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행운도 찾아오죠”
보고 있으면 한없이 부러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보고 있으면 한없이 즐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동안’인 얼굴에, 그보다 훨씬 더 ‘동안’인 마음을 가진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아껴뒀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꿈을 펴다
하지만 실제로 그 바람을 실천으로 옮기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아침에 눈 떠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제는 뭘 먹었고, 오늘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 외에 크게 봐서는 별로 다를 게 없는 인생이 반복된다. 180도 다른 ‘나’로 변신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뭔가 ‘즐거운’ 일, ‘색다른’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만 자꾸 되새겨보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주철환씨(54)는 참으로 부러운 사람이다. 그는 몇 개의 삶을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인생은 차치하고 우리가 그를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만 생각해보더라도 이미 그는 서너 개가 넘는 인생을 살아왔다.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는 국어 교사로 살아보기도 했고, 연출하는 프로그램마다 소위 ‘대박’을 터트리는 잘나가는 예능 PD이기도 했으며, 재미있으면서도 존경받는 교수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살아가기도 했고, OBS 경인방송의 초대 사장으로서 조직을 경영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임기를 6개월 남기고 OBS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백수’의 인생을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제는 신인 가수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직접 작사·작곡한 10곡의 노래를 담은 앨범 좥다 지나간다좦를 발표한 것. 그저 ‘끼 많은’ 한 사람의 자기만족을 위한 기념앨범 정도로 생각하지 마시길. 이 앨범에 실린 노래들은 ‘앨범을 내겠다’는 목표 아래 급하게 긁어모은 것들이 아니라 그가 교사 생활을 하던 20대 초반부터 틈틈이 만들어온 60여 곡 중 선별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곡은 저작권협회 등록을 마쳤고, 곧 정식 유통을 기다리고 있다.
담백한 멜로디에 동화 같은 가사가 돋보이는 그의 노래들은 마치 한 편의 영롱한 동요 같은 인상을 준다. 그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노랫말이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맑고 잔잔해서 좋다고들 입을 모은다. 간혹 ‘완전 동요 수준이잖아’라며 시시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노래를 ‘동요’에 빗대어주는 이들이 고맙다. 언제나 동심의 세계에서 순수하게 살고 싶고, 또 노래를 만들며 그런 삶을 계속 만들어 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6일에는 이화여대 ECC홀에서 자신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는 것을 기념하는 무료 콘서트도 열었다. 신인 가수 주철환의 무대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로 800여 석이 꽉 찼고 평소 그와 친분을 쌓아온 최민수, 김혜자, 이금희 등이 기꺼이 초대손님으로 참석해 무대를 빛내주었다.
“좌석만 700석인 공연장을 빌렸는데 막상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 넓은 공연장이 휑하게 비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되더라고요. 공연 시작 전에 꽉 찬 관객석을 봤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가까운 이들에게 꼭 와서 보라고 초대하긴 했는데, 그렇게 많이들 와주실지는 몰랐어요. 제가 헛살지는 않았나봐요(웃음).”
특히 이날 콘서트에는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뿐 아니라 20대 젊은이부터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까지 다채로운 이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아들 친구들부터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까지를 아우르는 것이 목표”라던 그의 말처럼 그 어떤 누구와도 ‘친구’가 되는 주철환의 친화력이 증명된 자리였던 셈이다.
울지 않아 입양된 아이, 바나나에 얽힌 뭉클한 사연
사실 그가 용기를 내어 콘서트를 개최하기로 결심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다. 지난 7월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어보려 한 것. 그가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또 슬픔을 당한 그를 위로해줬던 고마운 분들을 위해 만든 자리인 셈이다.
“사실 친어머니는 제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 뒤로 고모님께서 저를 입양해 이제껏 키워주셨지요. 혼자 몸으로 억척스럽게 사시면서도 저를 정말 사랑으로 대해주셨어요. 적어도 저한테 어머니는 너무나 위대한 분이시죠. 저한테 ‘어머니’는 고모님이세요.”
그런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준 이가 바로 고모님이셨던 그의 어머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큰누나만 시집을 가서 집을 떠나 있었고 열여섯부터 네 살까지인 다섯 남매가 덩그러니 남겨지자 고모님께서 조카 한 명을 입양하고자 결심하셨던 것이다.
“고등학생이던 누나와 형 둘, 그리고 간신히 걸음마를 뗀 여동생과 함께 자랐어요. 자식 없이 홀로 되신 어머니(고모)가 저희 집 사정을 염려해서 한 명을 데려다 키우기 위해 오셨는데, 사실은 원래 제가 아니었대요. 제 여동생을 데려가셨었는데 기차에 올라타서까지 너무 울어대는 바람에 배웅하러 나와 옆에 서 있던 제가 대신 선택된 거라고 들었어요. 잘 울지 않는 성격 때문에 인생이 바뀐 거죠.”
그렇게 해서 경남 마산이 고향이던 꼬마는 서울로 오게 됐다. 시장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셨던 어머니(고모)는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억척스러운 성격이라 시장에서는 ‘또순이’로 불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아끼고 사랑해준 포근한 분이셨다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가난에 얽힌 추억도 많다. 특히 지금까지도 ‘바나나’만 보면 마음이 ‘싸’할 정도로 어머니와 함께 바나나를 먹었던 날이 기억에 남아 있다.
“가게를 하시던 어머니를 가끔 도와드렸는데 단골이었던 한 아주머니가 저를 많이 귀여워하셨어요. 저만 보면 눈길을 떼지 못할 정도로요. 한번은 어머니께 부탁하셔서 저를 집에 데려가시더라고요. 커다란 돌사자가 입구에 있는 으리으리한 양옥이었어요. 저녁 먹고 가라고 자꾸만 권하는 걸 마다했더니 무슨 노란 걸 주시는 거예요. 그때 생전 처음 바나나를 먹어봤어요. 어찌나 입에서 살살 녹던지…. 집에 와서 어머니한테 껍질을 보여드리며 엄청 자랑했죠.”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가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그 돌사자가 있는 집에 가서 살고 싶지 않아?”라며 “매일 바나나도 먹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아주머니 집에 자식이 없었는데 아마도 저를 입양하려 하셨나 봐요. 쥐가 천장을 뛰어다니는 집에서 먹고 싶은 것도 많이 못 먹고 살긴 했지만 어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 ‘그까짓 바나나 안 먹으면 어때? 나는 안 가고 싶어’라고 이야기했을 때 어머니 얼굴이 참 환해지셨는데…. 그날 그 비싼 바나나를 두 개나 먹을 수 있었잖아요.”
자칫 힘들 수도 있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포근하게 감싸준 가족과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라면서 ‘긍정의 희망’을 발견했던 그다. 어려움이 있어도 ‘곧 좋은 일이 있으려는 예고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긍정성은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행운은 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제 스스로 생각할 때 저는 정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 사람들을 만나면 좋고 친해지고 싶거든요. 특히 솔직한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저절로 관심이 가고 또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왜 그렇게 모두에게 친절하냐’, ‘사람들을 많이 사귀는 데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하는데 저는 누군가가 싫은데도 의무감으로 잘해주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그가 OBS 사장으로 있던 시절, 전 직원의 이름을 다 외워 이름을 불러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휴가 때는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정도로 젊은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그를 인터뷰하러 간다고 했을 때 하나같이 “금방 친해질 거야”라고 했다. ‘친절함’의 대명사로 소문난 그답다.
“제가 언제나 재미있어 하는 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또 나름 인정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즐겁게 지냈기 때문이에요. 저는 목표를 정해두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대신 운이 참 좋은 사람이죠. 운에는 행운과 불운이 있지요. 행운을 만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행운이 찾아오거든요. 매 순간, 매사에 모든 사람에게 충실하면 됩니다.”
선생님, PD, 교수, 사장 등 새로운 인생을 위한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용감하게 선택하고 전진할 수 있는 것도 ‘친절’하고 ‘충실’한 삶이 일구어나가는 힘을 믿기 때문이란다. 여기에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는 좌우명에서 보듯 즐겁게 살고자 하는 의지도 한몫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용기로 그렇게 전직을 하고 변신을 하는지 물어요. 저는 매사에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지’와 ‘내가 잘할 수 있는지’예요. 그렇게 고민한 뒤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면 뒤돌아보지 않아요.”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 발씩 앞으로 나가는 그는 앞으로 당분간 신인 가수로서 앨범과 관련된 방송활동 등을 해나갈 생각이다. 또 연말쯤에 발간 예정인 새 책을 마무리하는 데도 집중해야 한다.
“내년에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년 가을에도 이번에 했던 것과 같은 음악회를 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매년 이 자리를 이어가고 싶거든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좋아하는 노래들을 부르면서 말이죠.”
교사에서 PD로, 다시 교수에서 사장으로 언제나 관심과 부러움 속에 새로운 출발을 했던 그다. 그리고 이제 그가 다시 인생 5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의 과정에는 ‘재미’와 ‘친절’한 자세가 만들어내는 ‘행운’이 숨어 있었다. 그가 보여줄 인생 5막의 내용이 기다려져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린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 협찬 / 다이닝까페 61(02-730-8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