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어려운 만큼 절박했고, 그만큼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죠”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할 때였다. 무대에 선 안석환(50)은 이제껏 알아왔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굶주린 드라큘라가 피를 빨아들인 후 기운을 찾듯, 그의 눈에는 생기가 넘치고 표정과 행동에는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자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는 그는 TV나 영화로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유명한 배우였다. 1987년 데뷔해 한국연극협회 최우수 남자 연기상, 동아 연극상 연기자상, 세계연극제 연극인이 뽑은 인기배우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 대부분의 상을 휩쓸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에게 저런 면이 있다니?’ 하고 느꼈던 것은 무대는 그에게 가장 친숙한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딱 5년만 고생하겠다고 시작한 연극배우
안석환의 배우 인생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는 대학 연극 동아리에서 운명처럼 연극을 만났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들어간 대학이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어요. 평생 주판과 전표를 앞에 두고 살고 싶지도 않았고 좀 더 나은 생활을 바랐지요. 그래서 대학에 갔어요. 대학에 들어가보니 동아리는 하나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컴퓨터, 영어 등 많은 동아리를 기웃거렸죠. 연극 동아리에 갔더니 매일 술을 마시는 거예요.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멋있어 보였고요.”
한자리에서 소주 13병을 마시기도 했을 정도로 그의 대학 생활은 연극과 술, 낭만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돈을 벌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제대한 뒤 주경야독이 시작됐죠. 그 시절 운송업체에서 일도 했고, 대학에서 공부도 했고, 동아리에서 연극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 회사생활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게 답답했거든요.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형처럼 조정당하며 사는 것 같았죠.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직업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었어요. 당시 친형이 같은 회사 간부였고, 저는 노조원이었는데 형을 통해 압력이 들어오는 것도 부담스러웠고요.”
“1990년대 초반까지 연봉 400만원 정도였어요. 연극배우로서는 많이 번 편이었죠. 약속한 5년은 8년으로 넘어갔죠. 돈이 없어도 다 살게 되더라고요. 천원으로 하루를 살기도 했으니까요.”
어려운 생활이 계속됐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나 불안한 나날이었다.
“20대에는 제가 정말 큰 사람 같았어요. 그런데 30대가 되니 정말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경제적으로나 직업적, 가정적으로도 제대로 된 게 없었으니까요. 누구에게 사랑을 받거나 하지도 못했고 정말 이기적으로 살았어요. 사람이 잘 안 되면 소심해지고 잘 삐치고 술 먹고 주사도 더 심해지죠. 작은 일에도 괜스레 트집 잡게 되고, 고성방가하고. 괜히 사회가 엎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생기고….”
그는 1종 대형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 그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딴 것이다. 그는 겨울에 버스가 얼지 않도록 시동을 걸어주는 아르바이트나 영종도에서 건설 노무자로 일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고(故) 박광정이 연출했던 연극 ‘마술가게’라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 연극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3분 정도 등장하는 경비원이었다. 그는 그 작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역할이 작고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대사 전체를 더듬어봤어요. 그랬더니 5분이 되더라고요. 거기에 말끝마다 개XX를 집어넣었죠. 그래서 6분이 됐어요. 거기에 제가 극을 넣어 15분짜리 모노드라마를 만들었어요. 반응은 폭발적이었죠. 제 연기가 좋다는 평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어요.”
영화 두 편으로 새로운 연기 인생 맞아
운전면허까지 따놨지만 계획했던 아르바이트는 할 수 없었다. 쉴 틈 없이 연극 무대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한 달에 일주일을 제외하고 매일 공연일정이 잡혔다. 그렇게 연극배우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그는 1994년부터 연극과 드라마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입 면에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1994년에는 영화 두 편을 찍었어요.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과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였죠. 연극은 세 편을 했고요. 그렇게 하니 1년에 1천5백만원 정도 벌게 되더라고요. 정말 행복한 한 해였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두 배, 또 두 배가 되더라고요.”
그는 이제껏 가장 열심히 연기했던 작품으로 1994년 출연한 이 두 영화를 꼽는다. 온힘을 다해 연기에 임했던 시절이었다.
“두 작품을 통해 제가 영화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그때는 어려웠으니까 절박했고, 그만큼 열정이 컸던 것 같아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동성애자 기관원으로 나왔는데, 그 아이디어를 제가 냈어요. 두 작품으로 칭찬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영화를 많이 찍었죠. ‘넘버 쓰리’, ‘하면 된다’ 등의 영화가 기억에 남네요.”
그는 올해만 해도 드라마 ‘꽃보다 남자’, ‘파트너’, ‘신데렐라맨’,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전설의 고향’ 등에 출연했다. 그는 어떤 드라마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마치 그 캐릭터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그러나 베테랑 연기자인 그에게도 연기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다.
“저는 노란색을 칠하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그 색깔이 안 나올 때, 아무리 연습해도 내가 생각하는 그 지점까지 못 갔을 때 절망하게 되죠. 특히 연기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배우와 하모니와 소통이 중요하거든요. 혼자 하는 연기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하모니가 제대로 안 될 때는 많이 속상해요.”
“당시는 군사 정권이었기 때문에 대본이나 포스터 등 모든 인쇄물들을 다섯 권씩 검열 기관으로 보냈어요. 검열관이 불시에 공연을 보러오기도 했죠. 제가 했던 공연에도 공연 불가 작품이 있었어요. 사회를 풍자한 작품이 많았죠. 많은 작품들이 공연 중지 명령이나 정정, 수정 명령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다고 검열이 족쇄가 되어 표현하고 싶은 걸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수들이 금지 가요를 계속 불렀던 것처럼 연극인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을 금지시킨 것은 연극쟁이들 자존심에 칼을 댄 거나 다름이 없죠. 배우들에게 작품은 곧 자기 자신이잖아요. 다르게 표현해야 했지만, 어차피 표현하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돼지를 소로 그릴 수는 없잖아요. 그때는 검열관의 눈을 어떻게 돌리게 하느냐가 고민이었어요.”
쥐어 사는 남편, 강요하지 않는 아버지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가족이다. 그는 가족을 가장 중요한 소우주라고 표현한다.
“저는 가정 안에 있지만 국가라는 우주 안에 있어요. 사회를 생각한다고 해서 가정에 소홀하지도 않죠. 가장 중요한 건 소우주니까.”
알 듯 말 듯한 말 속에서 가족을 생각하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언뜻 가부장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일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가 아내에게 쥐어 산다”고 말한다.
“엄청 쥐어 살죠. 그래도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저는 일리 있는 말에는 절대 잔소리를 하지 않죠. 잔소리를 할 때도 ‘어허~’라는 한 글자로 표현해요. 그래도 절대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해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는 거 아닌가요.”
자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절대 강요하는 부모는 아니다. 그저 “열심히 해라” 할 뿐이다. 게다가 그는 무조건 아이 편이다. 아내가 아이를 야단치는 걸 막다가 부부싸움으로 번질 정도다. 무조건 딸의 편을 드는 아버지이지만, 딸이 자신처럼 배우의 길을 간다고 한다면 어떨까?
“솔직히 말리고 싶어요. 그런데 자식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돕게 되지 않을까요. 인생은 모르는 거잖아요. 사람은 원하는 걸 해야 하고, 그래야 즐겁고, 즐거워야 성공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다행인지 초등학생인 딸의 꿈은 간호사, 의사, 과학자로 바뀌면서도 아직 연기자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워낙 아이 엄마가 아이를 잡아놔서…”라며 웃는다. 그는 아내와 연극 기획자와 연기자로 만났다. 부부가 한 작품을 기획하고, 또 연기하면 좋으련만 결혼 전 ‘주라기 사람들’로 만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마 같이 일할 가능성은 영원히 없을 것 같아요. 본인이 싫대요. 하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이가 100일도 안 됐을 때였어요. 일은 아이가 세 살 지나면 하라고 했으나 못했고요.”
그는 눈물이 많다. ‘병원 24시’나 리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눈물이 많아서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그러니 연로한 부모님을 생각하면 오죽할까.
“부모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요. 앞으로 아무리 행복하게 사신다고 해도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지병이 있으시고, 그 모습을 보면 참 마음이 안 좋아요. 그래도 (살가운) 말씀은 잘 못 드려요.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아들이 무뚝뚝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시나 봐요.”
연극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그렇게 반대했던 그의 부모님은 이제 아들이 자랑거리다.
“부모님께 데뷔 무대를 보여드렸는데, 너무 어려운 작품이어서 잘 모르셨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TV에 나오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시죠. 일일연속극에 출연하면 더 좋아하세요. 당신 아들이 TV에 나온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가 봐요.”
안석환에게는 그가 만든 십계명이 있다. ‘계산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남에게 믿음을 준다’, ‘원수를 만들지 않는다’…. 왜 그런 십계명을 만들었냐고 물으니 “오랫동안 이 직업을 갖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 한 마디로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했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