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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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뮤지컬 배우 임혜영을 꾸미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신데렐라’다. 지난해 1,183:1의 경쟁률을 뚫고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 역을 따낸 뒤 ‘지킬 앤 하이드’와 ‘브로드웨이 42번가’까지 승승장구했다. 정작 본인은 어색해하는 신데렐라 스토리, 조금은 다른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치어리더 강릉 소녀, 노래를 위해 상경하다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한다. 칼로리에 예민한 여배우들이 좀처럼 마시지 않는 음료라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브로드웨이 42번가’를 공연하며 몸무게가 많이 줄었단다. 옷 사이즈가 달라졌을 정도라며 원래 체중으로 돌아오려면 하루 밥 세끼로는 부족하다고. 올 2월부터 8개월 동안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여주인공 페기 소여로 쉬지 않고 달려온 그녀는 이제 막 항해를 마친 상태다.

“시원섭섭해요. 고생한 만큼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이고요. 다음 작품을 준비하려면 체력을 비축해둬야죠.”

그녀는 올해 세 편의 대작 뮤지컬에 출연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와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는 주인공, ‘지킬 앤 하이드’에서도 여주인공격인 ‘엠마’ 역을 맡았다. 3년 차 뮤지컬 배우로서는 매우 화려한 이력이다. 자연스럽게 ‘뮤지컬계의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남들보다 수월하게 배우가 된 게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왜 어려움이 없었겠어요. 다른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이 그랬듯이 저도 오디션에 수없이 떨어져봤죠. 3년 전에 ‘그리스’ 오디션에서 떨어진 후 펑펑 우는데 한 선배가 그러시더라고요. ‘혜영아, 그렇게 100번 떨어지고 나면 네가 하고 싶은 역할 다 할 수 있어’라고요. 그때부터 한 번씩 떨어질 때마다 바를 정(正)자를 쓰기 시작했죠(웃음).”

바를 정자를 몇 번이나 썼는지 모를 정도로 오디션에 붙은 때보다 떨어진 적이 더 많았지만 낙방의 슬픔보다 노래 부르는 행복감이 더 컸다. 1982년생, 올해 스물일곱의 그녀는 학창 시절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강릉 소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강릉 강일여고를 다녔는데 여자 축구부가 굉장히 유명해서 축구부를 응원하는 응원단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치어리더를 하면서 노래하며 춤추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느꼈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를 동경하게 됐고요.”

노래가 좋아 서울로 와 숙명여대 성악과에 진학했지만 뮤지컬 배우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연한 기회는 대학교 4학년 때 찾아왔다.

“아는 언니가 뮤지컬 ‘겨울 나그네’ 오디션에 같이 나가보자고 해서 엉겁결에 오디션을 봤는데 최종 단계까지 올라간 거예요. 결국 떨어졌지만 다른 오디션에도 응시해볼 용기가 생겼어요. 그 다음에 본 오디션이 ‘드라큘라’였고 앙상블로 캐스팅돼 네 마디 짧은 노래로 제 뮤지컬 데뷔를 치렀죠.”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사랑은 비를 타고’와 같은 소극장 공연을 비롯해 창작뮤지컬, 오프브로드웨이 작품까지 차근차근 기본기를 쌓아오던 그녀는 지난해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 일라이자 역에 도전한다. TV를 통해 방영되는, 무려 1,183:1의 경쟁률을 기록한 공개 오디션이었다.

1,183명의 경쟁자가 아닌 스스로와 싸운 공개 오디션
“확률적으로 분명 힘든 게임이었어요. 방송을 통해 혹독한 서바이벌 과정이 공개되는 부담도 있었고 3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죠. 지원자 중에는 이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뮤지컬 배우들도 많았는데 전 그리 유명한 배우도 아니었고요. 그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경력이 많건, 적건 무대를 앞둔 배우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무지하게 떨린다는 거예요.”

매회 노래는 물론 안무와 연기, 체력 테스트까지 혹독한 심사를 거쳐 탈락자가 선정됐다. 대본은 없었고 미션과 스케줄만 알려주는 형식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노래를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그녀이기에 “노랫소리가 듣기 싫다”며 심사위원이 쓴소리를 할 때는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무엇보다 탈락을 피하기 위한 경쟁자들 간의 치열한 심리 싸움에 압박감도 컸다.

“1,200명을 이기는 것보다 저 자신을 이기는 게 힘들었어요. 당시 ‘그리스’ 공연으로 공연 준비와 오디션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연습시간도 많이 부족했고요. 탈락자 선정을 치르고 나서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또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모르실 거예요.”

그녀 역시 배역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뮤지컬 지망생 중 한 사람이었기에 그 세계의 경쟁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너무나도 치열한 경쟁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뮤지컬에 대한 회의마저 들 정도였다.

“저는 어렸을 때 노래 대회에 나가서 2등을 해도 행복했어요. 1등, 2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대에서 노래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거든요. 앞으로 이 세계에서 이보다 더 큰 경쟁이 많을 텐데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죠. 그동안 나의 무심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고요. 공개 오디션은 뮤지컬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숙하게 해준 경험이었어요.”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뮤지컬계의 샛별 임혜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정(正)자 써가며 심기일전했어요”

물론 그녀에게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대작 뮤지컬의 주인공 자리를 안겨준 기회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국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주인공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최종 우승자로 호명되는 순간 기분이 어땠을까? 당시 소감을 묻자 뜻밖의 에피소드를 전한다.

“우승자 얼굴이 화면에 뜨는 식으로 최종 발표가 이루어졌는데 NG가 난 거예요. 최종 발표가 난 줄 알고 그 친구를 축하해주려고 하는데 다시 한번 한다고 해서 다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이미 김이 샜죠(웃음). 그 다음에 제 얼굴이 나와서 또 NG가 난 줄 알았어요.”

우승했다는 것, 3개월간의 긴 서바이벌이 끝났다는 것,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 어느 것 하나 실감할 수 없었지만 탄탄한 개인기와 신인답지 않은 대담함, 어떤 배역이든 맞춤옷을 입은 듯 다양한 얼굴을 가진 뮤지컬계의 기대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여성 관객들이 흥행을 좌지우지하는 뮤지컬계의 특성상 여배우가 원 톱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적은 편이에요. 그런 면에서 ‘마이 페어 레이디’는 배우로서 좋은 경험이 됐죠. 대사가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작품이 좀 어려운 편이었지만 뮤지컬 배우 임혜영을 한 단계 발전시킨 고마운 작품이었어요.”

그녀의 최근작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페기 소여는 여러모로 그녀와 닮았다. 그녀가 강원도 강릉에서 성악가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것처럼 페기 소여도 코러스 걸을 꿈꾸며 펜실베이니아 알랜타운이라는 시골에서 상경했다. 둘 다 탭댄스에 서툴렀고 ‘촌스러울 정도로 순수한(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격도 비슷하다. 공연을 하면서 “페기, 정말 촌뜨기 같다”는 말을 들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단다. 여주인공이라고 해서 꼭 화려하고 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극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배역들과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들어 극을 이끌어가는 것이 그녀가 작품에 임하는 기본자세다.

“‘마이 페어 레이디’를 공연하면서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의 관심이 두려웠어요. 전 벼락치기를 못해요. 한 번에 빵 터지는 ‘대박’은 바라지도 않고요. 항상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더라고요. 제가 하루아침에 뜬 배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오랜 기간 천천히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하는 배우로 봐주셨으면 해요.”

그녀가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역이 있단다. 바로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 ‘킴’이다. 그 꿈이 어디쯤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바심 내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그녀는 기다리는 즐거움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훈 ■장소 협찬 / 사루비아(02-540-7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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