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전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무명 시절에도 늘 웃으면서 살았어요”
정호빈이라는 배우가 있다. 언뜻 이름만 들어서는 쉽게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꽤 낯익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가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 ‘문노’ 역으로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년 연기 인생 중 가장 행복한 한때를 맞고 있다는 정호빈을 만났다.
문노, 연기 인생 2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이름까지는 외우지 못했던 배우 정호빈(41). 그의 이름이 시청자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MBC-TV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다. ‘문노’, 우리가 알고 있는 정호빈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문노는 드라마 초반에 비중 있게 등장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시청률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극중에서 잠시 사라지자, “문노를 다시 나오게 해달라”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결국 문노는 그를 사랑했던 팬들 덕분(?)에 드라마 중반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정호빈도 ‘선덕여왕’ 이후, 높아진 인기를 실감할까.
“조금은 인기를 실감해요. 요즘에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거든요. 심지어 지나가는 초등학생들도 ‘문노다~!’ 하고 외칠 정도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면 반갑고 기분 좋죠(웃음).”
사실, 그는 문노의 캐릭터를 잡기 위해 나름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드라마 중반 문노가 다시 등장했을 때는 헤어스타일부터 의상, 분위기, 말투, 행동까지 모든 것에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빛과 검은색이 적절히 섞인 긴 헤어스타일도 헤어팀과 신중하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탄생된 거라고.
“문노가 중반에 등장하니까 다른 캐릭터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했어요. 덕분에 문노만의 분위기를 물씬 풍길 수 있었고, 화면에 제가 생각했던 모습이 잘 담겨서 흐뭇했어요(웃음).”
드라마에서 각 등장인물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 문노는 37회에 독침을 맞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극에서 사라졌다. 극 초반부터 드라마에 강하게 힘을 실어줬던 문노가 하차한 후, 시청자들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호빈은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고 말한다.
“저도 개인적으로 ‘선덕여왕’에서 하차한 게 매우 아쉽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전체의 스토리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원래 극 초반 1, 2회에 힘을 실어주고 빠지는 인물이었는데, 37회까지 살았으니 생각보다 오래 산 거죠. 모두 저를 응원해주신 시청자들 덕분이에요(웃음).”
정호빈은 ‘문노’라는 역할이 그의 연기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라고 꼽았다.
“문노는 저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정호빈’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죠. 문노라는 역할 때문에 그동안 출연했던 다른 배역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으니까요.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어요.”
검도 4단? 액션 연기가 좋았다!
정호빈은 연기를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째다.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대배우들을 동경했고, 영화 ‘대부’, ‘원스 어폰 어 타임 아메리카’ 등의 영화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자신이 열망하던 연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20년 전 처음으로 연기를 시작한 곳은 바로 연극 무대다. 하지만 연극은 춥고 배고팠다. 당시 극단은 가난했고, 불안정했다. 그래서 영화 관계자들에게 프로필 사진을 돌리고 스크린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무명 생활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가 처음으로 얼굴을 알린 작품은 영화 ‘친구’(2001년)다. 이후 그는 드라마 ‘올인’(2003년)에서 마피아 보스의 오른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에서는 인민군 장교, 영화 ‘첼로’(2005년)에서는 성현아의 남편, 드라마 ‘주몽’(2006년)에서는 소서노 곁을 지키는 우태, 드라마 ‘꽃보다 남자’(2009년)에서는 정실장,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2009년)에서는 백 실장, 그리고 ‘선덕여왕’(2009년)의 문노까지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오가며 활발한 연기를 펼쳐왔다.
그의 캐릭터는 실장, 조폭, 마피아 오른팔, 무사 등 카리스마 넘치고 강한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정호빈의 웃는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왜 그렇게 차갑고 강한 역할만 고집해왔을까.
“저는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녀요. 요즘 등장하는 젊은 친구들처럼 꽃미남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만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생각이에요. 일관성 있게 한 가지 캐릭터를 고수하면, ‘그 역할에는 정호빈이 딱이야~’라며 인정받을 수 있잖아요. 제 캐릭터가 구축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나면, 다른 배역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될 때쯤, 그는 다른 역할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문노’로 인해 사람들이 배우 ‘정호빈’의 이름을 알아가는 요즘 그 시기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을 느낀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촬영할 때 유난히 액션신이 많았다. 때문에 부상에 대한 부담도 컸다. “촬영하면서 많이 다쳤죠. 팔, 다리, 어깨, 발목 등 말도 못해요. 그런데 저만 다치는 게 아니에요. 액션신을 연기하다가 다치는 일은 비일비재해요. 때문에 어디가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가지 않는 한 타박상 정도는 아프다는 말도 못해요. 촬영이 지연되면 안 되니까요. 다른 배우들도 끝까지 꾹 참고 연기합니다.”
그는 액션을 워낙 좋아했다. 그래서 늘 액션이 가미된 역할을 고집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검도를 했고 현재 검도 4단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검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간혹 누군가와 시비가 벌어지면 말 그대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제가 검도 4단이잖아요. 그래서 누가 때리면 그냥 맞아야 해요. 제가 때리면 살인 미수거든요. 아무리 정당방위라 해도 ‘무술을 배운 사람이 참아야죠’라는 말을 듣게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싸움은 절대 안 합니다(웃음).”
주연에 대한 욕심은 늘 있다
늘 작품에 출연하면서 다른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과 단역을 도맡았던 정호빈. 주연에 대한 욕심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욕심난다”며 “지금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20년 동안 2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단역과 조연을 맡아왔는데 혹 ‘설움’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연기를 하면서 한 번도 서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뿐이었죠. 평소 존경하던 감독님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저한테는 행복일 뿐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과 ‘태양을 삼켜라’의 촬영을 마친 정호빈의 차기작은 오는 12월 11일부터 시작하는 연극 ‘베니스의 상인’이다. ‘선덕여왕’ 덕분에 인지도가 상당히 올라간 이때 갑자기 연극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대해 그는 큰 고민 없이 차기작을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연극 에이전시 측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대한 향수도 느꼈단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정호빈은 살 1파운드를 담보로 3천 더컷을 빌리는 상인 안토니오 역할을 맡았다.
“안토니오라는 인물은 지금까지 제가 연기한 캐릭터와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에요. 선하고 의리 있는 역할인데,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고민 중이에요. 안토니오도 사람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매번 그렇게 착하고 선하기만 했을까 싶은 거죠. 어떤 안토니오가 탄생될지 기대해주세요.”
알천랑은 예의 바르고, 비담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해
정호빈은 그동안 TV에서 보여줬던 이미지와는 달리 긍정적이고 따뜻하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인터뷰 중 위트 있는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자칫 어색할 수 있는 현장 분위기를 밝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본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무명 생활이 길었어도 웃으면서 일할 수 있었다고.
“저는 힘든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스타일이에요. 기분이 나쁘면 알게 모르게 얼굴에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더 웃어요. 그러한 마인드가 제가 지금까지 연기하는 데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정호빈의 이런 성격은 현장에서 스태프와 후배들한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다. 그는 “김남길과 이승효는 예의가 바르고 연기도 잘하는 후배”라며 “특히 김남길은 진지하면서도 때론, 코믹 연기를 매우 잘한다”고 덧붙였다.
정호빈은 지난 2006년 ‘주몽’에 출연할 당시 6년간 사귀던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다. 부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답한다. 세 살 된 딸을 둔 그는 “바깥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육아와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못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산다면, 아내와 딸 아이와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무뚝뚝해 보이고, 차갑고, 냉정해 보였던 배우. 하지만 인간 정호빈은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쳤다. 그리고 이런 에너지는 그가 앞으로 더욱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