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마음으로 살아가요”
330여 편의 영화 출연, 24번의 여우주연상 수상, 43년 영화 인생의 기록에 빛나는 전설의 여배우 윤정희가 이창동 감독과 손을 잡고 스크린에 복귀한다. 세월은 흘렀지만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그 때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답고 고혹적이다. 역시 ‘여배우’란 그렇게 빛나는 존재인가 보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여배우 트로이카(윤정희·문희·고(故)남정임)를 기억하는지. 그 중에서도 1967년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으로 데뷔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윤정희(66)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영화사에 있어 전설적인 존재다. 그동안 3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팬들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대종상 여우주연상 등 24차례에 걸쳐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한 뒤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여배우로서의 고고한 삶을 이어가고 있던 그녀가 1994년 개봉한 영화 ‘만부방’ 이후 오랜 연기 공백을 깨고 다시 우리 앞에 섰다.
15년 만의 복귀작으로 그녀가 고른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시’다. 윤정희는 영화에서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손자와 함께 살다가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들으며 난생처음 시를 쓰게 되고 일상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주인공 ‘미자’ 역을 맡았다.
“주변에서는 오랜만의 영화 복귀라며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는데, 사실 그동안 영화를 떠났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처음 ‘시’ 촬영 현장에 갔을 때도 자연스럽더라고요. 옛날 친구들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어요. 촬영도 무척 즐겁고 의욕적으로 했어요.”
그동안 팬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그녀는 배우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최고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이창동 감독과의 작업도 무척이나 행복하고 보람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깊이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연기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고.
“감독님께 참 고맙게 생각해요. 저는 과장이나 답습이 없는 저의 새로운 면을 표현해보고 싶었거든요. 현장에서 정말 제가 찾고 싶은 모습을 저한테 알려주시더라고요. ‘미자’ 역할을 소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감독님과 호흡도 잘 맞았고 촬영장 분위기도 좋아서 아주 아름답게 잘 진행된 것 같아요.”
깊고도 순수한 60대 소녀의 삶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의 제작 단계부터 윤정희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영화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녀가 주인공이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윤정희가 맡은 영화 속 주인공 이름도 그녀의 본명과 같은 ‘미자’다. 그래서인지 윤정희와 ‘미자’는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재작년 즈음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이창동 감독님을 만났는데 저를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떤 인물인지,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얼마나 기쁘고 감동적이었는지 몰라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도 행복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죠. 미자와 저는 정말 비슷한 점이 많아요. 아직도 가끔은 들에 핀 작고 아름다운 꽃만 봐도 눈물 흘리며 감탄할 때가 있어요. 육십이 넘었지만 아직 ‘미자’처럼 소녀 같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은 시나리오를 보고 ‘어쩜 이렇게 자기랑 비슷해?’라고 하더라고요.”
남 앞에서는 연기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그녀는 이번 영화를 준비하며 평생 처음으로 남편과 연기 연습을 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연기를 해오며 자신만의 연기 스타일을 만들어온 그녀였기에 오히려 예전과는 다른 일상의 연기가 어렵기도 했다고. 하지만 남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배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백지 상태가 되어 ‘미자’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속으로는 강한 뜨거움을 품고 있지만 타고난 순수함으로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슴속으로 삼키는 인물인 ‘미자’는 대한민국의 독보적인 여배우 윤정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얼굴에 주름은 졌지만 내면은 늙지 않았고,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이자 전설적인 여배우이지만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들려주는 한 편의 시가 우리의 가슴을 얼마나 절절하게 만들지 그 울림을 기대해볼 만하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제공 / 언니네홍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