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차인태의 흔적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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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원한 아나운서’ 차인태가 30여 년의 방송생활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펴냈다. 책의 제목은 좥흔적좦이다. 흔적만 남기고 가는 인생이란 뜻이다. 한국 방송 역사를 만들어온 이력을 흔적이라고 말하는 그의 겸허함. 그는 그저 훨훨, 훌훌 털고 살고 싶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차인태의 흔적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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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나운서 이야기
축제 준비가 한창인 5월의 캠퍼스는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무대와 같다. 대학생들의 과장된 웃음과 땀방울에서 젊은 열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들뜬 분위기의 캠퍼스를 뒤로하고 연구실 건물로 들어가니 금세 다른 세계처럼 고요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흰머리가 조금 늘어난 차인태(65) 교수가 앉아 있다. 그는 현재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느라 수고했수. 축제 기간이라 좀 시끄럽지요?”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맞는 고향 선생님처럼 기자를 반겼다. 따져보면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늘 그가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실황 중계는 물론 평양 아나운서와 ‘민족통일음악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온 국민이 즐겨보던 ‘장학퀴즈’도 그의 목소리를 통해 완성된 역작이다. 17년 동안 진행한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방송사(史)가 곧 인생사’인 그가 보는 ‘요즘 아나운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인기를 얻으면 곧 프리랜서 선언을 하는 아나운서가 많은 것이 요즘 현실이다.

“긴 호흡으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일할 때와는 방송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요. 케이블TV가 생기고 IPTV, DMB가 나오는 그 변화의 흐름 안에 있으면 남이 이룬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높이 뛰자는 조바심이 들 수가 있지요. 일종의 주식처럼 상종가일 때 팔아야 하느냐를 고민하지요. 그런 경제적 논리가 적용되는 거죠.”

대한민국 최고의 아나운서였던 그는 타 방송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첫 직장인 MBC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렇다고 프리랜서 선언을 비난하진 않는다.

“프리 선언을 하는 친구들은 더 넓은 시장에서 모험을 하고 싶었을 거예요. 순수한 도전의식도 분명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는 방송계에서 위기의식에 대한 나름의 대책일 수도 있구요.”

중요한 것은 프리랜서의 세계는 ‘All or Nothing’이다. 조직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동건, 임국희, 황인용, 이창호, 이상벽, 이숙영, 정은아, 손범수 같은 특정한 나만의 색으로 프리 아나운서로 성공한 이들도 있지만 반면, 성급한 결정으로 인해 대중에게 잊혀지고 있는 아나운서들도 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이 프리랜서를 언급하니 아나운서들은 으레 프리 선언을 한다고 보일지 모르겠지만 전체 비율로 보면 3%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착실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아나운서 중에 실무 훈련을 받으며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주 호되게 훈련을 받지요. 그만큼 언어를 지키는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나운서를 ‘우리말에 대한 마지막 보루, 파수꾼’이라고 칭했다. 말의 홍수시대이고 누구나 말을 하는 사회다. 바른 영어를 알고 싶으면 영국 BBC를 들어보라고 한다. 제대로 된 일본어를 말하려면 NHK 뉴스를 들으라 하지 않은가. 그것이 아나운서의 역할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아나운서가 됐다고 조급하게 꿈을 이루려거든 그 실력으로 다른 데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급여 수준이나 연봉 등 경제논리에 연연한다면 빨리 직업을 바꾸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아나운서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이 없으면 자꾸 흔들리고 좌절하게 마련입니다.”

1 MBC 뉴스를 진행하던 시절. 2 이산가족 상봉 실황을 중계하던 모습. 3 장학퀴즈를 함께 진행하던 조일수 아나운서와.

1 MBC 뉴스를 진행하던 시절. 2 이산가족 상봉 실황을 중계하던 모습. 3 장학퀴즈를 함께 진행하던 조일수 아나운서와.


그때 그 시절 이야기
그에게 30년의 방송생활 중 겪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를 들어봤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장학퀴즈’를 진행할 당시의 일이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장학퀴즈’는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어서 당시 중앙정보부, 국회, 검찰 등 소위 잘나가는 각계 인사들로부터 출연 신청 압력이 쇄도했지만 청와대까지 나서서 전화할 줄은 몰랐다.

“당시 박정희 정권 때였습니다. 방송국 제작진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죠.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아들(박지만)이 ‘장학퀴즈’에 출연 신청을 했으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던 박 대통령의 아들은 중학 시절부터 ‘장학퀴즈’의 열혈 시청자였던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금지옥엽 같은 아들이 출연 신청을 한 것이다.

“순전히 본인의 의지인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희망인지, 아니면 비서진의 충정인지 알 길은 없지만 분명 본인도 출연을 싫어하진 않았다는 사실이죠.”

물론 그가 다른 학생들처럼 예비 시험을 봐서 통과한다면 방송국으로서도 출연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페어플레이만 한다면 본인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테고 방송사 입장에서도 화제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었다.

“장고 끝에 대통령 아들의 출연이 결정됐죠. 제작팀이 예비 시험을 면제해주는 대신 조건을 붙였죠. 페어플레이로 가야 한다는 것.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 몇 개는 미리 흘려달라는 거예요. 대통령 아들로서 최소한의 망신은 피해야 한다면서…. 산 넘어 산이었죠.”

제작진은 고심 끝에 재밌는 발상을 냈다.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던 3김과 박 대통령의 자녀들을 한자리에 모아 대결을 붙여보자는 것.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아들들 역시 ‘장학퀴즈’에 동시 출연을 마다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멍석을 깔자고 나서니 청와대 쪽에서 슬그머니 발을 뺐죠. 청와대 출입기자를 통해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에요. 방송이 됐다면 엄청난 히트작이 됐을 텐데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어요.”


박정희 대통령
더욱 재밌는 에피소드는 그가 만난 대통령과 영부인에 대한 이야기다. 이름만 들어도 범접하기 힘들 것 같은 그들인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채롭다.

“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만났어요. 순간순간 비춰지는 모습에서 ‘아, 이런 분들이셨구나’ 하고 느낄 기회가 있었죠.”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18년 동안 만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974년 ‘육영수 여사 장례식’ 방송이다. 여사의 운구 차량이 청와대 정문을 벗어날 즈음, 대통령이 영부인을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눈물을 닦아내는 그의 비통한 얼굴은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필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짜 충격은 방송 이틀 후죠. ‘나, 박정희입니다’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전화가 온 거예요. 수화기 저쪽에서는 착 가라앉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죠.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어요. 엊그제 상을 치른 사람한테 ‘안녕하십니까?’ 할 수도 없고 해서 간신히 ‘예, 저 차인태입니다’ 했더니 ‘차인태씨, 방송 잘 봤습니다’ 하시더군요. 군더더기 없는 박정희식 화법이었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서실을 통한 절차’가 완전히 생략된 그 한 통의 전화는 대통령이 아닌 ‘남자’였어요. 그의 ‘진심’이었구요.”


영부인 홍기 여사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는 키가 150cm 정도의 작은 체구였다. 워낙 소박하고 소탈한 성품이라 총리 부인일 때도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었다. 본인이 직접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시장에 다녀도 홍기 여사가 총리 부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날, 공관에서 인터뷰가 있었어요. 1979년 12월 초로 매우 추운 날씨였죠. 홍기 여사는 조금 짧은 한복에 굽이 높은 털신을 신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어울리지 않았죠. 인터뷰 후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영부인님, 그 신발은 왜 신으신 거죠?’라고 물었죠. 그러자 오히려 영부인이 ‘날이 추워서 집에 있는 거 그냥 신었는데 왜 안 됩니까?’라고 되물었어요. 물어본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시더라구요.”

차인태 교수는 ‘이런 영부인도 계시구나!’ 생각했을 정도로 홍기 여사가 검소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차인태의 흔적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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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정말 말하는 것을 즐겼단다. 전 대통령이 방송사 앵커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오찬을 가진 자리였다. 누군가 대통령 의상에 대해 이순자 여사에게 질문했다. 분위기를 좀 띄워보자고 한 말이었다.

“이순자 여사가 남편 옷 취향에 대해 꽤 재미나게 설명했죠. 그런데 한참을 듣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이 냅다 소리를 지르셨어요. ‘빨리 밥 묵어!’ 이순자 여사가 이야기에 몰두한 나머지 남편이 스테이크 접시를 모두 비울 때까지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빨리 밥이나 먹으라는 남편의 면박에 이순자 여사는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얼른 먹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평범한 한국 부부의 모습이었다. ‘이들도 사람이구나’ 하는 일상의 뒷모습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다.


아내와 두 딸 이야기
차 교수의 부인은 경원대 미대 이선희 교수다. 이번 자서전의 표지는 이선희 교수의 작품이다. 이 교수는 TV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어서 첫 만남 당시 아나운서 차인태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을 “시속 60km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다가왔다는 뜻이다. 그는 얼굴이 알려져서 밖에서 만나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를 대며 매일 집으로 찾아왔다. ‘눈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라 했던가, 거의 매일 만나다 보니 스물아홉 살 여인의 마음은 점점 열리고 있었다.

“소개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찾아갔어요. 연(緣)이랄까, 섭리랄까. 생긴 것도 성격도 다른데 뭔가 조화로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차인태 교수는 “같은 배를 타지 않겠습니까?”라는 다소 촌스러운 프러포즈를 했고 이 교수에게는 그것이 진솔하게만 들렸다. 두 사람은 만난 지 10개월 만에 결혼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아내나 아이들보다 방송이 먼저였던 사람이다. 신혼여행조차 단 하루로 끝나버렸다. 방송 스케줄이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제주도에서 여행 가방을 풀자마자 서울에서 급하게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미안한 마음에 ‘살면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함께 여행을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나 그 약속은 내가 방송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지켜지지 못했지요.”

아내는 늘 두 딸에게 “너희는 손잡고 같이 시장 갈 수 있는 사람한테 시집가라”고 당부했다. 쉽게 구설에 오를 수 있는 유명인 아내의 자리가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차 교수의 딸들도 방송인인 아버지의 생활을 크게 동경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방송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제주MBC 대표를 역임하던 당시 아내 이선희 교수와 용두암에서(사진 왼쪽). 졸업식장에서 하림, 유림 두 딸과 차 교수 부부.

제주MBC 대표를 역임하던 당시 아내 이선희 교수와 용두암에서(사진 왼쪽). 졸업식장에서 하림, 유림 두 딸과 차 교수 부부.

“아이들이 학창 시절부터 ‘누구의 딸’이라는 말을 참 싫어했어요. 저는 아이들이 학년이 끝나고 성적이 나올 때쯤에 담임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그때 깜짝 놀라셨죠. ‘하림이, 유림이 아버님이 차 선생님이셨군요!’ 딸들도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게 싫었겠지요.”

첫째 딸은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둘째 딸은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샌디에이고 대학 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두 놈 다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뿌듯하죠.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둘째는 해양 연구를 하고 있어요. 요즘 지구 온난화와 해수면 온도 상승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지요.”

현재 둘째 딸은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결혼한 지 만 5년 만에 임신을 했다는 것. 곧 출산 예정일이 다가온다. 차 교수는 할아버지가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내년이면 저도 교수 정년이 끝납니다. 그러면 다 털고 훌훌, 훨훨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갈 겁니다. 손주 보러 미국도 다녀올 거구요.”

그가 방송인에서 자연인으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왜 정치인으로 나서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는 넉넉하게 웃는다.

“묘비에 ‘학생부군신위’라고 쓰면 어떤가, ‘여기 열심히 산 아나운서가 있었다’ 정도면 충분하지요.”
그의 30년 역사는 ‘영원불변한 흔적’이 되어 TV 시청자들의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자료 제공 / 「흔적」(차인태 저, FKI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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