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다음 작품 또 해야지…”
존재만으로도 작품의 든든한 기둥이 되는 중견 배우 김인문. 지난 2005년 8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던 그가 병마와 싸우며 또 한 번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40년의 거친 세월 속에서 쌓아온 깊은 내공 앞에서는 감히 어떤 것도 그를 무대 밖으로 밀어낼 수 없었다.
김인문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연극 ‘날개 잃은 천사’와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뿐 아니라 TV 광고에 꾸준히 출연하며 연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주연을 맡아 또 다시 혼신의 힘을 다 쏟은 작품은 황순원 작가의 소설로 유명한 ‘독 짓는 늙은이’. 1969년에 개봉됐던 최하원 감독의 동명 원작을 2010년판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전작을 재구성하는 부분에서 무리도 있고 걱정도 많았지만 제작진은 현재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경기도 양평군과 황순원의 테마파크 ‘소나기마을’에서 촬영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눈이 내렸던 지난겨울을 시작으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두 번째 겨울을 배경으로 사계절이 모두 담은 후 내년 3월쯤 개봉할 예정이다. 촬영장은 장애인 체험학습을 위한 곳으로 영구 보존된다.
독을 짓는 노인의 삶의 애환과 한 여자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그린 ‘독 짓는 늙은이’에서 김인문은 주인공 송 영감을 맡았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한국 영화계 최초로 선천적 장애를 가진 배우들과 후천적 장애를 입은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깊다. 그동안 장애를 지닌 배우들이 단역으로 짧게 출연한 적은 있었지만 영화 전반의 상당 부분에 출연하는 비중있는 배역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날 제작발표회 현장에는 김인문과 전원주, 안병경, 서단비를 비롯해 장애인 연기자들이 직접 참석해 일일이 자신을 소개했다. 특히 김인문은 지난해 11월 한국장애인연기자협회 회장으로 취임해 장애를 가진 방송인과 연기자들의 발굴과 교육에 힘써오고 있다. 이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나가며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다.
이윽고 한 기자가 작품의 출연을 제안받고 결정하기까지의 고민과 어려움을 묻자 김인문은 “내가 (감독에게) 먼저 하자고 했고 황순원의 소설을 다 읽었는데 정말 작품성이 있다”고 짧게 답했다. 힘겹게 말문을 연 모습에서 아직 또박또박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여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빛에서는 열정이 넘쳤다.
“배우는 힘든 것도 감수해야 해. 대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감정 처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문제가 별로 안 돼. 쉬운 건 안 되는 거야.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지.”
혹시 이번 영화가 마지막 작품이 되지는 않겠냐는 걱정스러운 질문에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없어. 다른 작품도 할 수 있어…”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와 꼭 함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어떠한 좌절이나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 독을 지으며 신명을 바치는 영화 속 송 영감은 오직 연기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슴에 품고 외길을 걸어온 김인문과 참 많이 닮았다. 쓰러지고 또 쓰러졌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떠날 수 없는 무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진정한 배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장인이다.
■글 / 윤현진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