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진행자 그리고 남겨진 꿈 개그맨 김은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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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진행자 그리고 남겨진 꿈 개그맨 김은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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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올리며 하이톤으로 “누가 나 좀 말려줘요~”를 외치던 개그맨 김은우. 코미디 콩트가 사라지던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그의 모습은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채널을 돌리다 발견한 그는 골프 채널에서 스윙을 하고 있는 낯선 모습이었다. 얼마 전 그가 신월동 근처에 스크린 골프장을 개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보았다.


동양방송 개그 콘테스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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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우(49)의 스크린 골프장에는 개업 축하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골프 관련 업체나 관계자들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그는 개그맨으로 데뷔했지만 현재는 잘나가는 골프방송 진행자다. 그가 골프방송 진행으로 진로를 전향한 것은 점점 방송국에 설 자리를 잃는 것에 대한 차선책이었다. 그러나 김은우의 데뷔 시절은 매우 화려했다.

1980년 TBC(동양방송) 제2회 개그 콘테스트에서 이성미와 콤비로 나와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콘테스트에서 개그우먼은 이성미 한 명뿐이었는데,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건 그의 작전이었다.

“1회 때 원맨쇼를 들고 나갔는데 본선에서 떨어졌어요. 개그의 ‘개’자도 몰랐던 시절이죠. 떨어진 충격으로 시중에 파는 유머 책을 다 사서 공부했죠. 그리고 ‘안 되겠다,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고 대학 동기인 이성미를 불렀어요. 그거, 아세요? 이성미씨가 개그우먼이라고 불린 최초의 여성희극인인 거.”

화려한 데뷔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방송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그의 첫 출발지인 TBC가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통폐합 과정에서 그는 MBC로 건너가 ‘주걱턱’ 김명덕과 콤비를 이루며 ‘영일레븐’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방송을 알아가고 겨우 이름을 알릴 때쯤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군대 영장이 날아온 것이다.

“겨우 활동을 하게 됐는데 조금이라도 군대 가는 시기를 연기하고 싶었죠. 온갖 방법을 찾던 중, 돈만 준다면 손써주겠다는 브로커가 나타났어요.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죠. PD에게는 작은 할아버지 제사라고 둘러대고는 10일간 휴가를 받고 우선 입대했어요.”

브로커에게 꽤 큰돈을 건넸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을 기다려도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게다가 브로커는 훈련 중에는 집에 연락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해 김은우의 어머니에게도 돈을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사기를 당했고 꼬박 3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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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당장이라도 탈영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된 거지요. 인생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라는 걸 일찍 깨달았으니까요. 저는 일반병으로 훈련을 받다가 특기병으로 뽑혀 군부대 공연의 사회자로 군 생활을 했어요. 요즘의 ‘연예 사병’이지요. 결과적으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군 복무를 마치고 그는 MBC로 복귀했다. 비중이 작은 역이라도 가리지 않고 했으나 3년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다 SBS가 개국하면서 옛 동료인 이성미를 통해 SBS-TV ‘코미디 전망대’, ‘웃으면 좋아요’ 등의 개그 프로그램에 막차 멤버로 합류할 수 있었다. ‘누가 나 좀 말려줘요~’는 이때 탄생한 유행어였다.


삶은 치열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그러나 불행히도 김은우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SBS 개국과 동시에 혜성같이 밀려들어온 신동엽을 비롯한 신인 개그맨들의 등장 때문이었다. 중견 연기자들은 조금씩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입장이 됐고 그의 방송 분량은 점점 줄기 시작했다. 이미 젊은 시절에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삶은 치열하고 치밀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치관이다. 변두리에서 마지못해 일에 전전할 바에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새롭게 도전하리라 다짐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가장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분야에서 내 재능을 살릴 방법을 생각했죠. 그때 한창 골프에 빠져 있었고 골프 방송을 진행하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7, 8년 전만 해도 골프는 그리 대중화되지 않은, 특정 계층만이 즐길 수 있는 ‘그들만의 스포츠’였다. 소위 ‘품격 있는 자리’에 개그맨이 골프 경기 사회를 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골프 관계자가 여는 모임이나 경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인맥을 쌓고 골프에 대한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결국 ‘쟈니윤 클럽 하우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보조 MC를 하며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개그맨으로서는 제가 첫 골프 방송 진행자라는 점이 정말 조심스러웠어요. 먼저 길을 잘 만들어놔야 앞으로 후배 개그맨들이 이 길로 쉽게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요. 열심히 한 덕분에 이제는 전국 골프 대회의 60~70%는 제가 사회를 볼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어요.”

골프 방송에서 성공한 비결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고객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자라고 해서 사회만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수가 되어 노래도 부르고, 때로는 필드의 갤러리가 되어서 함께 호흡하며 경기 흐름을 원활하게 이끌었다.

“해외에서는 아침에 경기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새벽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침엔 좀 지치죠. 그럴 때 제가 나타나서 농담도 건네고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하죠. 나이 드신 분들 가방은 제가 대신 차 안에 실어주기도 하구요. 마지막에는 가시는 분들 배웅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그런 노력으로 경기 주최 측에 ‘김은우 한 사람이면 여러 사람 고용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만들어줬다. 그럼 다음 대회에도 어김없이 그에게 사회 의뢰가 들어왔다.

“저는 지금까지의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아요. 비록 원치 않던 입대였지만 군대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어요. 어떤 열악한 무대와 분위기에서도 사회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요. 또 방송에 복귀해서는 젊은 신인들에게 밀렸지만 그 덕분에 골프 방송에서는 제가 독보적으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잖아요. 어디서든 열심히 살면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삐삐 아저씨의 봉사활동
3년 전이다. 장호원에 자리한 ‘작은 평화의 집’ 장은영 원장에 의해 김은우의 선행이 알려져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선행에 감동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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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극동방송에서 ‘희망의 구름다리’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했어요. 그 중 한 코너가 몸은 불편하지만 좋은 일을 하는 장애인을 모시고 인터뷰 하는 거였어요. 그때 만난 분이 장은영 원장님이었죠. 그렇게 원장님과 인연을 맺고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다녔죠.”

SBS 개그맨 실장을 맡았던 때라 동료 개그맨들과 CF를 찍고 받은 출연료를 기부하거나 또,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찾아가 봉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방송 프로그램이 하나, 둘 없어지는 시점에서 동료들 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자연스레 봉사활동 모임도 사라지고 말았다.

“한마디로 먹고살기에 바빴어요. 그렇게 11년이 흘렀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 홈페이지에 장 원장님이 글을 남긴 거예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는데 작은 평화의 집 아이들이 ‘삐삐 아저씨(당시 그가 진행하던 어린이 프로그램의 캐릭터 이름)가 사회 보러 오냐’고 묻더랍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글을 남겼다고 하시더군요. 예전에 원장님의 시집 출판기념회 때 제가 사회를 봐 드린 적이 있거든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수년이 흐른 지금도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는 게 뭔지. 그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김은우는 당장 장은영 원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무심함에 용서를 빌었다. 이제 다시는 소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3년째 ‘작은 평화의 집’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1년이 흐른 뒤에 찾아가보니 이미 세상에 없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이던 덕우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근육이완증으로 고생하던 생각이 나서 안부를 물어보니 하늘나라로 갔대요.”

아이들은 누구라도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다 기억한다고 했다. 잠깐 동안 머문 사람들도 아이들은 마음에 새겨놓은 것이다.

“이 친구들을 평생 보고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제 봉사활동은 다른 연예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사랑의 밥차’라든지 수억원을 선뜻 기부하는 친구들도 많잖아요.”

좋은 일들은 널리 알려야 한다. 선행은 선행을 낳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중에게 알려진 연예인들의 기부나 선행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된다.

“성공한 삶이 따로 있나요? 남을 도울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성공한 거죠. 그리고 그게 사는 맛이죠. 나만 잘산다고 행복할까요?”


김은우의 마지막 꿈
마음을 곱게 쓴 덕분인지 그는 전혀 늙지 않았다. 두 아들이 이미 대학생, 고등학생이다. 큰아들은 광운대 골프학과에 재학 중이며 프로골퍼를 꿈꾸고 있다. 둘째 아들은 음악 관련 특목고에 재학 중이다.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아 드럼 특기생으로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 장래 꿈은 뮤지션이다. 그에게 동안 유지 비결을 물었더니 철저한 자기관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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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필드(야외 골프장)에 자주 나가다 보니 피부에 신경을 많이 써요. 자외선 차단제도 꼭 바르고요. 머리카락 관리도 꾸준히 합니다. 요전에는 숟가락으로 주름 펴는 법이 있다기에 해봤어요(웃음). 나이 먹은 사람들은 늙을수록 도태되게 마련이니 관리해야죠.”

그한테는 늙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연기자를 향한 미련 때문이다.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 출신인 그의 원래 꿈은 연기자였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 아쉬움이 클 따름이다.

“골프 방송계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지만 마지막 꿈은 연기입니다. 요즘도 TV에 나오는 조연 배우들을 보면서 나도 감초 역할이라면 재밌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거든요.”

요즘 개그맨들의 활동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개그 무대가 좁아지면서 연기자나 뮤지컬, MC 영역으로 진출하는 개그맨들이 늘고 있다.

“개그맨은 끼와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유재석을 보세요. 오랜 무명세월을 보낸 그가 국민 MC가 될지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 개그맨들을 보면 저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요. 기회가 생기면 꽉 잡을 겁니다.”

인생은 유동적이고 한 치 앞도 점칠 수 없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결국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해지고 또 불행해진다. 김은우는 위태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늘 긍정적으로 살아왔다. 스스로도 99% 성공했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다만 남은 1%는 그가 못다 이룬 꿈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달려보자.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주석 장소 협찬 / 드림존 스크린 골프장(02-2695-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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