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싶어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배우들이 맛있게 먹는 진수성찬. 차마 먹기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데커레이션. 한 번쯤 ‘저 음식들은 도대체 누가 만드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숨은 공로자는 바로 ‘음식감독’이었다. 최근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인기를 끌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음식감독, 김수진 원장을 만나본다.
‘식객’ 김래원, 베테랑 주부를 뛰어넘는 칼 솜씨 선보여
과거에는 소품팀이나 미술팀에서 극중 등장하는 음식을 담당했다. 김수진 원장은 우연한 계기로 음식감독 타이틀을 달게 됐다고 한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 음식을 제가 담당했어요. 연산군의 연회에 잔치음식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음식은 카메라에만 잡힐 뿐, 배우들이 실제로 먹는 일은 별로 없었어요. 별 생각 없이 먹는 장면에 앞서 뜨거운 음식을 준비했는데 감우성씨가 ‘앗, 뜨거워’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죠. 연기자가 먹는 장면을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온도’와 음식을 먹는 ‘동선’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렇게 음식감독으로 첫 인연을 맺었죠.”
그뒤 허영만 화백 원작의 만화 좥식객좦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다시 음식감독을 제의받았고, 그렇게 해서 드라마 ‘식객’에까지 인연이 닿았다. 김 원장은 촬영에 앞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 외에도 배우들이 요리하는 자세까지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 ‘식객’ 촬영을 앞두고는 남자배우들을 따로 불러서 칼질 연습까지 시켰다. 하지만 드라마 ‘식객’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단다. 요리의 달인으로 출연하는 김래원, 권오중, 원기준 등 남자 주인공들의 칼솜씨가 워낙 좋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들이 무척이나 요리를 잘해요. 특히 혼자 살고 있는 김래원씨는 요리를 즐기더라고요.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요. 칼질하는 솜씨가 웬만한 주부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나무랄 데가 없어요(웃음).”
‘프로’ 배우들이 능숙한 솜씨를 뽐내더라도 김 원장은 항상 “조심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혹 배우들이 요리하다가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탓이다.
최고의 음식은 고추장쇠꼬리찜과 불고기!
‘식객’은 그동안 만찬과 궁중요리부터 서민들이 즐겨 먹는 생태탕, 김치볶음밥 등 수많은 산해진미로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중에 김 원장이 꼽는 ‘최고의 음식’은 바로 요리 경합에서 추억의 불고기를 요리한 김래원을 가볍게 누른 권오중의 ‘쇠꼬리찜’이다.
“쇠꼬리찜은 제가 직접 창작한 요리예요. 외국인도 즐겨 먹을 수 있도록 고추장에 생크림을 넣어서 부드럽고 매콤한 쇠꼬리찜을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작가들도 좋다고 야단이더군요. 저도 정말 만족스러웠어요.”
반면, 가장 아쉬웠던 요리로는 ‘민어부레순대’를 꼽았다. 김래원이 민어의 부레를 이용한 순대를 만드는 장면이었는데, 촬영에만 급급하다 보니 제 맛을 살리지는 못했던 것. 예쁜 모양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민어 부레와 성게 알 등을 이용하다보니 비린 맛이 무척 강했던것. 김래원 역시 ‘제일 맛없는 음식’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역시 요리전문가답게 김 원장은 촬영을 마친 뒤 즉석에서 소스를 개발해 맛있는 민어부레순대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식객’에 나오는 요리들의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한국의 전통 장류인 고추장, 된장, 간장을 많이 이용한다는 점이다. 김래원이 만든 ‘추억의 불고기’ 역시 오래 묵은 간장소스가 주 무기였고, 조수 석동이가 만든 ‘쇠고기말이쌈’도 간장을 소스로 이용했다. 또 김래원이 남상미의 엄마를 위해 만든 고추장 두부전골, 고추장 비듬나물, 갈비찜과 극중 장 회장이 어머니가 끓인 것과 똑같다며 감탄을 했던 생태탕도 모두 장으로 맛을 낸 음식들이다.
“저는 고추장, 된장, 간장 등 우리의 장류만큼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는 식재료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이것저것 양념을 넣어도 우리의 장맛이 없으면 우리 음식 특유의 맛을 낼 수가 없거든요. 뭔가 빠진 것 같고, 허전하죠. 우리 장은 정말 기가 막힌 양념이에요.”
‘식객’의 초반에는 만찬 중심의 화려한 음식이 주를 이뤘다면, 중반에는 쇠고기로 만든 음식이 시선을 끌었고, 후반으로 갈수록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등장하고 있다. 극 후반에는 ‘한국의 장’에 대한 스토리가 더욱 비중 있게 다뤄질 예정이다. 앞으로 ‘전복조림, 전복초, 전복샐러드’를 비롯해 고추장 소스를 이용한 장어구이, 고추장 회덮밥, 간장소스를 활용한 감식초 송어튀김 등 이름을 듣기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맛깔스러운 요리가 드라마 후반부를 장식한다고 김 원장이 귀띔한다.
“한국 음식은 우리가 더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장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발전시키면 세계화는 문제없을 거예요. 특히 고추장, 된장, 간장은 소스로 만들어 샐러드 소스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쓰임새가 무궁무진합니다. 마침 애용하는 장류를 만드는 ‘해찬들’에서 드라마 ‘식객’을 후원하고 있어요. 함께 손을 잡고 한국적인 소스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 중이에요. 어쩐지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소스가 나올 것 같지 않아요?(웃음)”
촬영 후 버려지는 음식 보면 눈물이 글썽
그동안 촬영을 위해 수많은 요리를 만들고, 또 버리면서 김 원장은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화려한 음식이든, 소박한 음식이든 일단 준비해서 촬영장에 내놓으면 하나같이 자식 같다는 것. 특히 김 원장과 푸드 앤 컬처 스태프 20여 명이 수 시간을 공들여 만든 음식이 방송에서는 불과 3초 정도 스치듯 지나갈 때는 정말 가슴이 미어지더란다. 촬영이 끝나고, 세팅했던 음식을 모두 버릴 때도 마찬가지. 왜 먹지 않고 그냥 버리는 것일까 궁금했다.
“음식을 조명 아래에 내놓으면 먼지도 많이 앉는 데다가 맛있게 보이기 위해 기름과 젤라틴을 덧바르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요. 소중하게 만든 음식들을 버릴 때는 아까워서 정말 눈물이 나요. 그렇지만 혹시 생길지도 모를 일에 대비해 준비해놓았던 음식은 스태프들과 맛있게 먹죠.”
내년 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미인도’와 ‘쌍화점’의 크레디트에서도 음식감독 김수진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음식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한류를 확산시키고,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고의 식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우리 음식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맛이라는 거 아시죠? 한국을 알리는 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겠어요. 제가 그 선두에 서고 싶습니다.”
음식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와 같다. 드라마 ‘식객’의 주인공 성찬처럼, 김 원장이 한국의 맛으로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인성욱, CJ 제일제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