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모를 성대 이상으로 무대에서 내려왔죠. 이제 다시 시작합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노래 좀 한다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애창곡으로 뽑는 명곡 ‘세월이 가면’의 한 소절이다. 이미 20년이 지났지만 제목만 들어도 멜로디와 음성이 선명하게 귓가에 맴돈다. 긴 시간을 뛰어넘는 명곡의 주인공, 최호섭을 찾았다. 그가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끝으로 무대에서 내려온 진짜 이유, 뒤늦은 고백을 들어본다.
최호섭(45)의 노래 인생은 열두 살에 이미 시작됐다. 최호섭은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 ‘로봇태권 V’의 주제가를 부른 ‘그 소년’이다. 그의 뒤에는 주제가를 만든 고 최창권 작곡가가 있었다. 그의 부친이다.
“아버지가 작곡을 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노래를 한 건 아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미리내’라는 교육 센터에 다녔어요. 발레나 한국무용, 연기, 노래 등을 가르치는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배우 양성소였죠.”
‘로봇태권 V’의 김청기 감독은 만화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어린이 합창단을 모색하던 중 ‘미리내’를 찾았다. 처음에는 최호섭이 섞인 어린이 합창단이 불러 녹음을 마쳤다. 그러자 김 감독이 “누군가의 목소리 하나가 요란하게 삐져나오는데 솔로 버전을 한번 불러보라”며 지목한 것이 어린 최호섭이었다.
“제 솔로 버전을 들으시고는 김 감독님께서 당찬 목소리가 좋다며 매우 마음에 들어 하셨고 결국 주제가로 쓰게 됐어요. ‘로봇태권 V’가 대히트를 치면서 저도 아이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죠.”
한국 뮤지컬의 개척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는 녹음 스튜디오와 무대였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한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아버지가 단장으로 있던 ‘예그린’이라는 뮤지컬 전문 극단이 있었어요. 패티 김 선배님이나 추상미씨의 아버지인 고 추송웅 선생님, 신구 선생님, 윤복희 선생님 등이 공연을 했죠. 저는 그 틈에서 아역으로 무대에 서곤 했어요.”
그가 점점 성장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던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 같은 거였다. 그에게 음악이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작곡가니까 가수가 되는 것이 남들보다 쉬운 점은 있었겠죠. 우선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했어요. 학창 시절에는 밴드 음악에 미쳐서 김현식, 들국화, 사랑과 평화, 김수철 선배 등을 만나려 투어 콘서트를 쫓아다녔어요. 제가 좀 극성이었죠. 제 평생 아버지 이름 팔았던 적이 딱 한 번 있었어요. 김수철 선배가 아버지에게 수업을 받았던 분이라 아버지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친해지고 싶었죠(웃음). 그 덕에 어린 나이에 많이 배웠어요.”
게다가 음악적 감각을 타고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 동생도 각각 작사가, 작곡가로 활동했다. 다름 아닌, 그의 데뷔곡 ‘세월이 가면’은 형 최명섭씨 작사, 동생 최귀섭씨 작곡으로 탄생된 작품이다. 곡을 발표하자마자 히트를 쳤고 최호섭은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앨범 발표는 끝이 났다. 매우 의아한 일이다. 왜일까?
갑작스러운 성대 결절로 좌절된 가수 생활
“갑자기 성대에 이상이 생겼어요. 하늘의 뜻이었을까요?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니 수술할 수도 없고 약도 없는 거예요. 제일 유명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했는데 제 성대 사진이 레지던트들의 수업 샘플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희귀한 경우라 하더군요. 결국 1년 동안 치료를 받다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성대 결절이 제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고 음악 한 가지밖에 모르고 살다가 세상을 보게 됐죠.”
젊은 시절 힘으로만 내질렀던 창법을 호흡으로 조절하며 지금의 성대에 최적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성대의 문제를 보듬고 조절하는 능력도 생겼다.
“장르를 국한하고 싶지는 않아요. 음악은 들었을 때 좋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단 몇 명이라도 저랑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예전 같은 사랑을 받으면 오히려 제가 당황하고 불편할 것 같아요.”
그는 9월 말에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있다. 14년 만의 일이다. 그는 그동안 방송계나 음반계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모두 거절했다.
“앨범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져서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이유로 거기에 맞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출연하는 것도 말이 안 돼요. 저는 명분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이제 준비가 되니 저절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음반, 올해는 분명히 냅니다!”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노래는 남녀를 불문하고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한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최호섭의 노래를 직접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들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니까 좋았지요. 그러나 리메이크라도 편곡을 해서 재해석하는 데 의미를 둬야 하는데 그 노래를 불렀다는 걸 알리기 위해 단순한 화제로 끝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아까웠어요. 객관적으로 볼 때 ‘참 훌륭한 버전이다’라고 생각한 곡은 없었어요.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노래는 다 잘 불렀어요.”
요즘 후배들, 노래는 잘하지만 음악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노래하는 데도 공부가 필요하단다.
“노래방 문화로 인해 일반 사람들도 울대가 열렸거든요. 그러니까 노래는 아는데 음악을 모르는 후배들이 많더라고요. 호흡과 발성, 리듬 이 세 가지만으로도 해야 할 공부가 얼마나 많은데 말이지요.”
그는 앞으로 40대의 저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일에 지친 40대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그의 새 앨범이 단발성 화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번 앨범을 시작으로 꾸준히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다.
“제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과거에 시련과 아픔이 있었던 사람도 이렇게 잘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많은 분들이 용기를 얻지 않을까요?”
또 하나의 이름, 뮤지컬 배우 최호섭
최호섭의 인생에서 음악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뮤지컬이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변신이나 제2의 삶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전 뮤지컬을 직업이라 여기지 않아요. 그냥 어릴 때부터 주위 환경이었고 생활이었어요. 제겐 사명감 같은 것이 있어요. 아버지께서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늘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뜻을 잇고 싶어요.”
창작 뮤지컬은 지원도 미비하고 제도적으로 힘든 점도 많다. 게다가 5년 전에는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초연 당시 작곡가로 참여했던 동생의 음악 저작권이 침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의 저작권에 대한 인식 부족이 원인이었다. 법정 공방이 3년이나 계속됐다.
그는 뮤지컬도 엔터테인먼트 분야처럼 산업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으로 인한 수익이 있어야 다시 양질의 뮤지컬을 만드는 데 쓰이고 좋은 스태프와 연기자를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외 로열티를 주지 않는 토종 뮤지컬이 창작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곧 우리 뮤지컬을 들고 해외 마케팅에 나설 생각이에요. 아버지가 제작한 ‘살짜기 옵서예’라는 뮤지컬이죠. 1966년 초연된 한국 뮤지컬의 효시예요. 계급주의 사회의 힘든 사랑 이야기를 다뤘는데 유럽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스토리거든요.”
또 최호섭은 직접 뮤지컬 무대에도 선다. 오는 7월 24일부터 9월 27일까지 서울 롯데월드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가족 뮤지컬 ‘아기 공룡 둘리’의 ‘고길동’ 역할로 출연한다.
“출연에 응한 것은 ‘아기 공룡 둘리’가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이 주효했어요. 수입 작품이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동안 해외 뮤지컬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무대에 설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수입 뮤지컬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아동극은 성인극과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아동극의 캐릭터는 아무리 악역이라도 악인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적절한 표현의 수위를 지키며 캐릭터를 중화시켜야 한다는 점이 쉽지 않다.
“둘리와 옥신각신 싸우는 부분이 많은데 절대 악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돼요. 아이들에게 ‘저 사람, 우리 아빠와 똑같아. 답답하고 짜증나’ 이런 느낌을 주며 웃음을 유발해야 하거든요. 또 성인 관객 입장에서 고길동을 통해 ‘어쩔 수 없는 가장’, ‘아빠들의 비애’도 표현해야 하구요.”
주인공에게 화를 내는 캐릭터지만 결국에는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최호섭표 고길동’의 숙제다.
“전 초등학교 5학년 때 만화영화 주제가를 불러 스타가 됐지요. 지금도 만화영화를 좋아해요. 만화에도 철학이 있고 메시지가 있어요. 어른들이 봐도 좋아요. 사실 현실은 굉장히 힘들고 지치잖아요. 이럴 때 꿈과 환상이 있던 그 시절의 ‘둘리’를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앞으로의 이야기
‘세월이 가면’을 즐겨 부르던 당시의 청소년들은 이제 대부분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둘리’ 공연을 보러 올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감회가 새롭고 신기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미혼이다.
“저는 항상 자유를 추구했던 것 같아요. 20대부터 생각해보면 집에서 머문 날이 별로 없었어요. 집 앞까지 차를 타고 와서도 차 안에서 그대로 자기 일쑤였죠. 집보다 혼자 있는 차가 더 편하더라고요. 또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면 다른 데 신경을 못 써요.”
가수 생활을 오래할 수 없었던 것도 이 같은 방랑벽있는 성격 때문이었다. 소속사에 속하기만 하면 그의 모든 감각기관이 움직이지 않게 되더란다.
“가수 활동을 접은 이유는 성대 문제뿐만이 아니었어요. 구속받고 싶지 않은 것도 크게 작용했죠. 우리나라 소속사는 ‘갑’과 ‘을’ 상황이 되면 구속하게 마련이잖아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저 역시 너무 고지식하게 생각한 거죠. 얼마전 예감이 뛰어난 후배가 ‘형 내년에 결혼하실 것 같아요’라고 하더군요. 이젠 믿고 싶어요.”
그의 바람은 하나다.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배부른’ 성공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는 ‘쟁이’로 남고 싶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절대 악인이 될 수 없어요. 요즘처럼 당장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유를 선물하고 싶어요.”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