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소나타’의 밤도둑 ‘밤안개’ 개그맨 이경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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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소나타’의 밤도둑 ‘밤안개’ 개그맨 이경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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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 미련있지만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전 생업에 종사해야죠”

‘공개수배’ 기사를 진행하는 순서는 따로 없다. 문득 궁금한 사람이 떠오르면 연락을 해보는, 약간은 주먹구구식이다. 그런데 종종 ‘궁금한 그 사람’ 자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에게 “누구 궁금한 사람 없어?” 하고 수소문하고 다닌다. 이번 회가 그렇게 섭외가 된 경우인데 ‘개그맨 이경래가 궁금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영광(?)의 주인공을 만나러 갔다.

[공개수배]‘달빛 소나타’의 밤도둑 ‘밤안개’ 개그맨 이경래씨

[공개수배]‘달빛 소나타’의 밤도둑 ‘밤안개’ 개그맨 이경래씨

방송활동 접은 지 10년
인기 프로그램 KBS-2TV ‘쇼! 비디오자키’의 ‘달빛 소나타’라는 콩트를 기억하는가. 부부 도둑단이 매일 담벼락에 올라 남의 집을 털려 하지만 결국 농담만 주고받다 “날 샜슈~” 하며 끝을 맺는 코미디다. 단 한 차례도 도둑질에 성공, 아니 담조차 넘어본 적도 없다. 착한 도둑(?) ‘밤안개’가 바로 개그맨 이경래(48)다. 그의 아내로 함께 공연했던 이경애도 떠오른다. 우리는 순진한 생각에 ‘배일집과 배연정’이 부부인 줄 알았던 것처럼 ‘이경래와 이경애’가 부부 사이인 줄 알았다.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달빛 소나타’가 벌써 20년 전의 콩트라는 것이 새삼 놀랍다. 세월은 흘러도 스타는 영원한 스타다. 이경래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가 인천 검단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수십 명의 단체 손님도 한번에 받을 수 있는 큰 규모의 식당이었다. 마침 말복이라 일손이 부족해 그가 직접 화덕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화덕에 고기를 초벌구이한 다음, 기름을 빼고 손님상에 올립니다. 그러면 참나무의 향기가 고기에 배고 아무리 오래 불 위에 올려놓아도 고기가 딱딱하게 굳지 않아요.”

그는 기자와 제대로 인사도 나누기 전에 ‘화덕 용비어천가’를 읊었다. 그는 화덕구이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요식업체 사장님이 돼 있었다.

“이미 방송을 그만둔 지 10년이나 됐어요. 그동안 안 해본 사업이 없습니다. 시행착오 많이 겪었죠. 연예인들이 식당을 많이 하는 이유는 지방 행사를 다니며 자연스레 유명한 맛집 음식을 먹어보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맛에도 일가견이 생기고 왠지 내가 하면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사업을 할 때는 리스크를 생각하고 신중하게 투자를 해야 하는데 무조건 된다는 자신감이 실패의 한 원인이죠.”

여행업, 나이트클럽, 호프집까지 안 해본 사업이 없다. 요식업계에서도 실패를 많이 겪었다. 오리 전문점을 열었으나 23일 만에 조류독감이 유행해 폐업했다. 곰탕집을 열었더니 이틀 만에 광우병 비상이 걸렸다.

“전부 수업료였죠. 아주 비싼 수업료. 지금은 돈을 버는 단계가 아니고 말하자면 학자금 대출을 갚는 중이에요. 요식업은 전체 중 3%만이 성공한다는 통계자료가 있더군요. IMF 때 대량 실업자가 발생하면서 대부분 음식업종을 선택했죠. 지금 보면 거의 문을 닫았어요. 제일 만만해 보이지만 사실은 제일 어려운 업종입니다.”

이경래는 우스갯소리로 “내가 사업 실패한 것으로 따지면 이봉원은 조족지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을 묵묵히 참고 고생하며 내조한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어요. 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잠들어 저녁에 일어났죠. 그리고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8개월을 보냈어요. 그러자 20년 동안 전업주부였던 집사람이 인터넷 구직란을 뒤져보더라고요. 그러더니 피부과 상담 실장으로 취직을 한 거예요. 아내가 결혼 전에 간호사로 일했거든요.”

남편의 나태해진 모습을 보다못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20년을 쉰 나도 하는데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줬다. 이경래는 아내의 마음을 알고 한동안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고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마침 지인이 화덕 특허를 갖고 있어 관심 있게 봤더니 수익성이 보였다. 소비자의 입맛은 점점 고급화되고 있는데 그런 구미에 딱 맞는 것이 참나무와 참숯을 이용한 고기 화덕구이였이다. 그는 고양시 원당과 인천 검단 두 곳에 식당을 차렸다. 이제 직원 30명을 둔 어엿한 고깃집 사장이 됐다. 그의 꿈은 화덕구이로 자신의 프랜차이즈를 설립하는 것이다.

“‘요식업계에서는 ‘3년을 유지하지 않으면 성공했다고 하지 마라’는 말이 있어요. 1호점은 접었고 2호점은 시작한 지 1년이 됐어요. 여기 3호점은 두 달이 됐고요. 그러니 아직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공개수배]‘달빛 소나타’의 밤도둑 ‘밤안개’ 개그맨 이경래씨

[공개수배]‘달빛 소나타’의 밤도둑 ‘밤안개’ 개그맨 이경래씨

보통 연예인은 이름만 빌려주고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로열티 명목으로 수익을 취하는 형태가 많다. 그러나 그가 직접 음식의 맛에서 고객 서비스까지 신경 써야 하는 직영점 형태로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이후,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궂은일을 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가게의 모든 것이 제 얼굴이니까 화장실 청소부터 담배꽁초도 주워야 해요.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일이 많죠. 적자만 안 나면 언젠가 웃는 날이 있겠죠. 버틸 만해요.”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연예인이라는 간판을 내세우기보다는 오로지 맛으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시작이다.

그때 그 시절 이야기
이경래는 얼굴도 마음도 곱디고운 지금의 아내를 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술을 마시고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병이 다 나았는데도 그는 병원에 자꾸 찾아갔다. 어떤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며 이상형을 물어보면 그녀를 의식해 ‘청순한 간호사’라고 답했다.

“그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에 개그맨실에 간호사가 50여 분 다녀가셨어요. 돌려보내느라 고생했지요. 당시는 제가 인기가 좀 있었던 시절이라. (웃음).”
이경래는 제1회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2위인 은상을 수상하고 개그계에 데뷔했다. 당시 4위가 심형래였고 대학 친구인 최양락은 고배를 마셨다. 최근 예능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오랜 친구 최양락의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개그맨 하기 전부터 친구였어요. 팽현숙씨와 결혼하기 전에는 저랑 쭉 한집에서 살았으니까(웃음). 이젠 서로 생활이 다르니까 잘 만나지 못하죠. 저번에 후배 개그맨 오재미의 상갓집에서 오랜만에 만나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셨어요. 개그 감각 뛰어나고 노력도 많이 하는 친구입니다.”

한 가지 재밌는 얘기가 있다. ‘쌍꺼풀 개그맨’ 하면 대부분은 박명수가 떠오르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경래가 쌍꺼풀 개그맨 1호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개그맨의 사나운 눈매와 인상은 좋은 요소가 아니었다.

“사나워 보인다고 주변 사람들이 자꾸 권해서 고향 대전에 가서 수술을 하고 왔어요. 그날 이봉원이 수술 기념으로 술을 먹자네요. 그래서 마셨죠. 그랬더니 아직까지 부기가 안 빠지네(웃음). 이후로 이봉원, 최양락도 연달아 쌍꺼풀 수술을 하더라고요.”

20년 전 코미디 프로그램은 당대 최고의 인기 아이템이었다. 딱히 놀이 문화가 없던 시절에 온 가족이 다 함께 모여 할 수 있는 일이 ‘코미디 시청하기’밖에 없었다. 또 코미디를 방영하는 TV 채널은 2개뿐이니 검증된 바 없으나 아마도 상당히 높은 시청률 기록했을 것이다.

“지금도 절 기억하고 찾아와서 사인을 부탁하는 분들이 많아요. ‘요즘 왜 안 나오세요?’라고 묻는 말도 저는 반가워요. 그래도 기억해주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가끔 아르바이트로 지방 행사 진행이 들어올 때가 있어요. 무대에 서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편하다니까요. 웃겨서 돈버는 게 훨씬 편합니다!”

이경래는 앞으로 ‘연예인 2세 가족’에 합류할지도 모른다. 그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아들 수빈(20)군이 미래의 스타를 꿈꾸며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면 우여곡절이 많아 말이 길어진다며 앞에 놓인 커피로 목을 축인다.

갈비살을 능숙하게 굽는 폼이 제법 고기집 사장님 같다.

갈비살을 능숙하게 굽는 폼이 제법 고기집 사장님 같다.

미래의 꿈, 아들 이야기
“아들은 원래 축구선수가 꿈이었어요. 그렇지만 아비 입장에서 볼 때 신체구조나 재능이 부족했죠. ‘너 운동하면 다른 거 못해. 분명히 커서 후회한다. 성공 못하면 아주 비참해진다구!’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기도 수차례…, 그래도 고집을 굽히지 않으니 정말 미치겠더군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주전으로 뛸 기회를 얻기 위해 일부러 강원도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키기도 하고 중학교 때는 호주로 축구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축구가 안 되면 영어라도 배워오라는 심정으로 보냈어요. 6년을 그곳에서 지냈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한국에 들어왔죠. 축구로 대학을 보내려는 심산이었는데 역시 기량이 안 되더라고요.”

아들이 고3 때 광주로 시합을 갔다가 다리를 크게 다쳐 돌아왔다. 속상한 마음에 아들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화를 냈고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아들도 그 길로 가출을 하려 했다.

“아들을 데리고 횟집에 가서 새벽 5시까지 폭탄주를 마셨어요.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깨달은 바가 있는지 그 다음날 축구 유니폼을 학교에 반납하고 토익 학원을 가더군요.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연기학원을 보내달라고 하대요.”

아들은 아버지의 끼와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연기 공부할 시간이 얼마 없었음에도 연극영화과에 당당히 합격한 것만 봐도 말이다.

“교수 면접을 보는데 ‘아버지는 요즘 뭐 하시냐’는 질문을 받았대요. 아들은 ‘몰라요. 그 양반 안 나올 만해요’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교수가 파안대소한 모양이에요. 당찬 모습이 인상 깊다며 좋은 점수를 준 것 같아요. 요즘 방학인데도 공연하러 다니느라 아주 바빠요.”

아들이 장난조로 “아빠, 나 좀 키워줘” 하면 그는 “너 키워줄 힘이 있으면 내가 나간다”라며 서로 웃는다.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연기에 대한 그의 미련을 느낄 수 있다.

“가끔 TV를 보면서 내심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항상 벤치에 앉아 있던 야구선수가 어쩌다 대타로 나가면 좋은 공을 칠 수 있겠어요? 개그도 마찬가지예요. 계속 애드리브를 하던 사람이 해야 연관성을 갖고 재밌는 거죠. 그리고 PD들도 안 쓰던 사람 쓰면 불안하잖아요. 모험보다 안전하게 가야 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거죠.”

그 역시도 미련은 있지만 불투명한 앞날에 쉽게 자신을 내던질 수는 없다. 지금은 우선 생업에 충실하는 것이 정답이다.

“연예인들이 언제나 ‘갑’의 입장이거든요. 어딜 가도 대접받는 쪽이고 늘 우선시되죠. 그래서 전 ‘을’의 입장을 전혀 몰랐어요. 왜 우리가 싸울 때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이젠 제가 고객의 비위를 맞추는 완벽한 ‘을’이 됐지요.”

인생은 공부다. 삶은 실패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이다. 그는 아직 직원들의 월급날이 두려운 사장님이다. 사업이 안정되고 그가 없어도 착착 식당이 운영되는 날을 꿈꾼다. 그때는 못다 한 연기의 꿈에 살짝 한눈을 팔아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한 무대에서 세대를 넘나드는 웃음을 주는 날이 온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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