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화(54)가 노래 인생 50년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녀의 아버지다. 전남 영암 출신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연예인은 모두 딴따라’로 폄하하던 시절, 남다른 혜안을 갖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딸을 뒷바라지하며 가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이끌었다. 이미 아버지 하종오옹(89)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반평생 가까운 날들을 딸, 하춘화를 위해 희생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지만 아무도 하지 못했던 뼈아픈 충고 역시 언제나 아버지 몫이었어요. 대중 예술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가수 생활과 공부를 철저히 병행시키셨죠. 밤이면 과외 선생님과 공부를 했고 낮이면 전국 각지를 누비며 순회공연을 다녔어요.”
하춘화는 이번에 아버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다. 가요 인생 48주년을 기념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제목은 「아버지의 선물」이다.
“남들은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진짜 자서전은 80주년 공연쯤 돼야 낼 수 있는 거구요. 이번 책은 제 노래 인생 50주년을 정리하고 간접적으로는 1960, 70년대 가요사를 엿볼 수 있는 수필집 같은 것입니다. 가장 큰 목적은 저를 가수로 만들고 키워준 아버지에게 바치는 선물이고요.”
이 책은 욕심이나 욕망으로 아이를 키우려다 진정한 행복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요즘 부모들에게 주고 싶은 삶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자식을 키우는 과정은 끊임없는 선택과 고민의 연속일 겁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 선택이 올바른지 의문이 들 거예요. 그런 분들에게 교육의 기본 메시지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가수를 시작했던 당시에는 대중 예술에 대한 폄하가 굉장히 심했다. 때로는 그녀의 아버지를 여섯 살 딸을 앞세워 재주놀음이나 시키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기도 했다.
“그때 생각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처음 제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탄 때였죠. 그날 집안 식구들은 기뻐하며 모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러나 곧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참 한심한 세상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한마디가 온 가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죠.”
“저야 어려서 잘 몰랐지만 부모님은 알게 모르게 이런 비난과 야유를 숱하게 들었을 거예요. 중학교 때도 ‘어린 나이에 무슨 가요냐’는 소리에 늘 머리를 숙여야 했으니까요.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을 잘하는 아이는 신동이지만 대중가요를 부르는 전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죠.”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힘든 세월을 어떻게 견뎠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새삼스레 물어보냐며 말을 아꼈지만 결국 짧게 말문을 열었다.
“그땐 누가 뭐라 해도 안 들리고, 안 보이더라. 아무래도 그때 내가 뭔가 씌었었나 보다(웃음).”
그것은 섣부른 오만이 아니었다. 자식을 좋아하고 자식이 가진 재능을 키워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이자, 철학이었을 것이다.
기록의 여왕이 되다
50년 가까이 가수 활동을 한 하춘화에게는 ‘기록’이 많다. 그녀의 기록들을 보면 마치 살아 있는 한국 대중 예술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만 6세 최연소 음반 출시, 개인 공연 최다 횟수 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최초의 평양 공연, 최연소 옥관 문화훈장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기록을 세운 때는 세 살 때라고 말할 수 있어요. 라디오에 나오는 가요를 듣고 따라 하기 시작했고 전 3백여 곡의 레퍼토리를 가진 꼬마가 돼 있었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엄마 무릎에서 떨어지기 싫어할 어린 나이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좋아 한 번 듣고도 금세 따라 했었다. 아마 평생 노래로 살아가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세계적으로 최연소 가수 데뷔를 해 기네스북에 올랐죠. 당시 일본, 미국 등에서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러 찾아올 정도로 화제가 됐어요. 그리고 지난 1991년 5월에는 1261일이라는 기록으로 ‘개인 공연 최다 횟수’를 달성했어요.”
하춘화는 곧 국내 최연소 음반사 전속 가수가 됐다. 첫 음반을 낸 후 가장 어린 가수라는 특징 외엔 히트곡도 인기도 없었던 그녀에게 미도파레코드(현 지구레코드)의 대표가 5년 전속 가수 계약을 제의했다.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7년 안에 하춘화가 가요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다.
“당시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만원이었어요. 저는 1년에 3만원이라는 계약금을 받고 전속 가수가 됐죠.”
가수가 된 지 6년 만에 ‘물새 한 마리’라는 곡이 히트를 쳤다. 그녀를 사람들에게 알린 곡이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고 무대에서 부르면 뭉클해지는 곡이다. 더불어 그녀의 기록은 점점 늘어났다. 1971년 8월 잡지기자협회로부터 받은 ‘핑크 리본상’을 시작으로 수백여 개의 상을 받았다.
1971~1977년 MBC 10대 가수상을 연속 수상했고 TBC 방송가요 대상 4회 연속 수상, TBC 7대 가수상 연속 7회 수상을 했다.
“특히 TBC 방송가요 대상은 동일인이 4회 연속 수상할 수 없다는 규정을 깨고 수상해 더 특별히 기억이 남네요. 그렇지만 인기가 많으면 시기 질투가 많은 법, 안 좋은 기억도 많아요.”
“당시 여자 가수로서는 제가 독보적이었고 두 사람의 인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했던지라 여기서는 남진씨와 저기서는 나훈아씨와, 이렇게 번갈아 함께 수상한 적이 많았어요. 그러자 일부 열성 팬들의 항의가 이어졌죠.”
‘왜 네가 남진과 그 상을 받느냐?’ ‘왜 나훈아와 같이 받느냐’ 등의 항의에 시달렸던 것. 왜곡된 팬덤 문화는 요즘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대중문화가 뜨겁게 성장하던 시절의 한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가요를 불러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 가장 곤란했던 때는 민요풍 가요 ‘잘했군, 잘했어’를 불렀을 때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매어놓은…’ 하는 노래 있잖아요. 제가 열여섯 살 때쯤 녹음했던 노래예요. 상대 역할을 하던 남자 가수가 제 부모님 또래인 고봉산 선배님이었어요. 도저히 ‘영감~’ 하고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제작자는 이런 연기도 못하면 진정한 가수가 될 수 없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억지로 했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고 프로듀서에게 또 혼이 났다.
“무서워서 울다시피 하며 노래 녹음을 마쳤어요. 타이틀곡이 아니라 앨범 제일 밑에 편집된 곡이었는데 레코드 발매가 된 후에 무슨 일인지, 앨범 수록곡 중에 ‘잘했군, 잘했어’만 호응이 있는 거예요. 결국 맨 위로 재편집하고 레코드를 다시 냈죠. 그런데 그때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요즘도 무대에서 잘 안 불러요(웃음).”
전직 대통령들과의 크고 작은 인연
하춘화에게 1970년대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청와대에서 외빈들을 위한 만찬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한국 대표 가수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잦았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 행사에 초청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전직 대통령들과의 숨은 인연들이 많다.
“육영수 여사께서는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많이 여셨어요. 그럴 때면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전화해서 ‘하양, 나 좀 도와줘’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어르신들 앞에서 열창을 했어요. 너무나 인자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육영수 여사 별세 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할 때도 여전히 자선 공연을 도왔다. 그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그녀를 곧잘 격려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다. 재임 시절 남북 분단 40주년을 기념하는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이 평양에서 개최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열리는 평양 공연에 남자 가수 대표로는 나훈아가, 여자 가수 대표로는 그녀가 지목된 것이다. 이는 ‘하춘화는 꼭 가야 한다’라고 못 박은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작용한 결과였다. 난생 처음 평양 땅을 밟고 북한 동포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선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후 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평양 공연은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가 됐어요. 사실 저의 오랜 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재임 시절부터 ‘무죄’와 ‘영암 아리랑’을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으신, 제 공연의 단골손님이시죠. 때로는 30~50명 참모들까지 동원해서 공연장을 찾으셨어요.”
그런가 하면 ‘베사메무초’를 가장 좋아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본인의 제안으로 청와대 공연 때 듀엣을 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신분이 아니었던 때 그녀의 공연장을 찾아 ‘목포의 눈물’을 신청했었다.
“비록 제 노래는 아니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담아 애절하게 불렀어요. 그날 공연 덕분인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 공연에 불러주셨어요. 제 40주년, 50주년 공연에도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오셔서 보고 가셨어요.”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다. 이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환경미화원 돕기’를 주제로 45주년 공연을 열 때의 일이다. 공연을 앞두고 직접 서울의 모든 구청을 돌며 도움을 구했던 하춘화의 모습은 당시 이 시장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단다.
“비서진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간부회의 때마다 당시 이 시장은 ‘하춘화 마인드’를 예로 들며 공직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강조하셨다고 해요. 그래서였는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이명박 출판기념회’에 초대되기도 했어요. 이명박 정부 초창기에 ‘하춘화가 국회의원이 된다더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대통령들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어온 하춘화. 그녀가 느낀 점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결국 보통 감성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냉철하고 강직해 보여도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었다. 업적과 시대적 평가를 떠나 그녀가 전직 대통령들과 따스한 정서적 교감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제1 의무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대중 예술인도 대통령 못지않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에게 때로는 기쁨을 주고, 때로는 슬픔을 위로했던 가수 하춘화는 꿈이 하나 있다. 대중가요의 발자취와 가치를 엿볼 수 있는 기념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서 출발한 그 꿈은 50년 세월을 함께해왔고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꿈이 있어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자료 제공 / 「아버지의 선물」(중앙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