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코미디가 그립다. 일회성 말장난 개그가 아닌 인생사의 단면을 담는 ‘콩트 코미디’ 말이다. 이런 생각은 필자뿐이 아닌지 요즘 1990년대 활약하던 개그만 최양락, 이봉원 등이 다시 TV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길 빈다. 그리고 한 명의 그리운 이가 떠오른다. ‘네로 25시’에서 딸기코 분장을 하고 “여기 골뱅이 하나 추가요~” 라고 외치던 개그맨 정명재. 그의 혀 꼬인 말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현재 일산에서 이벤트 사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골뱅이 추가~” 하던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예상하며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점잖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중한 인터뷰 요청에 “이슈거리가 있겠냐”며 되묻는다. 개그맨들은 평소에도 마냥 유쾌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지한 성격이 많은 편이다. 기대는 무너지나 무대 밖까지 웃음을 기대하는 건 우리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사람을 털끝 하나 대지 않고 웃게 만드는 것이 어디 예삿일인가. 약간의 고민을 안고 정명재(51)를 찾았다. 그를 보자마자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샘솟았다. ‘네로 25시’에 출연하던 당시 그 모습 그대로 정명재, 페트로니우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산이 공기가 참 좋아요. 맛있는 식당도 많구요. 옛날에 사업에 실패해서 거의 쫓기듯 왔는데 살면 살수록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정명재는 동양방송 공채 개그맨 2기 출신으로 고(故) 김형곤, 장두석, 이성미, 이하원, 조정현 등과 동기다. 당시 수천 명이 응시한 ‘제2회 TBC 개그콘테스트’에서 금상을 받고 개그계에 데뷔했다. 199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점점 사라지면서 현재는 일산에서 각종 단체 행사를 기획하는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개그콘테스트에 나간 때를 잊을 수 없어요. TBC 개그콘테스트가 6월 5일이었어요. 저는 보름이나 지난 신문을 보고 대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만약에 상을 타면 상금으로 술이나 사 먹자는 생각으로 오후 2시부터 쓰기 시작한 개그 원서를 제출했어요. 그때 원서 마감이 5시였거든요. 1차 통과하고 결국 마지막 3차 본선에서 금상을 수상했어요. 그게 이 길로 들어선 계기였죠.”
당시 코미디언이 되는 길은 모두 콘테스트 형식이었다. 대상은 이성미·김은우 콤비가, 은상은 김형곤·장두석 콤비, 동상은 조정현이 받았다. 모두 1990년대 코미디를 이끈 주인공들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끈 것은 최양락과 함께 출연한 ‘네로 25시’라는 코너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리 비중이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황제에게 바른 말만 하는 충신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대사도 별로 없을뿐더러 착한 역할로는 당최 웃길 수가 없는 거예요. 회식 자리에서 ‘저 오늘 한 잔 꺾었습니다, 끅! 여기 골뱅이 안주 추가요~’ 하며 제 개인기를 어필했죠. PD가 박장대소하며 재밌다고 방송에서 써보자고 하더군요. 그 이후로 분량이 점점 늘어나고 인기를 얻었죠.”
“어릴 때 유일한 놀이는 라디오 드라마 만들기였어요. 친구들끼리 모여서 각자 배역을 정하고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을 했죠.”
학창 시절에는 YMCA에서 주최하는 ‘아나운싱 클럽’에서 연출을 맡아 2시간짜리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개그 원고를 쓸 수 있는 밑바탕이 됐던 것이다. 그는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시를 쓴다. 습작은 이미 100여 편에 이른다.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 그는 ‘인생 스케치’라는 개그 코너를 통해 국내 최초로 그림 코미디를 선보였다. 지금도 사람들이 정명재를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하면 캐리커처를 함께 그려주곤 한다.
“글은 그냥 틈나는 대로 제 느낌을 적었어요. 기러기 아빠인 덕분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 취미로 삼은 거죠. 전 연하장이나 생일 카드를 사본 적이 없어요. 제가 다 그리고 출력해서 보내요.”
그는 12년째 기러기 아빠로 홀로 살아가고 있다.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최대한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외로움이요? 때로는 외로움도 맛있게 먹을 줄 알아야 해요. 제 성향이 사업가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많은 것 같아요. 저를 진중하게 일할 수 있게 만든 건 가족이죠. 저는 지금도 생활 걱정 없이 글 쓰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요.”
그는 올 여름쯤 시와 그림을 섞어 시화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베스트셀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다. 제목은 정하지 않았지만 ‘기러기 아빠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 가제를 붙여놓았다. 12년간의 그의 애환이 묻어나는 제목이다.
“연예인이란 참 외로운 직업이에요. 방송 활동을 하거나 유명할 때는 동료들과 더없이 좋은 관계지만 방송이 없으면 따로 만나기가 쉽지 않죠. 방송을 안 하고 사업만 하는 저는 옛 동료들이 좀 멀리 느껴지죠.”
그가 방송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후배들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모니터를 하는 편이다. 시사 풍자 코미디가 점점 사라지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그래서 그만의 야심 찬 계획도 갖고 있다.
요즘 코미디에 일침을 가하다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기회를 좀처럼 잡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코미디만 할 수 있다면 무대가 어디든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UCC(개인이 제작한 콘텐츠)를 이용해 인터넷 방송국을 열 계획이다.
“코미디에 관련된 좋은 도메인을 등록한 게 있어요. 시간적,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사이트에 제 시사 풍자 개그를 찍어서 올려볼 생각입니다. 책상과 칠판을 놓고 그날의 신문 기사를 분석하는 거예요. 재밌게 봐주는 사람이 한 분이라도 계시다면 행복하겠죠. 단 한 사람을 위해 피에로가 웃듯이 말이죠.”
고독을 맛있다고 표현하는 그다운 발상이다. 더불어 요즘 코미디에 대한 안타까움도 숨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머일번지’ 같은 경우는 방영 시간이 되면 식당에서든 당구장에서든 TV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거든요. 그런 풍경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 요즘 코미디는 특정 연령대에 맞추는 것 같습니다. 단발성 웃음만 주다 보니 스토리의 페이소스도 부족하구요.”
그는 특히 요즘 유행하는 ‘막말’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다. 단지 세대 차이의 문제로 보기에는 도를 넘어선 것 같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저번에는 장애인들을 코미디 소재로 써먹더군요. 그걸 보니 정말 개탄스러웠습니다. 유행에 편향하는 개그맨들도 문제지만 오히려 시청률을 의식해 그런 행태를 부추기는 방송국 PD들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옛날에 방송할 때는 우리 스스로 자체 심의를 했어요. ‘이건 인신공격이 될 수 있다, 위험하니 빼자’ 이런 식으로 말이죠.”
또 성인이 볼 만한 코미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겨보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더 앞서고 빠른 인터넷 문화에 빠져 있다.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코미디는 모든 연령대가 보고 웃을 수 있는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좀처럼 웃을 일 없는 시대에 활력소 역할이 되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옛날을 회상하면 나이든 선배들도 우리가 만든 코미디를 좋아했거든요. 조언도 쉽게 받을 수 있었죠. 요즘은 그런 풍토가 없잖아요. 물론 방송을 보면 재밌는 것도 있고 열심히 연습한 티는 분명 나요. 그러나 선후배 조직과 단합이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는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받쳐주는 옛날이 따뜻했다”고 말한다. 코미디언도 프로덕션 시스템을 갖추며 개인주의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민감한 사항의 이야기도 굳이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잘못된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던 그의 저력이 아닐까.
기러기 아빠로 사는 요즘
정명재는 ‘기러기 아빠’로 12년째 홀로 살고 있다. 두 자녀는 현재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사실 방송에서 기러기 아빠 이야기로 섭외가 많이 왔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주제로는 하고 싶지가 않더라구요. 경기도 안 좋은데 본의 아니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잖아요. 저희도 절대 여유가 있어서 보낸 게 아니거든요.”
미국에 있는 친척집에서 머물며 영어 좀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교육에 좀 더 욕심을 내다 보니 12년이 흘렀다. 사업이 잘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IMF가 터지고 그도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이제 자녀들도 성장하고 그 역시 혼자 살다 보니 살림과 요리에 익숙해졌다.
“저 요리 잘해요. 닭볶음탕, 잡채, 만두 못하는 거 없어요. 혼자 장도 보고 돼지 주물럭도 신나게 만들죠. 그런데 문제는 다 먹고 설거지를 할 때면 내가 혼자 뭐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자녀들을 생각하면 고생스럽지 않다. 딸은 뉴욕 아티스트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학금을 받는 우등생이다. 아버지의 소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아내는 손을 종이에 대고도 못 그리는 사람이니 나를 닮았다고 생각해요. 주로 특별한 날이면 제가 미국에 들어가 가족들을 만나요. 공부를 마치면 아내와 아이들이 들어오겠지요. 그때는 그동안 꾸리지 못했던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정명재는 가족 사랑은 3년 뒤로 잠시 미루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주변의 지인들 30여 명과 봉사 모임을 만들었다. 사정이 좋지 않은 후배들을 돕는 한편 3월에는 치매 노인을 돌보러 장수마을에 갈 계획이다.
“종이학 천 마리를 혼자 접으려면 힘들죠. 그렇지만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수월해져요. 살아가면서 내 종이학만 접지 말고 남의 종이학도 접어주는 것, 그게 인생이죠.”
남에게 웃음을 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재주 많고 정 많은 정명재는 올해 할 일이 많다. 봉사활동은 물론, 책도 내고 개인 인터넷 코미디 방송국도 차릴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리라 믿는다. 기러기 아빠, 정명재의 추운 겨울은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오고 있다.
기러기 아빠 1
-정명재
슬픈 눈 있어 눈물 고였다.
기다림이 얼마나 길고 길었을까
긴 목은 그리움으로
허리까지 늘어져 애타는구나!
이제,
당신을 기다리는 방법으로
손가락 열 개를 꼽고 꼽다 보니
당신을 보듬어준 두 손에는
서러움만 가득 찬 응어리가 생겼다
갈 때는 그때였는데,
올 때는 언제이더냐!
긴 세월 주름으로 파인 운명선 따라
문득, 고향의 봄을 노래할 때
절로 흐르는 한숨 소리는
한낮 바람에 불과한
기러기 아빠의 신음이겠지.
훨훨
날아야 할 그 날개는
어느덧, 한 가닥 한 가닥
야속하게 허공으로 흩어졌구나!
남은 것이라곤
비린내 풍기는 앙상한 깃털 몇 가닥.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멀고 먼 당신을 볼 수 있을까-
푸드덕 푸드덕!
푸드덕 푸드덕…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날개를 접고
목멘 목젖으로 눈물 삼킨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