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괴로움은 언제나 있죠. 하지만 그건 하나의 숙제일 뿐이에요”
누가 오래된 노래를 촌스럽다고 하는가 좋은 노래는 늙지 않는다. 2008년 겨울 정훈희 를 다시 들었고 이 고운 노래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왕년의 정훈희’는 없다
누군가는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다. ‘7080’은 하나의 브랜드가 됐지만 정작 그 시대의 가수들은 새로움을 노래하지 않는다고. 추억 장사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모두 ‘왕년’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고.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자극하는 것은 추억이고, ‘왕년’에 머무는 가수도 있다. 과거의 영광이 짙을수록 깊이 빠질 수 있는 달콤한 함정이다.
‘열린음악회’나 ‘가요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간간이 다른 가수의 앨범에 수록된 그의 노래가 더 반가웠다. 진행형의 정훈희를 만날 수 있었다.
윤상 4집에서 정훈희는 ‘소월에게 묻기를’을 불렀다. 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노래는 아니다. 타이틀곡은 ‘이사’였다. 그러나 윤상의 앨범을 통째로 감상한 사람들은 정훈희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20대나 50대나 마찬가지다.
작곡가 이영훈씨의 노래를 묶은 컴필레이션 앨범 ‘옛사랑 1집’에서는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을 다시 불렀다. 담담한 멜로디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나 이제 후회 없다’고 담담하게 노래할 줄 아는 가수가 필요했다. 사랑도, 아픔도 알고 있는 가수가 회상하듯 불러야 했다. 정훈희는 세 번 부르고 녹음을 마쳤다.
정훈희는 슬픈 노래를 불러도 울지 않는다. 한(恨)을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내 목소리에는 색깔이 없다’고 말한다. 심수봉처럼 절절한 목소리도 아니다.
“나는 심수봉씨, 김수희씨 노래를 들을 때 한국적인 것을 느껴요. 어떤 한(恨) 같은 그런 것. 저는 색이 없어요. 그냥 자금자금 부르는 가수니까(웃음).”
정훈희의 조카인 가수 제이(J)의 최근 앨범에는 함께 부른 ‘8318’을 수록했다. 지난 2000년 발매된 제이 2집에 수록된 곡이다. 제이의 알앤비(R&B)를 정훈희가 불렀지만, 그렇다고 정훈희가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선명하게 들리는 가사, 넘치지 않는 감정으로 노래하는 이별은 그래서 더 슬프다. ‘자금자금 부른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사랑과 이별을 녹여낸 그의 보컬은 절절한 노랫말을 일상으로 초대한다.
“가수는 그런 것 같아. 처음에 노래할 때는 아주 매력적이었던 오늘의 포인트가 내일은 단점이 될 수 있거든요. 잘 ‘우는’ 가수가 있다고 해요. 그러면 1절을 부르면서도 딱 한 소절만 울어야지. 장점이 있으면 딱 한 번만 써야 하는데 요즘은 작곡가도 울어라 제작자도 울어라 하니까 그 테크닉을 얼마나 썼는지 잊는 것 같아요(웃음).”
TV에는 잘 우는 가수들이 널렸다. 남자고 여자고 흐느낀다. ‘소몰이 창법’은 우스개가 됐다. 가수는 노래하는 내내 울지만, 듣는 사람은 울지 않는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둘 중에 한 명이 병에 걸리거나 조폭과 싸우다 죽는 ‘슬픈’ 뮤직비디오도 소용없다.
“가수 목소리도, 스타일이 유행하면 다 그 스타일로 가죠. 그래서 요즘 엔지니어들이 힘들어해요. 하루 종일 믹싱하면서 우는 소리 듣고 있으니까(웃음).”
지금 정훈희는 20년 만의 독집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30년 만의 독집이고, 20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김현철, 유영석 등 젊은 작곡가들이 힘을 보탠다.
“항상 노래하면서, 나는 급한 것 없었어요”
노래하지 않아도, 정훈희의 말투에는 드라마틱한 음률이 있다. 흐느끼지 않아도, 그 큰 눈에는 발화하는 단어가 담고 있는 만큼의 감정이 실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처럼 붉어지던 눈은 다음 순간 웃음이 됐다. 맑은 고음의 웃음소리가 짐작케 하는 낙천성. “내 노래는 한 맺힌 소리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 55세 여자의 담담함. 정훈희는 어렸을 때부터 땅을 치고 우는 한국 영화의 주인공이 싫었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 따라서 극장에 가잖아요. 그러면 한국 영화는 막 땅을 치면서 울어요. 모든 영화배우들이 슬픈 장면에서는 땅을 치고 울었어요. 외국 영화는 소리 없이 울었어요. 눈물 없이. 그리고 엄마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파티’ 하면 막걸리 잡숫고 바닥에 퍼져서 우는 거, 난 그게 제일 보기 싫었어요(웃음).”
어린 정훈희는 ‘난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 한(恨) 같은 것은 안 품을 거야’라고 결심했다. 노트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구절을 썼다.
“항상 그랬어요. 나는 교회 다니면서 성경 구절은 몰라도 그 말은 삶의 모토가 됐어요. 지금도 울면 소리를 안 내요. 코를 훌쩍거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우는지도 잘 몰라요.”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던 지난 몇 년도 그렇게 살았다. 부산에는 카페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밭에서’가 있다. 카페의 발코니는 바다와 닿아 있다. 대한(26)과 민국(21) 두 아들을 키우며 남편 김태화(59)와 함께였다.
“나는 급한 것 없었어요. 발코니에서 노래하면서. 뒤에는 하늘도 있고, 바다도 있고. 비가 부슬부슬 오면 태화씨랑 노래하고. 그런 맛에 또 몇 년이 지나가고. 우리 둘이 그런 얘기했어요. 태화씨나 나나, 언제 노래 불러도 무대에 서면 정훈희니까, 김태화니까. 나 같은 목소리도 없고 그런 노래도 없고.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니까 언제든 노래하면 돼. 그런 마음이었어요.”
“이 앨범을 윤상씨가 듣고 ‘한 곡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던 거죠. 그리고 윤상씨 곡을 들은 윤종신씨가 ‘저도 한 곡’ 하고 나섰고(웃음). ‘정훈희라는 가수가 이런 노래를 이렇게 하는 구나’하고 알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최초의 기억은 지난 1989년, 남편 김태화씨와 ‘우리는 하나’를 부르던 모습이었다. ‘우리 남편은 청바지만 입는다’며 웃는 모습은 오늘과 다르지 않았다. 일산 라페스타에서 오픈 준비 중인 라이브 카페에는 김태화씨도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 쓴 그는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 1978년 ‘꽃밭에서’ 이후 30년을 술회하는 정훈희의 목소리는 노래처럼 담담했지만 그 과정이 마냥 수월하지는 않았다.
“1979년에 태화씨 만나서 연애하다가 ‘같이 살아볼까?’해서 3년 같이 살다가 애 하나 낳고. 혼인신고 하고 3년 더 살다가 결혼식 하고.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방송은 많이 안 했지만 항상 노래하면서(웃음).”
마흔 살 무렵에는 감당하기 힘든 허무가 찾아왔다. 이제는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 7~8년이 지난 결혼생활도 삐거덕거렸다. ‘오늘 헤어질까 내일 헤어질까’를 고민했고 그냥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다.
“바싹 말랐었어요. 체중이 45kg 정도밖에 안 나갔으니까. 내 안에 사랑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나를 버렸던 거죠. 남편, 자식도 꼴 보기 싫었어요. 그러다 옛날에 주일학교에서 노래하던 생각이 나서, 종교를 갖고 다시 사랑을 찾았죠(웃음).”
‘우리는 하나’는 둘째 아이를 낳고, 40대 초반의 허무를 극복하고 부른 노래다. 결혼 10주년이 되던 해, 다시 남편의 눈을 바라보며 ‘당신을 사랑해요, 너무나’라고 노래할 수 있게 됐다.
“나 굉장히 힘들었어요. ‘우리는 하나’ 나오기 전에. 그걸 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슬픔과 괴로움은 언제나 있죠. 하지만 거기 빠져서 지고 마는 게 아니라,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건 하나의 숙제일 뿐이니까요.”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만든 가수협회
지난 2005년부터는 가수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선후배 간의 화합을 위해 중간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는 선후배 간의 교류가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가수는 다른 공연 분과에 비해 ‘개인 플레이’가 강할 수밖에 없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40년간 연기자의 방송 출연료가 100% 이상 오르는 동안 가수들의 출연료는 10% 인상에 그치는 등 실질적인 복지 차원의 문제도 제기됐다. 협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정훈희가 전면에 나섰다.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려 후원금을 모았다.
“많은 가수들이 가수협회를 만들자고 했지만 모이지 않았어요. 뿔뿔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하나가 되지 않았죠. 후배들한테 전화해서 설명했어요. ‘우리를 대변할 단체가 없다’고. 한 달 만에 1억 6천만원을 모았어요. 가수협회가 허가도 받기 전이라서 제 개인 통장이었는데도, 3백~5백만원씩 ‘팍팍.’ 저도 놀랐고, 사무실에서도 놀랐어요(웃음).”
수십 명의 가수들이 십시일반으로 기부한 돈은 2억 정도. 가수협회는 지난 2007년 3월 29일에 사단법인이 됐다. 5백만원을 넣고 만든 정훈희의 통장은 이제 가수협회 최초의 ‘역사적인’ 통장이 됐다.
“‘비’ 한 명이 콘서트를 하면 수만 명이 모이죠. 그렇게 가수는 ‘톱’ 한 명만 있으면 돼요. 하지만 연기자 두세 팀이 보이콧을 하면 드라마를 만들 수가 없죠. 가수는 그게 안 돼요. 그래서 뭉쳐야 된다는 생각도 없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제 살 제가 깎아 먹고 있던 거였어요.”
오픈을 앞두고 있는 라이브 클럽도 신인 가수와 힘들게 살고 있는 가요계 선배들을 위한 무대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낮에는 1만~3만원 정도를 입장료 겸 커피값으로 받고 그날 수입은 무대에 섰던 가수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식이다. 지난 1월 20일에는 ‘홍콩아가씨’를 부른 가수 금사향씨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이렇게 모인 돈은 봉사 활동 기금으로도 활용한다.
“김태화씨가 음향에 욕심이 많아요. 지금 갖추고 있는 시스템도 한국에 두 대뿐인 거예요. 가수가 노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노래하고. 설 무대가 없는 친구들을 불러서 공연도 하고.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는 가수니까 노래만 하라’는 거죠. 그 돈은 좋은 데 쓰고요. 수익금으로는 기름 유출 사고로 고통받고 있는 태안을 도울 계획도 하고 있어요.”
정훈희 최초의 기립박수
작곡가 이봉조씨가 ‘안개’를 선물한 것은 정훈희가 고 1 때였다. “가시나, 쪼깐한 게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라는 이봉조 선생의 한마디는 유명하다. 이봉조·정훈희 콤비의 시작이었고, 히트곡이 쏟아졌다. 국제 가요제에서 상을 놓친 적이 없다. 도쿄국제가요제 가수상(1970년), 그리스가요제 인기상(1972년), 칠레국제가요제 3위(1975년) 등 각종 국제 가요제에서 한국의 음악성을 세계에 알렸다. 정훈희가 가수상을 수상한 70년 도쿄국제가요제에는 ‘댄싱퀸’의 스웨덴 그룹 아바(ABBA)도 참가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
박수갈채 속에서만 살아왔을 것 같은 화려한 인생. 어려움 모르고 자랐을 것 같은 곱고 얇은 선.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립박수는 국제가요제 수상과는 거리가 있다. 1977년, 군산에 있는 미(美) 공군부대에서 한 위문 공연이었다. 그 전에는 기립박수를 받은 적이 없다. 클럽에서 노래할 때 관중들은 표현에 인색했다. 방법을 몰랐다. ‘오징어를 던지는 것’이 그나마의 환호였다.
“‘언체인드 멜로디’를 불렀어요. 그냥 내 식대로 부른 거죠. 그리고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너무 당황했어요. 얼굴이 빨개져서 ‘땡큐’라고 말할 수밖에요. 군인들은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앉을 줄을 몰랐어요.”
그들은 정훈희를 몰랐지만, 감동을 표현할 줄 알았다. 당시 정훈희가 주로 섰던 무대의 관객들은 표현이 서툴렀다. ‘가수’를 천시하는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노래를 듣고 기분이 좋으면 기립박수를 칠 수 있죠. 하지만 우리는 이름 없는 사람이 노래를 얼마나 잘하든 기립박수를 치지 않았어요. 노래보다는 사람이 먼저죠.”
선선하게 노래하는 정훈희의 목소리에 욕심은 읽히지 않는다. “가수 정훈희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노래하면서, 가수들 위해서 열심히 노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욕심을 비운 자리에는 고집과 자신감이 있다. ‘돈이 되니 트로트를 하자’는 숱한 제안을 물리치면서 ‘정훈희의 발라드’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보통 때는 트로트를 많이 흥얼거려요. 남편도 가만히 노래 듣고 있다가 ‘여보 너무 잘한다’며 칭찬하기도 하고(웃음). 하지만 좀 어렵다고 제 발라드를 버리는 건 노래하는 후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꽃밭에서’를 부를 때는 소녀의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무대에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도, 이별도, 아이들 키우는 얘기도, 노래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삶과 세월은 공감을 담보한다. 정훈희의 노래는 정훈희만 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진정성. 2월에는, 데뷔 40년의 질곡이 묻어나는 가수의 새 노래를 들을 수 있다.
■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민영주 ■장소 협찬 / 일산 라페스타 ‘마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