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드라마 ‘나쁜 남자’ 촬영에 한창인 한가인(29)을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오랜만에 취재진 앞에 서는 제작발표회 무대에 긴장했는지 마이크를 잡자마자 웃음을 먼저 터뜨린 모습이 변함없이 밝고 순수했다.
“본의 아니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정말 빠르죠. 벌써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만큼 바쁘게 살았어요. 연기를 안 할 때는 일상적으로 살아서 그런지 제가 배우라는 사실을 잊거든요. 집에 있으면 하루가 그냥 가더라고요. 집에서는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보통 주부예요(웃음).”
한가인은 올해로 결혼한 지 6년이 됐다. KBS-TV 드라마 ‘노란 손수건’에 함께 출연했던 동료 배우 연정훈과 지난 2005년에 부부의 연을 맺으며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아줌마 신고식을 치렀고, 이후 지금까지 ‘결혼해서 가장 아쉬운 품절녀’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덕분에 연정훈은 뭇 남성 팬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위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가인 같은 미모의 어린 신부를 당당히 차지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남편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의아했는데 나중에 속뜻을 알고 많이 웃었어요.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거든요. 제가 결혼하고 나서 많은 분들이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냐고 종종 물으시는데요, 그건 그저 운명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부부가 일심동체라지만 작품에 있어서는 각자의 생각과 스타일을 존중하는 편이다. 일에 있어서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가인·연정훈 부부의 원칙이다. 작품 선정이나 연기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서로를 믿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집까지 일을 갖고 들어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나 이런 작품 들어가’라고 말하면 남편은 ‘응, 그래’라고 답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신혼 초에는 서로 모니터도 많이 해줬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제는 그마저도 점차 줄이고 있다. 연정훈이 현재 출연하고 있는 SBS-TV 드라마 ‘제중원’ 역시 방송 초기에는 많은 관심을 갖고 봤지만, 서로 민망할까봐 궁금해도 웬만하면 안 보려고 노력한다고.
“‘나쁜 남자’ 촬영 때문에 바쁘지만 틈나는 대로 보고 있어요. 드라마 속에서 남편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이상하게 귀여워요. 제게는 화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연기할 때는 달라지니까요(웃음).”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드라마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유는 똑같다. 평소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그만큼 작품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연기를 다시 한다니까 남편이 많이 응원해줘요. ‘제중원’이 서울에서 먼 합천과 문경에서 촬영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서 남편은 거의 매일 그 곳에서 바쁘게 지내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촬영이 없는 날에는 꼭 집으로 와서 틈나는 대로 저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줘요.”
예쁜 이미지 버리고, 과감하게 연기 변신
한가인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나쁜 남자’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눈의 여왕’을 만든 이형민 감독의 신작으로, 야망과 욕망의 경계에 선 남녀의 위험하고 치명적인 사랑을 그린다. 지난해 MBC-TV 드라마 ‘선덕여왕’에 비담 역으로 출연해 큰 인기를 얻은 김남길(30)이 한가인과 연기 호흡을 맞추고, 오연수(40)와 김재욱(28)이 가세한다.
“정말 욕심나는 작품이었어요. 제가 실제로는 무척 털털한 성격인데 드라마나 영화, CF 속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실제와 많이 다르게 보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 속의 저는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이고 털털한 모습이 더 많아요. 그래서 더 이 작품에 끌린 것 같아요. 기존의 이미지를 깨고 싶었거든요.”
“오랜만에 작품을 하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어요. 잘할 수 있을까 싶어서 고민도 많았고요. 그런데 감독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더 작품에 대한 욕심이 났어요. 어떤 캐릭터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에도 욕심이 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밉지 않은 캐릭터로 연기를 잘하고 싶어요.”
잘해내야겠다는 책임감과 욕심으로 시작했던 20일 동안의 일본 로케이션 촬영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촬영 중 문에 부딪혀 눈 옆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상처를 치료하기보다 더 붓기 전에 주어진 촬영 분량을 빨리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감독에게 요구했고, 결국 그 상태에서 연기 투혼을 발휘했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다 같이 숙소 생활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정말 재밌었어요.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해외 촬영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김남길, 김재욱씨와는 또래여서 촬영이 끝나면 서로 옆방에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며 더 친해졌어요. 정말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어느덧 데뷔 9년 차가 된 한가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지만 드라마와 영화를 모두 합친 출연 작품은 7개 정도로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부족함이란 더 많이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법. 모자란 만큼 앞으로 그녀가 가야 할 길, 이뤄내야 할 꿈은 무한하다. 이제는 외모보다 연기로 승부하고 싶다는 그녀의 반가운 새 출발이 내심 기대되는 대목이다.
■ 글 / 윤현진 기자 ■ 사진 / 영화사 ‘숲’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