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대한 열정 & 고마운 아내와 소중한 아들, 딸 이야기”
2008년 1월, 공중파 드라마 중 최고의 화제작은 KBS-1TV ‘대왕 세종’이었다. 첫 회가 방송되기 전부터 화제더니 방송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요즘, 30회를 연장할 것이라는 소리가 나돈다. 드라마 속 강상인 역으로 출연 중인 정흥채를 만났다.
드라마 ‘대왕 세종’의 촬영 스케줄 덕분(?)에 어렵게 정흥채(44)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촬영 스케줄이 빠듯해 힘들겠다”고 하자 “그렇죠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정흥채는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당선인의 지원 유세를 펼쳤다. 그의 정치 소신에 대해 궁금해하자 “이 당선인을 지원한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기 인생 20년, 식지 않는 열정
정흥채는 지난 1월부터 ‘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다. 그는 궁궐 경호를 맡은 내금위장 강상인 역으로 등장한다. 강상인은 왕자의 난 때부터 태종을 도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 공을 인정받은 강상인은 세종 1년, 병조참판(지금의 차관급)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병권을 잡고 있는 상왕(자리를 물려주고 들어앉은 임금) 태종에게 병무에 관련된 사안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돼 결국 죽게 된다.
‘대왕 세종’ 촬영은 수원 KBS 드라마 센터를 비롯해 문경, 부안, 전주 등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며 하고 있다.
“아직은 제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주연 배우에게 맞춰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힘든 부분이 있어요. 데뷔 초반에는 주연 배우 위주로 돌아가는 상황에 부딪치면 자존심이 상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연극하면서 그런 부분은 많이 다져졌어요.”
그는 더 이상 배역의 비중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은 주연인지, 조연인지, 단역인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는 그저 자신이 맡은 역할을 따라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가 연극 무대에서 활동한 것까지 포함하면 20년 넘게 배우로 살고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늘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만 하면서 살 수 있겠어요. 그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그 모든 걸 승화시키는 거죠.”
사실, 2004년 방영된 MBC-TV 드라마 ‘영웅시대’의 차지철 역만 해도 그렇다. 당시 한 가정의 가장,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악역’ 차지철을 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안 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갔는데, PD가 ‘정말 악역처럼 보인다’고 하는 바람에 하게 된 거라고.
“세상의 어떤 일이든 힘든 건 마찬가지예요. ‘나 힘들어’라고 이야기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힘든 가운데서도 배우로서 성취감을 찾고,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정흥채는 현재 가족과 떨어져 산다. 무용가이자 청운대 방송연기학과 교수인 아내 배혜령씨와 아이들은 청운대가 있는 충남 홍성에 있고, 그는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지낸다. 결혼을 좀 늦게 했기에 그의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생이다. 아들 찬학이는 열 살, 딸 예진이는 아홉 살이다.
“원래는 서울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아내가 강의 후에 학생들 연습하는 걸 봐주고 서울에 오면 너무 늦는 거예요. 아이들이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고 힘들어해서 이사를 갔죠. 그렇게 지낸 지 4, 5년 정도 됐어요. 정말 힘들고 외롭다고 느낄 때면 언제라도, 가족들을 보러 집으로 내려갑니다.”
아내와 두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정흥채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휴대폰 사진과 아이들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던 그는 “어떤 때는 아이들이 보낸 문자를 읽다가 눈물을 글썽거릴 때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정흥채는 무뚝뚝한 편이다. 성격을 고치려고도 해봤지만 그게 마음먹은 만큼 쉽지는 않았다. 편하게 이야기하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척 엄하셔서 아버지와 편하게 이야기 나눈 적이 별로 없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게 좀 서툴러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제 또래 되는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더라고요. 제가 아들과 좀 더 편안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 아들 세대는 나아질 것 같아요. 마음은 정말 따뜻한데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니 안타깝죠.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하는 저도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무뚝뚝한’ 정흥채를 위해 지면으로나마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진지한 말을 풀어놓았다.
“아내에게는 항상 고맙고, 또 고맙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못난 나를 믿고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고요. 찬학이는 요즘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엄마, 아빠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의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예진이는 오빠하고 싸우는 걸 줄였으면 해요. 새해에는 찬학이와 예진이가 좀 더 서로를 감싸주는 남매가 되길 바라요.”
아이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
정흥채는 살갑지는 않지만 자상한 아빠다. 시간 나는 대로 집에 내려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 아들하고는 오목, 바둑을 두거나 검도를 한다. 한자 시합도 한다. 그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천자문이 놀이기구가 돼버려서 가끔은 아들에게 실력이 달릴 때도 있다”며 웃는다. 그의 딸에게 정흥채는 ‘놀이기구’나 다름없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빠, 팔 들어!”라고 한 뒤 매달리는 게 딸의 특기다.
“아이들이 연년생이다 보니, 둘 다 아빠의 정을 충분히 못 받은 것 같아요. 큰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더 받아야 하는데, 동생이 태어나서 그걸 빼앗긴 거잖아요. 작은아이 역시 제가 같이 있어주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부족함을 느낄 테고요.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에요.”
정흥채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교육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자신이 일하는 분야가 문화예술 쪽이다 보니, 예술 교육에는 더 큰 관심이 간다고. ‘예술 교육’에 관련된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예술 교육이라는 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연극을 한번 예로 들어볼게요. 요즘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남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늘 담을 쌓고 그 안에서만 살죠. 하지만 연극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배역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 돼요. 자기 표현력도 늘고, 상대방을 배려하게 되고, 팀워크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는 거죠. 국가적으로 예술 교육을 위한 뿌리가 마련되면 좋겠어요.”
사람 냄새 나는 연기자 되고 싶어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연기를 해왔으니 웬만한 배역은 전부 해봤을 터였다. 그래도 특별히 해보고 싶은 배역 한두 개쯤은 있을 듯해 질문을 했다.
“보통 어떤 작품에 들어갈 때 해보고 싶은 배역은 많이 있어요. 그 가운데서 승부수를 던지죠. 어떤 배역이든 간에 제 모든 걸 바쳐서 할 수 있을지를 판단해보는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 냄새 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좋아하는 액션도 하고 싶고요. 한때는 제일 쉬운 게 멜로라고 생각했는데, 이 넓은 등 때문에 멜로가 안 되네요(웃음). 살 좀 빼서 멜로 연기도 하고 싶어요.”
정흥채의 가장 큰 꿈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가족 모두가 자기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정흥채 역시, 그의 평범한 꿈이 그 무엇보다 이루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미리 포기할 마음은 없다. 시도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