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배 시리즈를 진행하다 보면 인터뷰하고 자연스레 다음달 인터뷰이 섭외까지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람 소식이나 소문은 자고로 동종 업계 사람들이 제일 잘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 중견 개그맨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촉새’ 개그우먼으로 유명했던 이현주의 소식을 들었다. “이현주? 아! 그 친구 아직 시집 안 갔더라고.” 여성지 기자는 ‘결혼’이란 단어에 민감해지게 마련이다. ‘왜? 그녀는 아직 혼자일까?’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88년 쇼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코너, ‘참깨부부 들깨부부’로 활약했던 ‘촉새’ 이현주(44)를 기억하는가? 그녀는 1987년 MBC ‘개그콘서트’에서 대상을 수상해 개그계에 데뷔했다. 그해 ‘청춘만만세’로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에는 우수상을 받았다.
“제가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어요. 대학교 때 YMCA에서 하는 영어회화 스터디를 다녔었죠. 그 안에서 오락부장을 맡았는데 후배들이 ‘누나는 잠재된 끼가 있는 것 같다’며 개그맨 시험에 나가보라고 부추겼어요. 그렇게 참가하게 됐는데 얼떨결에 1, 2차에 연이어 합격하더니 대상까지 받게 됐지요.”
그녀는 요즘도 대상 이름을 호명하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지도 모르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등 떠밀려 무대로 나와 상을 받은 후 그녀는 하루아침에 유명 연예인이 되었다. 그녀의 연예계 생활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무명 시절이 없었으니 딱히 고생한 기억도 없다. 당시 금상 수상자가 지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개그우먼 이경실이다.
“대학교 3학년 때였으니 얼마나 철이 없었겠어요. 연기에 대해 깊은 뜻과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생각지 않게 개그우먼이 되고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얻었지요.”
이현주의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법대를 나와 법무사 활동을 했다. 놀기 좋아하는 호인이었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일대의 농악 일인자로 인정받던 태평소 연주가였다. 집안의 예능인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녀는 개그를 통해 타고난 끼를 표출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얻었다.
“당시 대학생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수입이었어요. 그런데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게 마련이더군요. 원래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에다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환락가를 전전했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미디 연기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엄한 개그계의 위계질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나 당시에는 선배의 구타도 공공연히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연예인의 화려한 겉만 보고 내재된 고독을 아무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연기를 못한다며 선배들에게 언어폭력을 듣는 것은 물론 구타도 많이 당했어요. 여자라고 봐주는 건 없었죠. 인간관계 갈등, 경쟁심, 시청률 부담으로 연예계에 염증과 환멸을 느꼈어요. 물론 선배들이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한 명의 프로 개그맨을 만들기 위한 훈련의 한 과정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어요.”
어린 나이에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연스레 술과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태원 등지에서 춤을 추며 매일 밤을 보냈다.
“알코올중독으로 폐결핵까지 앓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큰 사고들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고를 당하려니 어이없게 당하더군요. 치과치료를 받은 후에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음식을 먹다가 혀를 깨물어 절단이 되고 말았어요. 결국 의사 선생님이 방송생활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하며 장애인 5급 판정을 내렸어요. 그렇게 방송활동을 접게 됐지요.”
일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음이 부정확하니 개그맨의 생명은 끝이었던 것이다. 삶에 대한 회의가 왔고 우울증에 빠졌다. 사고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허무감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에 지방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4중 추돌사고였죠.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제가 충격으로 앞좌석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힌 거예요. 목의 인대가 늘어나고 뇌압이 높아져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가 됐어요.”
사고 이후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친한 친구의 어머니 초상집에 다녀온 후에 공황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정말 친한 친구라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불참할 수가 없었어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심신이 허약한 시기에 초상집에 가면 귀신이 붙는다는 말이요.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그랬어요. 초상집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몸이 죽을 것처럼 아프고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했죠. 몇 차례 종합검진을 받았는데도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음식도 먹을 수 없어 링거와 신경안정제로 연명했다. 약을 먹다 보니 머리카락은 상하고 얼굴이 검은빛을 띠고 붓기 시작했다. 현대의학에서는 단지 심리적인 문제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환청, 환각에 시달리는 제가 밖에 나가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종일 혼자 갇혀 지냈어요.”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딸을 보며 부모의 근심은 날로 깊어졌다. 그녀의 부모는 억지로 문을 부수기도 하고 전국 방방곡곡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보기도 했다.
“서른 살에 단명할 팔자라며 굿을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이상한 곳에 가서 병을 고친다고 얻어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그래도 낫지 않으니 부모님은 저 대신 죽고 싶다며 눈물만 흘리셨죠.”
부유했던 집안의 가세가 점차 기울면서 이현주는 결국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렀다. 병문안을 온 동료와 친구들에게 섬으로 요양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유서를 썼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식사라도 대접할 요량으로 외출을 했다.
어차피 죽음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택시 기사가 권해준 교회를 찾아갔다.
그녀의 얼굴에 평온함이 깃들다
6개월간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비로소 이현주의 환청, 환각 증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교회에 남아 어려운 사람들과 아픈 사람을 간호하며 10년 동안 생활했다. 현재는 간증사역사로 각 지방과 해외를 돌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병이 호전되고 생기를 되찾으니 가족도 신기해하더군요. 그동안 교회가 있는 시골에서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며 목회활동을 했어요. 연예계는 물론 속세를 완전히 떠나서 생활했지요. 방송은 종교 관련 프로그램만 진행했어요.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니 옛날 생각이 나고 설레네요.”
그녀의 얼굴에는 아팠던 사람이라고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때 잘나갔던 연예인이었던 것도, 술과 담배, 춤에 절어 ‘잘 놀던’ 여자였던 분위기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춤추러 다닐 때 사귀었던 소위 ‘날라리’ 친구들이 지금의 저를 보면 깜짝 놀라요. 제가 모임을 주도했던 대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만나면 종교 이야기만 하고 착실하게 살라고 하니 적응이 안 된다고 하죠(웃음).”
과거의 어려움은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이제 평범한 행복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될 텐데 그녀는 왜 아직 혼자일까?
“저는 기질상, 한 가지밖에 못해요. 하나에 완전히 빠지면 다른 일은 못하죠. 아예 속세로 가던지, 교회에 있던지 해야 해요. 남자를 만나고 연애를 하면 지금 하는 선교활동과는 멀어질 거예요(웃음).”
아직까지는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들에 대해 보답할 시간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는 매일 지방과 해외를 다니니 사람을 만날 기회도 녹록지 않단다.
“저와 비슷한 일을 하는 분과 로맨스가 있긴 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일에만 충실하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독신주의는 아니고 좋은 짝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결혼을 해도 여기저기 선교활동을 다녀야 하는데 그걸 이해해주는 분을 만나고 싶어요.”
방송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화려하고 즐기기를 좋아하던 한량 기질을 타고난 그녀가 아무리 종교에 귀의했다지만 가끔은 그리울 법도 한데 말이다. 그녀는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제가 활동했던 때와 지금은 방송 현실이 너무 많이 달라졌어요. TV를 거의 보진 않지만 가끔 볼 때마다 너무 템포가 빨라서 시청자로서도 따라가지 못하겠던걸요?”
그녀가 방송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활동을 했다면 지금의 이경실이나 박미선, 김지선처럼 성공하고 큰돈을 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욕심이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듯이 재물만이 절대적인 축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질적으로 부족해도 저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잖아요. 과거의 지인들이 그래요. 전에는 제가 항상 신경질적이고 인상을 쓰고 다녔는데 지금은 아주 편해 보인다고. 전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거든요(웃음).”
이현주의 목표는 소박하다. 과거의 그녀와 같은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그녀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양양금식기도원(033-672-7732)을 통해 연락을 달라고 전한다.
이번 인터뷰는 그녀의 사연을 통해 특정 종교의 실체를 구명해보려는 취지가 아니다. 그저 스스로 아픔을 극복해 새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의지를 담아보려 했다. 그녀가 화려한 방송세계를 떠나 불우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주는 활동을 계속해 나가길 바란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