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을 겪고 절망속에 있었지만 조카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죠”
지난해 전 국민을 큰 충격에 빠뜨렸던 국민배우 최진실의 죽음. 누나를 허망하게 보낸 뒤, 슬픔으로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배우 최진영이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을 통해 사람들 앞에 섰다. 아픔을 딛고 한층 성숙해진 최진영을 만나봤다.
지난 6월 초 연극 ‘한여름 밤의 꿈’ 제작발표회에서 만난 최진영. 흰 티셔츠에 뿔테 안경을 쓰고 나타난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서는 게 쑥스러운 듯 가끔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과거의 아픈 상처는 많이 거둬낸 것처럼 보였다.
최진영이 출연하는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은 ‘단 하나의 결점도 없는 셰익스피어의 첫 번째 걸작(해럴드 블룸)’이라는 극찬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원작의 탄탄한 스토리 구조를 기본으로 따뜻한 드라마와 유쾌한 웃음이 가미된 연극이다.
이미 1995년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둔 바 있는 이 연극은 당시 연출을 맡았던 한양대 최형인 교수가 다시 한번 연출을 맡았고, 당시 출연했던 이문식, 안내상, 홍석천 등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여기에 현재 최 교수의 제자인 최진영과 김효진이 새롭게 합세한 것. 최진영은 헬레나(김효진)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 행복한 남자 드미트리어스 역을 맡았다. 「쫓고 쫓기는 일방적 짝사랑에서 달콤하고 마법 같은 사랑을 연기할 예정이다.」
최진영은 한양대 09학번으로 입학해, 학업과 연극 연습을 병행하고 있다. 당시 그는 누나의 죽음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는데도 동생이 공부하는 것을 간절히 원했던 누나의 바람 때문에 입학시험에 응시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양대 최형인 교수 역시 최진영이 입학시험을 보러 왔던 날을 회상하며, 고민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최진영씨가 입학원서를 내고 난 후, 큰일이 터졌어요. 그래서 저는 진영씨가 시험 보러 학교에 오지 않을 줄 알았죠. 그런데 막상 시험 당일, 진영씨가 한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고민이 많았어요. 나이도 39세이고 앞으로 조카들도 키워야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올해 최진영은 당당히 한양대에 입학했다. 최 교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공부를 하고 싶다”는 최진영의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고 한다.
“최진영씨에게 잘할 자신이 없으면 포기하라고 했어요. 당신이 아니면, 그 자리는 또 한 명의 배우가 탄생할 수도 있는 자리라고 말했죠. 그런데 최진영씨가 의미심장하고 비장한 모습으로 한번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서 학교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최진영은 최 교수와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됐다. 최진영 역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최 교수님을 만나서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면서 “문득 선생님을 못 만났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고 있다”고 마음속 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최진영이 이번 연극에 출연하게 된 건 연출자인 최 교수의 권유 덕분이다. 원래 1학년에게는 연극 배역을 주지 않는 것이 통례. 하지만 최 교수는 최진영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기로 했다. 나이가 너무 많은 1학년이라, 학교를 졸업한 뒤에 작품을 하면 배역을 따내기 힘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저는 진영씨를 합격시킨 책임감을 짊어지고 가야 하잖아요. 진영씨가 안 그래도 나이가 많아서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들 텐데, 졸업 후에 연기를 하면 늙은 역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가능하면 기회 될 때 많이 작품을 하라고 했어요. 지금보다 더 멋있는 연기자, 청춘배우보다 훨씬 오래갈 수 있는 연기자, 대한민국이 기억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옆에서 최선을 다해 돕고 싶어요.”
최진영은 이런 최 교수의 배려에 고개를 숙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지난해 겪었던 깊은 슬픔이 다시 한번 생각이라도 나는 것일까. 한참 숙연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밝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큰일을 겪고 나서 절망 속에 빠져 지냈어요. 그런데 그 힘든 시기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이렇게 버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작품 생각만 해요. 이렇게 작품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죠.”
사실 최진영은 무대에 오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989년 뮤지컬에 한 번 서본 적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연극무대는 처음인 것. 때문에 최진영은 “작품에 누가 될까봐 조마조마하고 걱정이 많이 된다”고 밝힌 후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지도를 잘 받고 있다. 저 역시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지켜봐달라”고 전했다.
이번 연극에 같이 출연하는 홍석천이 옆에서 최진영의 말을 거들었다. 홍석천이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최진영이 ‘작품을 같이 하자’는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형인 교수는 영혼을 보듬는 치료사 같은 능력이 있어요. 저도 대학교 때 연기교육을 받으면서 최 교수님을 통해 커밍아웃을 결심했죠. 그런 놀라운 재주를 가졌기 때문에 최진영씨도 교수님을 통해 아픔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이번 작품에 대한 최진영씨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거에요.”
최진영이 슬픔을 극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나의 평소 바람대로 대학에 입학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앞으로 그의 연기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과 결의에 찬 눈빛에서 연기에 대한 애정과 열의를 읽을 수 있었다.
7~8월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한여름 밤의 꿈’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최진영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글 / 김민주 기자 ■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