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혹은 20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 생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MBC는 10년 동안 라디오를 진행해온 DJ들에게 진행자의 입 모양을 본떠 만든 기념패를 증정한다. 지난 10년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왔던 양희은과 노사연에게 ‘브론즈 마우스’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6월 중순, MBC 본관에서는 ‘브론즈 마우스’ 시상식이 열렸다. MBC 라디오는 1996년 ‘골든·브론즈 상’을 제정했고, 이후 20년 이상 진행한 사람에게는 ‘골든 마우스’를, 10년 이상에게는 ‘브론즈 마우스’를 수여해왔다.
이번에 브론즈 마우스를 수상한 주인공은 양희은과 노사연. 양희은은 1999년부터 MBC 표준FM ‘여성시대’를, 노사연은 ‘주병진·노사연의 100분쇼’를 시작으로 ‘이무송·노사연의 특급작전’을 거쳐 현재 ‘지상렬·노사연의 2시 만세’를 진행해오고 있다.
시상식에는 MBC 엄기영 사장과 역대 골든·브론즈 마우스 수상자인 김혜영, 이문세, 손석희를 포함해 양희은과 공동 MC를 맡고 있는 강석우, 노사연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지상렬과 남편 이무송, 박미선, 송은이, 강수지, 최화정, 원미연, 박상면, 이광기 등이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양희은은 비교적 침착한 목소리로 “1971년 가을부터 방송을 시작했는데, ‘여성시대’는 제 인생의 거대한 학교였다. ‘여성시대’는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인생을 배울 수 있었던 곳”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에 반해 노사연은 “간밤에 한숨도 못 잤을 정도로 무척 떨리고 감격스럽다. 라디오 DJ를 10년 동안 했는데, 말을 더듬을 것 같아서 수상소감을 밤새 미리 써봤다”고 말해 좌중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제가 10년 동안 라디오를 진행해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주병진, 이택림, 이무송, 지상렬씨와 함께 라디오를 진행해왔다는 제 자신이 정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들과 오랜 시간 라디오를 진행해온 제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상을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라디오를 통해 위안도 받고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라디오를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시상식 이후 양희은과 노사연은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선 노사연은 양희은과의 인연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양희은 언니와 함께 이 상을 수상해 굉장히 영광스럽습니다. 언니가 결혼할 때 ‘아~ 나도 결혼을 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했고, 언니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며 ‘내가 드레스를 입으면 저렇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옆에서 봐왔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고마운 언니죠.”
양희은의 잊지 못할 기억? 최악의 방송 펑크!
양희은과 노사연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의 수상에 대해 칭찬을 계속 했고,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0년 이라는 세월 동안 생방송으로 라디오를 진행하면 많은 돌발 상황이 생기게 마련이다. 방송을 하면서 잊지 못할 실수나 에피소드가 없었는지 물었더니, 양희은이 먼저 말을 꺼낸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가 있다면서 말이다.
“작년에 방송을 통으로 펑크 낸 적이 있어요. 눈이 굉장히 많이 오는 날이었죠. 안 그래도 눈 때문에 새벽부터 집을 나섰는데, 버스가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예요. 시간은 계속 흐르고, 방송 시작 시간이 넘어가면서 심장이 정말 콩닥콩닥 뛰었죠. 그렇게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순간 모든 걸 놔버렸는데, 포기를 하니 편안해지더라고요. 그 뒤로는 매사에 초조하게 굴지 않고, 여유 있게 생각하게 됐어요.”
부랴부랴 전철로 갈아타고 우여곡절 끝에 방송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방송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1971년 방송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펑크 낸 최악의 날이었다. 하지만 이날 사건으로 그녀도 깨달은 바가 많았다. 결석을 하든, 지각을 하든 방송은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날 방송은 패널들이 출연해 이끌었고, 양희은은 버스에서 전화 연결을 통해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노사연은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크게 방송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고 기억했다. 오히려 공동 MC를 맡고 있는 지상렬에게 “제가 방송 펑크 낸 적 있나요?”라고 물어보더니 “지상렬씨는 내가 빠져줘야 좋아한다”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상렬씨는 가끔 저에게 ‘누나가 빠져야 예쁜 아나운서랑 진행해볼 텐데’라면서 제가 튼튼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해요(웃음). 한번은 제가 일주일 동안 외국에 갔다 왔거든요. 그때 미모의 아나운서랑 진행을 하더니 그 뒤로 계속 아픈 데 없느냐, 누나는 무병장수하시냐고 매일 농담을 하곤 하죠(웃음).”
노사연이 기억하는 방송 사고라곤, 주병진과 함께 진행할 때 마이크가 없어서 그를 밀치고 마이크를 빼앗아 멘트를 이어갔던 게 전부다. 하지만 이내 황급히 “아, 라디오를 하면서 가장 큰 이슈는 바로 남편 이무송씨를 만난 것”이라고 말해 폭소하게 만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이무송은 “늘 아내 노사연씨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제가 라디오 방송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노사연씨의 공이 아닌가 싶다”고 치켜세웠다.
지난 6년 동안 ‘지상렬·노사연의 2시 만세’를 진행해온 파트너 지상렬 역시 노사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아무도 제가 매일 같은 시간에 생방송으로 6년 동안 라디오를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라디오 진행을 가능하게 해준 노사연씨와 기회를 주신 제작진께 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밝혔다.
강석우, 양희은은 방송진행자 이상의 의미
‘여성시대’ 공동 진행을 맡고 있는 강석우 역시 양희은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느낀 바가 크다고 전했다.
양희은씨가 없었다면 과연 누가 ‘여성시대’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양희은씨는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이상의 큰 영향력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소외되고 힘든 여성 청취자들이 양희은씨를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는지 몰라요. 저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봤어요. 단순히 10년이라는 세월을 축하하기보다 청취자들과의 깊은 연대감을 만든 것에 대해 정말 대단하다고 치하하고 싶어요.”
라디오는 청취자와의 교감이 그 어떤 방송보다 중요한 매체다. 눈으로 보지 않고 목소리로만 서로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침 시간에 청취자들의 애틋하고 감동적인 사연을 전하는 양희은과 강석우는 가슴 찡한 교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수많은 애청자의 사연을 소개해왔고, 사연 하나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감동이 모두 달랐다. 그래도 기억나는 한 사람을 꼽으라면 정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추희숙이라는 암투병 환자다. 추씨는 항암 치료로 고통스럽고 힘들어하면서도 사흘에 한 번꼴로 ‘여성시대’에 편지를 보냈다. 음성 사서함에는 매일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가 넘쳤다. 추씨는 그렇게 청취자들과 함께 편지를 주고받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제 30주년 기념 음반을 추희숙씨에게 헌정하듯이 만들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남동생과 오빠를 위해 청춘을 공장에서 일하며 바치고, 늦게 결혼해서 조금 살 만하니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희숙씨 같은 누이들이 많잖아요. 1960년대부터 가정에 헌신하듯 살아온 누이들을 위해 꼭 한 번 꽃다발을 바치고 싶었거든요.”
청취자들의 눈물과 애환이 담긴 사연을 소개하다 보면, 아무리 감정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다. 특히 경력 30여년의 멜로전문 연기자 강석우는 사연을 소개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기로 유명하다. 혹시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는 질문에 강석우는 “굳이 눈물을 참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될 정도로 솔직한 게 방송의 트렌드가 아닌가 싶어요. 방송 전 눈으로 사연을 읽는 것과 방송에서 읽을 때는 감정이 너무 다르거든요. 눈물을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다행히 양희은씨가 옆에서 중심을 잘 잡아주시니까, 제가 마음 놓고 감정에 솔직하게 진행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양희은은 “아침에 일찍 와서 오늘 방송될 사연을 읽으면서 미리 눈물을 흘린다”며 나름의 감정 절제 노하우를 밝혔다. “방송에서 처음 사연을 읽으면, 눈물이 나서 도저히 못해요. 호흡도 나빠지고, 발음도 부정확해지잖아요. 감정이 복받치는데 울지 않으려고 참으면, 두통도 굉장히 심해져요. 사연을 먼저 읽으면서 시원하게 울고 나면 방송할 때는 눈물이 덜 나죠.”
골든 마우스요? 그냥 하루하루 충실할 뿐이죠!
“난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덤벼드는 게 없으니까 그냥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고 싶어요. 그냥 지금처럼 하다 보면 언젠가 골든 마우스를 받게 될 수도 있겠죠(웃음).”
옆에 앉아 있던 노사연은 “혹시 골든 마우스에 금이 들어가나요? 그걸 순금으로 해준다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데(웃음)”라며 농담을 던졌다.
“저도 브론즈 마우스를 받으려고 생각하고 방송했다면, 아마 못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좋아서 하다 보니까, 이만큼 온 거거든요. 사실 제가 성실하거나 끈기가 있는 편이 아닌데 이렇게 수상하고 보니 책임감이 생기네요.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방송 중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계속 라디오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라디오처럼 솔직한 매체는 없다. 진행자의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전달되는 게 라디오다. 때문에 청취자와 진행자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열린 마음으로 청취자를 맞이할 준비가 된 양희은과 노사연. 이들에게 지난 10년보다 더 빛나는 앞으로의 10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