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일이 찾아와도’ 서울패밀리 위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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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일이 찾아와도’ 서울패밀리 위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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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키한 목소리의 내지르는 듯한 창법으로 ‘이제는 지워버렸나~ 아~’를 외치던 서울패밀리의 위일청. 그는 주옥같은 히트곡을 남긴 채, 6년 만에 팀을 탈퇴했다. 오랜 꿈이었던 사업에 전념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케이블 방송국까지 인수하며 나날이 사업을 번창시켰던 가수 위일청,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공개수배]‘이제는’, ‘내일이 찾아와도’ 서울패밀리 위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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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찾아온 가수 데뷔의 기회
명곡은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리고 명가수란 신문 가십난을 장식하는 특별한 소식 없이도 사람들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위일청(54)이 부른 노래 ‘이제는’은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명곡이다. 그는 1981년 ‘서울국제가요제’를 통해 데뷔했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어요. 지인 중에 미8군 쇼 기획사에서 일하는 분이 계셨는데 심심하면 연락하라고 늘 말씀하셨죠. 대학 시험을 보고 무료하던 차에 용산 미군 클럽에 놀러 갔어요. 장난 반, 재미 반으로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해 하루 200원씩 받고 아르바이트를 했죠.”

대학 입학 후에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그룹사운드를 결성했다. 멤버 중에는 아버지가 나이트클럽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있어 손님이 없는 6시 반에 무대에서 공연을 하며 연습했다.

“가수 이미배씨에게 주기 위해 만든 곡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했어요. 엉겁결에 1차 심사에 통과했고 그걸 계기로 가수가 된 거죠. 지금 생각해도 준비된 가수라기보다 얼레벌레 됐어요. 준비 안 하는 습관은 지금도 여전해요. 원래 목소리가 허스키해서 자다 일어나 공연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웃음).”

그는 1984년 ‘서울패밀리’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1988년 KBS 가요대상,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그해 대한민국의 가요에 관련된 상이란 상은 다 받았어요. 저희를 남녀 듀엣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6인조로 시작해 9인조까지 멤버가 늘어났거든요. 상패를 하나 받으면 멤버들끼리 돌려가면서 사진을 찍었던 생각이 나네요.”

그는 당시에 잠도 못 자고 바쁘게 활동했던 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차만 타면 잠을 자기 때문에 지방 공연을 갈 때마다 그의 아내가 운전을 한다.

“아무리 짧은 거리를 가도 차만 타면 잠을 자요. 아마 쪽잠이 습관이 된 모양이에요. 오히려 집에서는 5시간도 못 자요. 새벽 5시쯤 잠이 들면 오전 10, 11시쯤 일어나죠. 좋은 버릇인지 모르겠는데 연예인 하면서 쪽잠을 자게 됐어요. 나눠 자도 피로가 풀리더군요.”

그는 그룹 탈퇴 후, 스튜디오 녹음실을 열었고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사업을 일궈나갔다.

열혈 사업가에서 다시 가수로 돌아오기까지
[공개수배]‘이제는’, ‘내일이 찾아와도’ 서울패밀리 위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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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내 최초로 MIDI 시퀀스 음악(컴퓨터 음악 작업)이 가능한 스튜디오를 냈다. 많은 가수들이 이 스튜디오를 이용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일본에서 장비를 한두 개 사오다 보니 시퀀스 음악을 할 수 있었어요. 가수들이 모이니 그 안에서 콘서트를 하자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실제로 ‘우드스톡’ 같은 록 페스티벌을 열어 강원도 고성에서 보름간 공연을 열기도 했어요. 그게 소문이 나서 사업이 커지기 시작했죠.”

그는 신문사 광고부 간부였던 남동생의 도움으로 광고 사업을 진행했다. 다양한 고객을 만나다 보니 영화 제작에 손을 댔고 CG나 각종 효과가 필요해 IT 사업도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국 두 곳을 인수하기까지 했다.

“전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인가 봐요. 그동안 수월하게 사업을 해왔는데 영화에 손을 대고 나니 타격이 크더라고요. 2003년까지 사업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공들였던 사업을 쉽게 접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항상 이해해주는 아내 덕분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가수로 무대에 올랐을 때가 가장 위일청답다고 말했다.

“망한 것과 다름없었죠. 사업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남편에게 지난 일은 모두 잊고 당신은 노래하는 사람이니 노래만 하라고 했죠.”

그 이후로 위일청은 사업을 포기하고 무대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낮부터 공연을 다니며 매일 하루에 대여섯 곳을 다녔다. 식사할 시간도 없어 이동 중에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다녔다. 1년 넘게 지방 공연을 다녔더니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여유를 되찾은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제가 시련을 겪고 보니 불우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마침 후배 가수가 찾아와 자신이 ‘사랑의 열매’와 함께 자선 공연을 하는데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결식아동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주고 갔어요. 그걸 보고 마음이 어찌나 안 좋은지 밤새 울었어요. 그리고 바로 공연에 참여하기로 했죠.”

그는 후배 가수들과 주말이면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휴게소에서 6시간씩 공연한다. 횟수로 200회 이상 공연을 하며 모금을 했다. 또 사랑의 앨범 단체 후원을 받아 「사랑」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 앨범을 냈고 판매 수익금을 모두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처음에는 맨땅에 천막 하나 쳐놓고 노래를 부르는데 쑥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선글라스를 썼죠. 그런데 한 아이가 모금함에 돈을 넣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아! 이건 아니구나’ 싶어서 선글라스를 벗고 노래하고 있어요. 이젠 관객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나누죠.”

그는 결식아동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내년부터 서울, 부산, 대구 등 광역 자치단체가 결식아동 급식 예산을 삭감한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했다.

“55만 명의 결식아동들은 도대체 어떻게 합니까. OECD 국가 중에 유일하게 우리나라가 학교에서 밥값을 받는답니다. 학교에서 돈이 없으면 밥을 주지 않는 나라예요. 게다가 복지시설 등에 지원되는 4개월 김장 예산비가 1인당 6천5백원이래요. 한 달에 1천5백원꼴이죠. 이 돈으로 어떻게 김장을 하겠어요.”

그는 아내와 함께 적은 양이나마 힘닿는 대로 복지시설에 김치를 후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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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손맛, 널리 알린다
사람 좋아하는 위일청은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배경에는 아내 방미진씨의 음식솜씨가 있었다. 새벽 2시에 남편이 손님을 데려와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다.

“남편이 사람들을 참 좋아해요. 상의도 없이 불쑥 데리고 오기 일쑤죠. 하루에 여섯 번 상을 차린 적도 있어요.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아요.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집에서 만든 밥이 정성이니까요.”
위일청의 주변 지인들 중 그녀의 손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특히 그녀가 설탕과 조미료를 넣지 않고 8시간 고아낸 육수로 담근 김치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다.

“하루는 제약회사 하는 후배가 집에 놀러 왔다가 김치를 먹어보더니 바로 판매하자고 하더군요. 제가 그럴 정도는 아니라며 싫다고 했어요. 그래도 끊임없이 절 설득하더라고요.”

후배는 맛도 있고 영양도 있는 김치라면 중국산이 범람하는 값싼 김치시장에서 승산이 있다며 부부를 설득했다.

“제약회사 건강식품에 들어가는 항암 효과가 있는 종균이 있대요. 그걸 김치에 넣어 실험해보자고 하더군요. 저도 신기해서 그 종균으로 김치를 담가봤어요. 종균에 의해 발효돼서인지 속도가 굉장히 느리고 아삭한 맛이 오래가더라고요.”

이어 성분 분석을 해본 부부는 깜짝 놀랐다. 종균을 넣은 김치에서 평소 김치에 비해 40, 50배에 해당하는 유산균이 나온 것이다. 방미진씨는 요즘 우리나라 음식이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니 고급화된 김치를 소개하면 꽤 승산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아내는 작년에 위일청이 미국 공연을 갈 때 친구들에게 나눠 줄 김치를 싸줬다.

“그 자리에 미국 최대 프랜차이즈 업체인 H마트 회장의 누나가 계셨어요. 그분은 아내가 보내준 김치로 밥 한 공기를 드시더라고요. 마트에 김치를 납품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죠. 또 핫도그 체인점인 ‘뉴욕핫도그’에서 김치불고기 메뉴를 개발하며 저희 김치를 쓰겠다고 하더군요.”

불순물을 제거해 특허를 획득한 소금을 쓰기 때문에 김치 특유의 씁쓸한 짠맛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깔끔한 맛이 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미국에 사는 지인은 그들의 김치로 전문점을 낼 예정이다.

“저는 한국인이 매일 김치를 먹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보세요. 아내의 김치를 먹고 몇 시간씩 무대에 서 있어도 끄떡없잖아요.”
위일청은 아내가 큰 통에 김치를 넣고 버무리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남에게 맡겨도 될 텐데 아내는 매일 공장을 오가며 직접 김치를 담근다.

“제 손으로 하던 거라 다른 사람 손에는 못 맡기겠더라고요. 이왕 시작했으니 한 사람이라도 제 김치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까지 할 생각이에요. 워낙 재료에 신경 쓰다 보니 큰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음식을 먹어준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위일청은 사진기자에게 특별 촬영을 요청했다. 아내의 손목을 슬며시 잡아당겨 카메라 앞으로 간다.

“이왕 시작했으니 우리 부부 사진 좀 찍어주세요.”
두 사람은 마치 웨딩 촬영을 하듯 즐겁게 포즈를 취한다. 닭살 포즈에 주변에서 야유가 터져 나와도 부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위일청의 노래가 여전히 저력을 발휘하고 아내의 김치가 맛있는 이유는 두 사람이 행복한 가정이 밑바탕 되기 때문일 것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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