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데뷔 12년 차를 맞은 이지훈은 ‘아직’ 자신을 정의 내리기에 조심스럽다. ‘아직’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말이 제일 적당하다.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위기를 넘기며 간절히 기도했던 바람들이 이제야 결실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이지훈은 이제까지의 삶은 자기 인생의 머리말이었다고 한다.
“핫초코 한 잔이요”.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6월 중순, 카페에서 만난 이지훈에게 마실 것을 권하자 대뜸 뜨거운 코코아를 주문한다. 시원한 아이스티가 제격인 날씨에 핫초코라니…. 빤히 쳐다보는 기자의 눈빛을 읽었는지 이내 멋쩍게 웃으며 부연 설명을 한다.
“아, 오늘 아침을 못 먹었거든요. 오후에 촬영도 많이 남았는데 열량 보충 좀 하려구요.”
지난 2007년 11월 시작한 MBC-TV 드라마 ‘뉴하트’ 2008년 2월 촬영 종료, 3~4월 음반 작업 및 KBS-1TV 드라마 ‘너는 내 운명’ 촬영 개시, 5월 일본 공연 그리고 6집 「The Classic」 발매. 쉴 틈 없이 달려온 이지훈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닌 열량이었다. 드라마 촬영과 각종 인터뷰 일정, 방송 프로그램 출연 등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음반 활동이 아쉬워 마음이 무겁다.
“4년 만에 낸 앨범이에요. 지방도 두루두루 다니며 많이 들려드리고 싶었는데, 드라마 스케줄이 빠듯해 도저히 틈이 나지를 않네요.”
주연도 아닌 조연이니까 스케줄에 큰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해 시작한 드라마였다. 그랬는데, 시청률이 상승세를 타며 이지훈의 비중도 함께 늘었다.
“강태풍이라는 캐릭터가 드라마 속 인물들을 서로서로 연결시키는 캐릭터잖아요. 감사하게도 작가 선생님께서 제 역할을 많이 키워주셨어요. 앞으로도 계속 크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음반 활동에 대한 아쉬움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수밖에 없다. 단번에 끝낼 생각을 접고 장기전으로 가기로 했다. 올가을까지 조금씩이라도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요즘은 유행가가 없어지는 추세잖아요. 예전에는 한번 음반을 내면 1년 이상 사랑받는 노래도 많았는데, 대중의 취향이 변하는 속도가 10년 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되게 빨라졌어요. 금방 떴다가 금방 지죠. 많이 아쉬워요.”
몇 해 동안 가수가 아닌 연기자로 대중을 만난 이지훈이지만 가수의 끈을 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가수로서 그동안의 공백은 그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난 1996년 배명고 2학년 시절 ‘왜 하늘은’으로 데뷔한 이지훈은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가 그렇듯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주민등록등본 발급이나 은행 업무 등 일반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조차 매니저의 도움을 받고 컸다. 2004년에야 그는 데뷔 후 처음으로 소속사에서 독립해 진정한 ‘홀로 서기’를 경험했다.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이 이지훈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번 앨범은 그러한 과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노래만 하고 나머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맡겼던 지난 앨범들과 달리 이번 앨범에는 앨범 디자인과 뮤직비디오, 작곡가들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과정 곳곳에서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공을 들여 만든 음악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붓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에게 주어진 일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감사하다. 연기와 노래, 버라이어티 영역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그에게 ‘주종목’을 물었다.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열정이 있죠. 연기를 할 때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때도 똑같아요. 저를 찾아주시고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저를 원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죠.”
아이돌을 넘어서며
어느덧 데뷔 12년 차다. 최고참급 아이돌이자, ‘아이돌계의 원로’라고 하니 펄쩍 뛰면서 ‘중견’이라고 해달란다.
“연기자로서는 아직 신인이죠. 가요계에서는… 아, 한참 선배구나. 그러고 보니 요즘은 방송국 대기실에 있으면 찾아와서 인사하는 후배가 많이 늘었어요. 속으로 ‘선배 대접 해주는구나. 다행이다’라고 생각하죠(웃음)”.
아무래도 이제 막 데뷔하는 가수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하늘 같은 선배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다. 원조 아이돌로서 자부심이 너무 없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지훈은 사람을 만날 때 조금 편해진 것, 그리고 관계에 대한 정의가 변한 것 빼고 12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의리’ 빼면 시체였어요. 친구의 부탁이라면 무리해서라도 꼭 들어주고 한밤중에 부르면 지방까지 달려가고 그랬죠. 지금까지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의리를 지켰다면 이제는 내 자신을 돌보면서 의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해요.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친구 사이에도 그런 게 존재하거든요. 어느 정도 레벨이 맞춰져야 그 관계가 지속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자꾸 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그들에 비해 내가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그 관계는 잘 안 되는 거더라구요. 이제 나에게 좀 더 투자하고 내실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전에는 친구니까, 친하니까 그저 덮어두고 저 혼자 가슴앓이 했던 적이 많았어요. 그것마저 이해를 못하는 친구라면 그건 우정이 아니겠죠. 다들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인데 제가 몰랐던 거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두 사람이 있다. 강타와 신혜성이다. 연예계에서 친하기로 소문난 이들 3인방은 비슷한 나이에 데뷔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서로에게 기댔다. 단, 각자 결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군말 없이 밀어주는 스타일이다.
이지훈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연예계 사조직이 ‘79클럽’이다. 박경림, 이기찬, 이효리, 이수영 등 79년생 또래 가수들의 친목 모임인 ‘79클럽’은 얼마 전 그가 방송에서 밝힌 것처럼 현재 ‘와해’된 상태다.
“한 3~4년 전에는 자주 만났어요. 한 달에 두세 번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술 마시며 수다도 떨고 그랬는데, 지금은 뜸해졌죠. 다들 술을 좋아하는데 전 술을 안 마시거든요. 주로 정리하고 뒷수습하는 역할을 맡았죠(웃음)”.
한참 혈기 넘치는 젊은 남녀가 모였으니 한번쯤 그들 중 누군가와 사귀어볼 생각을 해봤을 법한데 이효리도 이수영도 여자로 안 보였단다. 한번 친구로 틀을 정하면 변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친구,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는 이성은 절대 연애 상대로 승격되는 일이 없다. 방송에서 비춰지는 ‘바람기’ 다분한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다정다감하고 꼼꼼히 신경 써주는 성격이라 많이들 그렇게 보세요.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 여자 좀 만나고 다녔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친구들도 대부분 남자예요.”
정작 자신은 지나치게 내외하는 편이라며 그간에 쌓인 이미지에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얼마 전 있었던 신봉선과의 스캔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봉선이한테 미안하다는 문자메시지까지 보냈어요. 평소 방송을 보면서 호감이 있었거든요. 마침 같이 녹화를 하게 돼서 얘기를 했던 건데,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죠. 신봉선씨도 여기저기서 얘기를 많이 들었나 보더라구요. 이래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말조심을 해야 해요(웃음)”.
이지훈은 언제나 느긋한 모습이었다. 방송 12년 차의 관록이라고 할까. 웬만해서는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데뷔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대중들이 보기에 그는 커다란 고민이나 위기 없이 물 흐르듯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듯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비가 있었다.
“추억을 얘기하라고 하면 아무것도 없어요.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겪어야 할 일들을 겪지 못하고 일찍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간직할 만한 추억이 없는 거죠. 고등학교 때부터 돈을 벌었으니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을 수 있지만 시기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었다는 게 많이 아쉬워요.”
자신이 데뷔했을 때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연예계로 뛰어드는 후배 가수들을 볼 때 걱정스러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일찍 데뷔해 큰 인기를 얻다가 점점 그 인기가 줄어드는 것을 느낄 때 받는 상처가 클 거예요. 저도 그런 생각 많이 했거든요. 여기서 안 되면 난 뭘 해야 하나? 죽어야 하나? 상황이 주어지면 목에 풀칠하려고 뭐든지 하겠지…. 뭘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었어요.”
최고의 자리에서 꾸준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은 상위 1%다. 자신이 언제 외면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이지훈에게는 그때가 20대 중반이었다. 그때 그를 붙잡아준 건 신앙이다.
“주위 사람들이 내게 주는 위로 한마디보다 기도가 더 힘이 되더라구요. 그때 열심히 기도했던 게 또 결과로 맺어졌어요. 제가 맨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가수 출신 연기자가 드물었고 대중의 시선도 곱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잖아요. 제작자나 PD 분들도 좋게 봐주시고. 정말 인정받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했어요. 그건 그 당시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이제 좀 답이 나왔다. 드라마와 방송, 음반 활동과 뮤지컬까지 이리저리 정신없는 스케줄에도 그가 싫은 내색 한번 않고 일정을 소화하는 건 자신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언젠가 자신이 절실히 기도했던 결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서른 살이 된 12년 차 아이돌은 서른을 자신의 인생 ‘첫 페이지’라고 정의했다.
“지난 12년 동안의 연예 생활은 이지훈이라는 책의 머리말 정도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리허설 중이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이제야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알 것 같아요. 서른 살이 서론이니 본론은 마흔 살 정도 되겠죠? 결론은, 글쎄요. 가수로서는 언젠가 저도 몇 만 명 앞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요. 그게 우리나라가 될지 일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하고 싶어요. 연기자로서는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경험이 쌓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다 보면 신구, 이순재 선생님처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원상희 ■장소 제공 / 카페불록(02-322-3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