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멋진 놈’, 내 곁의 연인이 되다
“실제로 제 나이와 비슷한 30대 회사원 역할을 맡았어요. 적당한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적당한 성공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런 인물이에요. 꿈이 있었지만 구석에 묻어둔 채 현실과 타협하고 적응하면서 살아가요. 누구나 그렇듯이 말이죠. 사랑 앞에서도 들뜨기도 했다가, 손 내밀까 주춤거리기도 했다가, 상처받기도 하고요.”
영화 ‘호우시절’은 사랑의 기쁨과 슬픔, 상처와 후회 등 사랑으로 새겨지는 삶의 흔적들을 짚어내는 것이 ‘전공’인 허진호 감독의 새 영화다. 유학 시절 서로 설레는 감정이 있었지만 사랑인지 아닌지 미처 확인조차 못하고 헤어졌던 두 사람이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만나 ‘진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정우성과 중국의 인기 배우 고원원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영화 제목처럼 사랑 또한 때가 있고, ‘그 때’에 비로소 삶을 적실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랑의 감정에 대한 타이밍을 이야기하는 영화예요. 그래서 평범한 일상에 얽힌 잔잔한 감정들을 따라가야 했고요. 처음에는 물결처럼 파고 들어오는 이런 감정들을 잘 표현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잔잔히 오래 가는 사랑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아 선택했어요.”
강렬하고 짜릿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젖어가는 마음, 그리고 당장의 행복과 상처를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며 서로를 긍정하는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됐다고 말하는 그다. ‘아저씨 정우성’이라는 짓궂은 기자의 말에도 “내가 ‘아저씨’라는 단어를 받아들여야 할 나이라면 멋진 남자, 완벽한 남성이라는 뜻으로 ‘아저씨’의 정의를 바꾸도록 노력하겠다”는 재치 있는 답변을 할 만큼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살면서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자 관계인 ‘사랑’에 대한 생각 또한 더욱 깊어졌다고 털어놓는다.
“영화에서는 저와 고원원씨가 미국 유학 시절 친구라는 설정상,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영어로 소통하는데 영어 연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심했어요. 대충 대사를 외워 뱉는 것과 지금 내 말의 의미를 마음에 함께 가져가며 연기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요. 게다가 상대역과 제가 각자의 모국어도 아닌 제3의 언어를 쓰니까 함께 대사를 맞추고, 서로를 보이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랑할 때 같은 언어를 써도 상대의 얘기를 잘 듣지 않기도 하고, 못 알아듣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면서 맞춰 나가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인 것 같아요.”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차분히 풀어놓는 정우성을 보면서 멀게만 느껴지던 ‘멋진’ 그도 매 순간 잔잔한 감정에 흔들리는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올가을 누군가 필요하다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제 한 발 더 내 곁으로 다가온 그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