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작곡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구혜선. 그녀는 평소 존경해온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이사오 사사키에게 조언을 받기 위해 무작정 그동안 써온 자신의 작품을 보냈다. 구혜선의 음악을 들은 사사키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이 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연기자 이외에 너무도 많은 수식어를 갖게 된 구혜선과 일본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이사오 사사키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에게는 혈액형 외에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음악이다
말이 필요 없었던, 음악을 통한 교감
처음 인연은 이랬다. 구혜선이 감독으로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를 촬영하고 있던 때였다. 배경음악으로 이사오 사사키의 ‘스카이워커’를 넣고 싶어 무작정 연락을 하면서 두 사람에게 친분이 싹텄다. 이어 그녀는 친절하게 응해준 사사키에게 자신이 그동안 써왔던 작품을 보냈다.
“아마추어치고는 훌륭했고, 악상도 독특했어요. 혜선씨가 책도 내고 그림도 그린다는 걸 알았는데, 처음 음악을 듣고, ‘이렇게 재능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봤다. 용서할 수 없다’고 그랬죠(웃음).”
둘의 만남은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사사키는 쉬운 한국말은 알아듣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보디랭귀지나 OK와 같은 간단한 영어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함께 음악을 작업해보니 말이 따로 필요 없었다.
“내 생각대로 해도 되는지 묻고는 편하게 작업하게 되었어요. 제가 혜선씨 음악을 편곡했는데, 그렇다고 손을 많이 댄 건 아니에요. 적당히 제 스타일대로 편곡해서 연주했죠. 악보를 보고 이 부분은 이렇게 소리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직접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해보이고, 그게 좋다면 반영이 됐죠. 혜선씨도 ‘이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썼는데 어때요’ 묻기도 했고요.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는데, 대부분은 피아노 연주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어요.”
구혜선은 “사사키씨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다”라며 웃었다. 실제로 그는 기자와 만났을 때도 다소 낯을 가리는 듯했다. 왠지 그 모습이 소녀같이 순수한 그의 음악을 닮아 있는 듯하다.
“제 음악은 그다지 부끄러움을 타는 음악은 아니지만, 저는 평소 낯을 가리는 편이에요. 친해지기 전까지 부끄러움을 많이 타죠. 대체로 젊은 분과 만나면 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요즘 일본에서 구혜선은 유명 인사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 TV를 잘 보지 않았던 사사키는 처음에는 그녀가 유명한 배우인지 몰랐다.
“사실 일본의 연예계도 잘 몰라요. 혜선씨를 소개받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정말 유명한 배우더라고요. 당시 TV에서 ‘꽃보다 남자’를 하고 있어서 찾아봤죠. 친구 중 ‘꽃보다 남자’의 열혈 팬이 있는데 혜선씨와의 만남을 부러워했어요.”
구혜선은 사사키와의 음악 작업 틈틈이 펜화를 그렸다. 그렇게 그려진 펜화는 사사키가 최근 발매한 10번째 정규 앨범 「The Way We Were」의 재킷 사진으로 쓰였다. 기자가 그에게 마음에 드는지 물으니,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색깔이 핑크색이라 부끄럽다”며 펜화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 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때 혜선씨가 틈틈이 펜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게 혜선씨의 그림 스타일을 알게 되었죠. 시간 날 때마다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생각을 그려내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소설, 미술, 음악… 모두 영화를 위한 것
구혜선과 이사오 사사키, 두 아티스트가 작업한 작품은 구혜선의 첫 번째 소품집 「숨」과 사사키의 「The Way We Were」에 담겼다. 사사키는 구혜선의 음반 타이틀곡 ‘골목을 돌면’과 ‘별별이별’의 연주를 맡았고, ‘별별이별’은 사사키의 음반에도 수록되었다.
구혜선은 단순히 자신의 음악 세계를 알리고자 음반을 발매한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영화에 쓸 음악을 위해 작곡을 하고 녹음을 한 것이다. 그녀는 감독으로 첼리스트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음악 영화인 ‘구술(가제)’의 연출을 준비 중이다.
“내년쯤 개봉할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어요.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에 들어갈 OST를 직접 작곡해서 만들었어요. 음악은 영화를 촬영한 다음에 정해지는데, 저는 다른 방향으로 풀고 싶었어요. 영화보다 음악을 먼저 발표해 대중과 친해진 다음에 영화에 담고 싶었죠.”
곡을 쓰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비용 때문이었다.
“저예산 영화를 만들다 보니 비용을 절약하는 게 우선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아마추어로서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 또한 저의 생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나누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영화를 위해 음악을 작곡한 것은 아니었다. 작곡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작곡에 관심이 많았지요. 제가 지금 스물여섯 살이니까 20년 정도 준비한 셈이네요.”
‘꽃보다 남자’ 이후 그녀의 행보는 놀라웠다. 틈틈이 썼다는 심상치 않은 장편 소설 「탱고」를 출간하더니, 바로 그동안 그려왔던 펜화를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음악까지 직접 만들어 음반을 낸 것이다.
“언론에서 제가 연기 외에도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해서 ‘다재다능하다’ 혹은 ‘많은 분야에 도전한다’고 기사화되고 있는데, 저는 결국 제가 하는 일이 모두 같은 분야라고 생각해요. 최고로 잘하는 것은 없지만 제가 하는 음악, 미술, 글 등을 조금씩 잘 비벼서 비빔밥처럼 맛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게 제 목표입니다.”
「숨」에 담긴 8곡의 음악은 타이틀곡 ‘골목을 돌면’ 이외에 모두 피아노곡이다. ‘골목을 돌면’은 같은 소속사 가수인 거미가 불렀다.
“사실 제가 녹음해보기도 했는데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미씨에게 부탁했어요. 거미씨가 녹음하는 걸 보니 ‘역시 노래는 가수가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노래는 실력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감히 도전하기는 힘든 분야인 것 같아요.”
구혜선의 다음 도전은 또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또 어떤 아이템으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인가?
“지금 하는 것 외에는 잘하는 것도, 아는 것도 없어서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계속 호기심이 생기는 이 한 분야를 할 것 같네요.”
구혜선에게 꿈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예상 밖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결혼해서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게 저의 최종적인 꿈이에요.”
구혜선, 사사키를 아빠라고 불러
두 아티스트는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공연에 앞선 기자 간담회에서 사사키가 ‘별별이별’을 들려주었고, 두 사람은 구혜선이 직접 편곡한 연탄곡 ‘젓가락 행진곡’을 함께 연주했다. 유명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하는 구혜선의 연주 솜씨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하나의 음악을 네 손으로 완성해가며 절묘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연주를 마친 구혜선은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좋은 연주 후에 느껴지는 행복감도 묻어나왔다.
“사사키씨는 제 건반 터치가 미흡해도 잘 맞춰주셨어요.”
한국에서의 두 번의 연주를 마치고 구혜선은 겸손한 소감을 들려줬다. 사사키에게 구혜선과의 공연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 형태의 공연은 많이 해보지 않았는데, 참여해보니까 꽤 재미있었어요. 구성도 좋았고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함께하고 싶어요. 물론 저도 나만의 세계가 있고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하겠지만, 또 재미있는 일이라면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무대에서 함께 음악을 연주하면서 또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를 통해서 더 단단한 우정을 쌓았다. 그러면서 구혜선이 사사키를 부르게 된 호칭이 ‘아빠’다(그는 아직 미혼이다).
“딸같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딸 정도 나이는 되거든요. 딸이 없어서 혜선씨를 딸처럼 생각하려고요. 그래서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죠.”
구혜선은 사사키를 아빠라고 부르게 되면서 더 친근해진 느낌이 든다고 한다.
“언제든 일본을 방문하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든든한 친구를 얻은 기분이에요.”
두 사람의 음악을 통한 우정은 당분간 계속 될 것 같다. 일단 10월 11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시작해 전국 5개 도시를 도는 이사오 사사키 전국 투어(‘With You’)에 구혜선이 동행할 예정이다. 이 둘은 이번 공연에서 피아노 연탄곡 등 두세 곡을 함께 연주할 계획이다.
너무도 달라 보이는 구혜선과 사사키,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음악은 아름답다. 두 사람의 음악적인 교감이 한일 양국 모두에 좋은 향기를 퍼트리기를 기대해본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제공 / 이성원, 안진형(프리랜서), 스톰프 뮤직 ■장소협찬/ 쥬빌리 쇼콜라띠에(02-785-7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