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2백65잔까지 마실 정도로 즐겼던 술 완전히 끊고,
아침마다 1시간 30분씩 운동하며 건강 지켜요”
인기 드라마 ‘박순경’, ‘사랑과 야망’, ‘3김 시대’ 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던 원로 배우 박규채. 왕성한 사회 활동을 펼치던 그가 3년 전 갑작스레 전립선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에 들어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후 꾸준한 건강관리로 언제 그랬느냐싶게 정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전립선암 수술 후,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채소 주스로 건강관리
‘강철 체력’으로 통했던 배우 박규채(70)에게 생각지도 않던 ‘암’이라는 병이 찾아온 것은 지난 2005년이었다. 워낙 건강을 자부했던 터라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어이가 없어 ‘허허’ 웃을 정도였다.
“친구를 잘 둬서 일찍 발견한 것이 천만다행이었죠. 어느 날 우연히 비뇨기과 전문의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좀 불편하다는 얘기를 했더니 검사를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조직 검사 결과 2기 전립선암으로 나왔어요. 놀라긴 했지만 어쩌겠어요. 수술을 끝내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했어요. 먹지 말라는 건 안 먹고, 하라는 것만 하구요.”
그는 수술 후 병원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철저히 지켰다. 고기를 좋아하던 식습관을 채소 위주 식단으로 바꾸고 매일 규칙적으로 소식을 실천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단호하게 끊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젊었을 때 하루에 술을 2백65잔을 마신 적도 있어요. 후배가 사단장으로 있는 전방 사단에 위문단을 만들어서 갔는데 공연이 끝나고 술을 마셨죠. 잔 수를 세본 건 아닌데, 그다음 날 듣기로는 제가 거기 왔던 2백65명의 지휘관들과 한 명도 빠짐없이 한 잔씩 마셨다고 해요. 무대로 올라가서 노래도 두 곡 했다 그러고(웃음). 그러고도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태연히 사우나에 갔지 뭐예요. 만난 사람들이 다 ‘괜찮으냐’고 난리였지.”
배고픈 연극배우 시절, 서울 한복판 명동 막소주집에서 멸치에 고추장을 안주로 동료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던 소중한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 그다. 그런 그가 건강을 위해 술을 끊었으니 ‘술, 담배 못 끊겠다’고 하소연하는 다른 이들의 말은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는단다.
“술 끊고 제일 힘든 점이 모임에 가서 괜히 사람들한테 미안하다는 거예요. 물론 ‘나 이러저러해서 술 끊었으니 나한테 술 권하지 마라’고 얘기를 하지요. 의사가 이제는 술을 조금씩 마시는 건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워낙 술을 좋아하니 자제를 못하게 될까봐 아예 입에 대지 않아요. 의사도 나한테 대단하다고 합디다. 저도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들도 의지를 갖고 반드시 끊으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박규채가 유난스럽거나 고통스럽게 건강관리를 한 것은 아니다. 술 외에는 먹고 싶은 것을 조금씩 즐겁게 즐긴다. 인터뷰하던 날도 그는 카레라이스 반 공기를 먹은 뒤, 커피 한 잔과 복숭아 한 접시를 맛있게 비워냈다. 여느 집 식탁과 별다를 것 없는 저녁이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조언한다.
건강을 되찾은 후 박규채는 각종 단체 홍보대사, 후학 양성, 문화예술계 일까지 도맡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울종합예술학교 고문, 한성디지털대학교 명예교수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은 후배들을 키워낸다는 점에서 무척 뿌듯한 일이라고 한다.
“학교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많아요. 얼굴도 잘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먼저 인사하면 참 고맙죠.”
무대와 브라운관에 모습을 비추지 않은 지는 꽤 됐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과 관심만은 아직도 펄펄 끓는다. 건강한 몸으로 연극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을 나누고, 작은 이야기라도 보탤 수 있는 요즘이 무척이나 행복하단다.
“내일은 안산국제단편영화제 준비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어요. 아직까지 나를 필요로 해 준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야. 예전에 한국 TV방송연기자협회 회장, 방송문화원 원장, 영화진흥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고 경험이 많을 것 같으니 이렇게 계속 불러주나 봐.”
특히 지난달에는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와 공직 부문에서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우리 문화를 대내외에 널리 알린 인물을 선정해 수여하는 세계평화문화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대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나한테까지 그런 상을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실은 내가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있을 때 참 열심히 일을 했거든. 바꾸고,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중간에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물러났지. 끝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굵직한 공을 많이 세웠다고 상을 주더라고. 그때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았어.”
이제는 다 잊어버린 일이라고 하지만, 박규채에게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시기였다. 소위 말하는 ‘낙하산 인사’라는 오해를 받으며 취임했지만 곧 전문성과 진심을 인정받아 노사위원장의 사과를 받아낸 일, 젊은 신인 감독들이 자유롭게 창의적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며 모두가 반대하는 ‘판권담보제’를 시행한 일, 청소년 영화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이 만든 영화를 집까지 일일이 보내준 일 등은 영화사에 남은 유명한 일화다.
“영화아카데미 코스를 확장시키고 애니메이션 파트도 새로 만들었어요. 지금의 양수리 종합촬영소도 그때 준공했지. 기계도 디지털로 다 장만하고 의욕 있는 사람들을 유학 보내 기술도 배우게 하구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갖다 놓고 자면서 푹 빠져서 일했어. 그런데도 잘려버렸어. 허허.”
개인사를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영화 진흥을 위해 1년 반을 달려왔지만, 그의 꽉 찬 열정도 정치적인 흐름을 비켜갈 수 없었다.
“51회였나, 칸영화제 인솔 때문에 출장단을 꾸려서 준비를 다 마쳤는데, 사표를 내야 한다는 거야. 다녀와서 내겠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참 자랑스럽기도 해요.”
사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설움을 겪은 대표적인 연예인이기도 하다. 연예계 최초로 야당 후보 지지 연설을 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맡고 있던 모든 방송을 그만두고 주저앉아야만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거든요. 내가 후보 지지 연설을 했지. 그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건강백서 대한민국’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바로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지금이야 연예인들이 정치적인 견해도 밝히고, 후보 지지도 드러내놓고 하지만 그땐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요. 혹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올까봐 세게 내친 거였죠.”
결과적으로 그가 지지했던 김영삼 후보는 1987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고, 박규채의 삶도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매체에서 퇴출당한 것은 물론, 운영하고 있던 배우 학원도 문을 닫아야 했다. 일이 없으니 집을 팔고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둘째 딸 내외가 계속 찾아와 ‘같이 살자’고 권유하는 바람에 지금 살고 있는 안산으로 거처를 옮겨 사위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지나간 날을 회상하던 그의 눈빛이 다소 떨렸지만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는 아니었다. 넘어지고 깨지는 세월 속에서 단단하게, 때로는 무르게 다듬어져왔기 때문일 테다.
가족의 사랑 속에서 가능한 건강한 인생
오르락내리락 파고를 따라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에게 가장 힘이 되어준 사람은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가족이다. 배곯던 젊은 시절에도, 정신없이 일에만 몰두하던 시기에도, 건강을 잃고 위기를 겪었을 때도 한결같이 그의 곁을 지켜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참 고생을 많이 시켰죠.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요. 큰딸은 뉴욕에 살기 때문에 작은딸 내외와 아들을 자주 만나요. 시간만 나면 손자 녀석들과 여행을 다녀요. 내가 전국적으로 강의를 많이 다니니까, 가서 ‘좋다’ 싶으면 전화를 하거든. 그러면 아이들이 달려와요. 큰 온돌방을 하나 잡아두고 다같이 살도 부비고, 경치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요.”
며칠 전에는 둘째 딸이 살고 있는 공주에 내려갔다가 “올여름에는 우리 어디 가요?”라고 묻는 손자들에게 제주도에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왔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이 걱정될 때도 있지만, 항상 가족에게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믿고 산다. 자식들이 직접 써준 ‘감사장’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이들 부부의 보물 1호다.
평생교육과 사회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는 박규채는 앞으로도 꾸준히 관련 활동을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30년 넘게 몸담아온 한국사회교육협회, 한국평생교육복지진흥회에 자문위원으로 힘을 보탤 것이고, 평생교육 특강도 꾸준히 하고 싶다. 36년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올 만큼 글 쓰는 일도 좋아하는 그는 요즘에는 일정이 없는 날이면 서재에서 시를 쓰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사실 제 일은 정년이 없어요.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고 사회적인 활동도 계속하고 싶어요. 가족들과 제자들과 좋은 사람들과도 이렇게 자주 만나고. 그러려면 건강하게 살아야겠죠. 전립선암이라는 큰 고비도 넘었으니, 이제 더욱 건강한 삶이 펼쳐질 겁니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