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서울대나 하버드에 보내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요?”
윤영미 아나운서와 이야기하면서 살짝 샘이 났다. 연예계뿐 아니라 문화계, 재계를 망라하는 넓은 인맥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빌 수 있는 여유, 듬직한 남편에 귀여운 두 아들까지…. 그러나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부지런함과 열정, 에너지였다.
미니홈피 속의 윤영미는 미식가이다. 마당발이다. 여행을 자주 다닌다. 요리를 잘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 문화생활을 즐긴다. 사진 찍는 걸 즐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만큼 부지런하다.
새벽 4시에 시작되는 부지런한 하루
윤영미의 하루는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을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방송국에 도착한 시간은 5시, SBS-TV ‘출발 모닝 와이드’의 ‘굿모닝 연예뉴스’ 준비를 시작한다. 8시 30분 방송을 마친 후 잠시 휴식, 오전 9시부터 1시간 동안 미니홈피를 업데이트한다. 시간을 따로 내어 미니홈피에 몰두한 지 3년. 뒤늦게 만난 1인 미디어는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미니 홈피라는 매개를 통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아요.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성숙해가는 것 같아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사랑에 대해, 영화에 대해 글을 올리는데 그로 인해 생각이 다듬어지는 거죠. 책을 읽고 좋은 글귀가 있으면 올리고, 좋은 영화 속 대사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올리기도 하고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행복을 느껴요.”
오전 10시, 가상공간에서 소통하던 시간이 끝나면, 현실에서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전화로 지인들과 안부를 주고받고, 점심 식사 시간을 이용해 사람들을 만난다. 저녁 약속을 잡거나 앞으로 있을 모임에 대한 공지사항을 알리기도 한다. 휴대폰 전화번호부 용량이 모자랄 정도로 방대한 인맥을 맺고 있는 그녀가 고정적으로 나가는 모임만 네 개. 그녀는 모든 모임에서 총무직을 맡고 있다.
“제가 굉장히 정확하고 끈질긴 성격이에요. 그래서 제가 총무를 하면 모임이 오래 가죠. 일단 20~30일 전에 날짜를 잡고, 모든 회원에게 연락을 해요. 열흘 전에 또 연락하고, 수시로 참가 여부에 대해 확인을 하죠. 중요한 건 모임의 기획이에요. 만날 술 먹고 밥 먹으면 재미없잖아요. 종로 시장에 가서 과메기를 먹자, 효재 선생네 가서 밥을 먹자, MT를 가자…. 그렇게 모임에 나오도록 유도하는 거죠.”
점심 식사 이후는 배움의 시간이다. 요리나 꽃, 댄스, 와인 등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최근 그림 공부를 시작하면서 미술관 나들이를 즐긴다. 성곡미술관, 가나아트센터, 현대미술관을 즐겨 찾고,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닥터박 갤러리나 수종사 야외 미술관도 찾아간다.
“누군가와 함께할 때도 있지만, 혼자 다니는 시간이 많아요.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거나 음악을 들으며 감동할 때 엔도르핀보다 더 강력한 다이노르핀이 나온대요. 야외에 나가거나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 비타민을 챙겨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말이죠.”
“저는 전국의 맛집이나 좋은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수고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식이 맛있고, 풍경이 아름답다면 찾아가는 데 드는 시간이 정말 아깝지 않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밥을 먹다가도 가요. 사람들은 대개 ‘거긴 너무 멀어’라고 생각하는데, 한 시간쯤은 그냥 앉아서도 버리는 시간이잖아요.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서울을 벗어나 더 좋은 곳에 다다를 수 있죠. 저는 그런 면에서 남들과 사고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좌절할 때마다 초심 떠올려
윤영미는 일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SBS 아나운서 윤영미의 열정」(경향미디어)이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그동안의 쉼 없는 도전과 철두철미한 자기관리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암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후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을 때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삶에서 ‘열정’이 가장 크게 발휘된 분야는 바로 일이다. 지난 24년 동안 그녀는 꿈과 도전, 배움 그리고 성취라는 과정을 통해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왔다.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때 야구 캐스터로 진로를 택했어요. 타자와 투수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피눈물 나게 노력을 했죠. 1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야구장에 다녔어요. 야구 경기를 제대로 보기까지 6개월이 걸렸죠.”
이 같은 그녀의 노력을 눈여겨보았던 이계진 전 아나운서가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여성 최초 프로야구 캐스터’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당시 윤영미 아나운서는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또 다른 꿈을 꿀 차례가 왔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야구 캐스터로 살았죠. 그때는 야구 중계만 하면 세상이 내 것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취의 기쁨은 잠깐이었죠. 저를 지적하는 소리가 들렸고, 꿈을 이루고 나니 허탈한 마음도 들었어요. 목숨 걸고 야구 캐스터가 됐는데 인생의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그녀의 나이 서른넷, 고비가 찾아왔다. 야구 중계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여자로서 허전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당시 애인도 없었니 많이 힘들었어요. 미국 한인 방송으로 갈까 싶어 알아보기도 했죠. 그런 찰나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결혼 후에는 바로 아이 둘을 낳고 정신없이 살았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마흔이 되니, 또 다른 꿈을 품게 됐다. 그녀가 이루려고 한 것은 공부. 연세대 교육대학원 한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방송인으로서 진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평생 아나운서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고요. 마침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방송 관련 분야가 아닌, 실용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한국어 교육과를 선택했죠. 정말 어려운 공부였는데,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더 나가 공부를 했어요.”
윤영미의 지난날은 끊임없는 도전으로 채워져 있다. 그 시간 속에는 좌절하고,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었던 시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를 일으킨 힘은 아나운서를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이었다.
“열 살 때부터 품었던 꿈이 아나운서였어요. 그때부터 치열한 노력을 했죠. 저는 굉장히 힘들게 아나운서가 되었어요. 아나운서 시험을 보는 족족 떨어졌죠. 1년 넘게 떨어지기만 하다가 결국 춘천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SBS가 개국하면서 중앙방송으로 진출했죠. 제게는 아나운서가 무척 소중한 직업이에요. 늘 좌절하다가도 내가 얼마나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는지를 생각하면, 모든 게 무척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져요.”
윤영미는 자신의 롤모델로 이계진 전 아나운서를 꼽는다. 늘 아나운서로서 모범을 보인 선배이며, 야구 캐스터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다.
“이계진 선배는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서른 중반부터 유명해지셨는데, 오로지 노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르셨죠.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어서 신문 자료를 장르별로 스크랩해서 활용하셨어요. 그 분량이 사람 키만큼 됐는데, 결국 그런 지식이 방송에서 묻어나오더라고요. 그분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원하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특별한 자녀 교육법
“남편은 제 생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포기했어요. 아내가 늦게 귀가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죠. 그래도 저를 이해해주고, 믿어요. 미혼 때처럼 자유롭지 못해서 아쉽지만,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이 세상에 아군이 세 배로 늘었다는 거죠. 남편과 두 아들은 끝까지 제 편을 들어주는 지원자예요. 생각만으로도 항상 든든하죠.”
윤영미 아나운서는 초등학생인 예손, 예후 두 아들을 두었다. 한창 엄마가 교육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엄마의 생각을 절대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도록 도와주고 있다. 사교육도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숙제도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은 결국 자신이 필요하면 하게 돼요. 요즘 엄마들은 모두 아이들을 서울대나 하버드대에 보내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에 대한 고민은 없어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따로 있는 거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각자 잘하고 좋아하는 걸 찾아야 하지 않나요? 평범한 대학을 나와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일류대를 나와도 하고 싶은 게 없는 학생이 있어요. 누가 행복할까요?”
윤영미의 아들들은 현재 태권도와 영어를 배우고 있으며, 최근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저는 아이가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그게 뭐든 고마워요. 하고 싶은 게 없는 아이들도 많거든요. 자기가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분야가 있어야 성공하거든요. 남들이 인정하는 좋은 직장, 의사처럼 명예가 보장되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성공할 수밖에 없고요.”
그녀는 대신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아이들과 여행을 다닌다. 전시회와 공원에 가기도 하고 하다못해 동네 마트에도 간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하고 “왜?”라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은 자기 주관이나 자기 세계가 확실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어떤 현상을 받아들일 때 ‘왜 그래야 하나?’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죠. 저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어른의 언어로 대화해왔어요. 아이들이 처음에는 못 알아듣겠지만 반복되면 나중에는 철학적인 부분까지 이해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어휘력도 늘고 사고의 폭도 넓어지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고 해서 마냥 풀어놓고 키우는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교육에도 최소한의 규칙은 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게 했고, 존댓말을 사용하게 했으며, 컴퓨터 사용 시간을 제한했다. 그녀의 교육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다른 엄마들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패션 감각이나 식탁 예절, 요리나 와인 등에 대해서 교육한다는 점이다.
“남자도 멋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배워서 의상 색상을 생각하고, 양말이나 신발도 코디할 줄 알아요. 또 5천원짜리 식당부터 몇십만 원 하는 고급 식당까지 다니면서 식탁 예절을 가르쳐왔어요. 허름한 맛집도 좋아하지만 호텔 식당에 가도 자연스럽죠. 음식에 대한 설명도 해줘요. 와인도 한두 모금씩 맛보게 하고요. 우리 아이들은 보르도, 부르고뉴 등 와인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있어요.”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윤영미 아나운서는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다. 일단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많이 갖고 있고, 그럼에도 교만하지 않으며, 가식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장소 협찬 / 미엘(02-512-2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