주부들’ 캐스팅 바로 전 그녀는 ABC 시트콤 오디션을 보았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더구나 이 실패로 그녀는 ‘위기의 주부들’ 오디션에 서지 못할 뻔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연기를 해냈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어요.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죠.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캐스팅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돌아 제 귀에도 들어왔어요. 그날 오디션장에 있었던 누군가가 내 성깔이 못됐다는 소리를 했다더군요. 제가 건방이나 떤다며 콧대가 세다고 했다는 거예요.”
배역을 따내지 못한 것보다 더 큰 모욕이었다. 그녀는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는 말인가?’ 자책하며 18시간 내리 울기만 했다. 눈이 부어올라 잘 떠지지도 않을 때쯤 ‘위기의 주부들’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못 가요”였다.
“다시 ABC 제작진들 앞에 나설 생각을 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답답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쪽에서 오디션을 일주일 연기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일주일 동안 마음을 다잡고는 오디션장을 찾아갔어요. 그리곤 오디션에 앞서 그곳에 있던 시트콤 제작진들에게 메모와 과자를 돌렸어요. ‘지난번 오디션에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오디션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그러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 집중할 수 있었죠.”
수전 마이어 캐릭터를 고려한 노메이크업에 청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오디션을 치렀다. 같은 처지에 있는 싱글맘 캐릭터를 잘 살린 연기는 제작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즌 3까지 방영된 ‘위기의 주부들’의 엄청난 인기는 한국까지 상륙했고, 골든글로브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 등 배우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림과 동시에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두 번의 이혼, “나도 수전처럼 남자 보는 눈 없어”
테리 해처는 바텐더와 댄서를 차례로 사귄 뒤 스포츠센터에서 만난 트레이너와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8개월 후 이혼했다. 이후 그녀는 영화배우 존 테니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 사이에 딸 에머슨을 낳았지만 9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4년 전 이혼했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쉬운 결혼과 이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혼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 생활 동안 일을 팽개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녀가 평생 모은 재산의 절반을 썼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혼하면서 그에게 위자료까지 주어야 했다. 그녀는 9년간 돈을 벌면서 아이까지 키우느라 허덕였다.
“이혼만 하면 당장 정신이 나간 듯한 상태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맑은 정신으로 에머슨(딸)을 키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끝장난 결혼이 주는 감정은 하루 이틀 사이에 떨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고통이 계속될 것 같아 우울했어요. 9년 동안 결혼 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직업도 없었고, 은행 잔고는 줄어가고 있었어요.”
이혼 후 그녀는 우울증과 낙오자라는 생각에 시달렸고, 매일 부엌 바닥에 앉아 울었다. 그녀에게는 딸도 있고, 친구도 있었지만, 자신의 문제는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았어요.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는 걸요. 이것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어요. 우울한 기분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내’뿐이죠.”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염문에 시달린다. 최근에는 영화감독 스티븐 케이와 다정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고, ‘맥가이버’의 주인공 리처드 딘 앤더슨, 제임스 우즈, 제임스 와일더, 딘 케인, 가수 마이클 볼튼 등과도 핑크빛 스캔들이 났다. 그러나 싱글맘인 그녀에게 남자는 여전히 힘든 대상이다. 그녀는 ‘위기의 주부들’의 수전과 닮은 점에 대해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복잡하고 어둡고 불안한 저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을까봐 두렵긴 해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괜찮은 남자들은 이미 임자가 있으니까요. 아이가 딸린 저를 감당하지 못하는 남자를 만날까봐 두렵고 그도 저처럼 끝나버린 결혼 생활로 인해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지고 있을까봐 두렵네요.”
그녀는 인기와 더불어 갑작스러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매일 파파라치에게 시달리며, 잘못된 기사에 오해받거나, 성형 권유나 유혹을 받는다(그녀는 몇 년 전부터 보톡스를 맞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싱글맘으로서도 만만치 않다. 완벽한 엄마를 꿈꾸지만 그 강박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힌다. 지금은 배우로서 정상의 위치에 있지만 혹시 이 배역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만약 다시 부엌에 퍼질러 앉게 된다면, 그건 아마 부엌 바닥을 대청소하는 날”이라 말한다. 곧 절망이 온다고 해도, 그녀는 정말 수전처럼 해맑게 웃으며 다시 일어설 것이다.
■글 / 두경아 기자 ■참고 서적 / 「인생의 스위치를 다시 켜라」(테리 해처, 사람과 책) ■사진 / 사람과 책,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