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아무리 초라한 무대라도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거요”
봄바람 불던 4월의 어느 날 오후,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은 유진 박은 담요를 끌어와 덮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서 한여름에도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는단다. 쑥스러운 듯 웃는 그의 미소에 한결 편안함이 번진다. 긴 겨울을 지나온 그는 봄을 맞고 있는 중이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면 으레 “잘 지내셨느냐, 요즘 뭐 하고 지내시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러나 유진 박을 보자마자 “괜찮으냐”는 말을 먼저 하려다가 냉큼 집어 삼켰다. 이미 너무 많은 질문에 시달렸을 그였기 때문이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면서 ‘몸 괜찮아요?’라고 물으세요. 이젠 정말 괜찮아요.”
지난해 여름, 그의 이름은 인터넷을 도배하곤 했다. ‘유진 박의 최근 모습’이라 짐작되는 동영상 안에는 초점 없는 눈빛과 지친 표정의 그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한때 화려한 테크닉으로 무대를 누비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온갖 행사에 동원되며 출연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감금과 폭행설까지 이어졌고 이러한 소문들은 “죽을 만큼 맞았다”, “출연료는 담배 하나였다”는 그의 인터뷰로 확인됐다. 네티즌들의 충격은 안타까움으로 번졌고 전에 없던 구명운동이 일었다. 그의 소식을 전해들은 네티즌들이 유진 박을 응원하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다음 아고라에서는 유진 박을 돕자는 온라인 서명운동까지 벌어졌다. 팬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난 그는 지난 3월 25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난 8월 한국을 떠난 지 8개월 만이다.
“제가 한국에 산 지 10년이 넘었어요. 뉴욕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다 3년 전부터는 혼자 서울에 있었죠. 그동안 많이 힘들고 외로웠어요. 힘든 사건도 있었고. 8개월 동안 미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쉬었어요.”
3년 동안의 아픈 기억을 갖고 떠난 8개월간의 휴식.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아픈 기억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건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팬들의 응원 때문이다.
그는 애써 지난해의 일을 반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간 받았던 동정과 우려의 시선 때문일 터.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알게 된 팬들의 관심과 사랑은 감추지 않았다. 힘든 일을 겪기 전에는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서포터즈’들이 있는지 미처 몰랐단다. 편지는 물론 자신의 얼굴을 담은 티셔츠, 인형, 바이올린까지, 팬들의 애정이 듬뿍 담긴 선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팬 카페에는 그가 잘 읽지 못할까 싶어 영어로 쓴 응원의 글이 넘쳐났고 여기저기서 부탁하는 사인을 ‘백만 번’ 정도 한 것 같다고 하니 전화위복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혹여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힘겨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이유는 팬들 때문이에요. 저를 정말 많이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하셨어요. ‘이렇게 나를 응원해줬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이제 저를 보는 분들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요.”
로큰롤과 재즈에 심취, 서태지와 공연하고 싶어
1975년생인 그는 올해로 바이올린을 잡은 지 32년이 됐다. 여덟 살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 열 살 때 웨인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다. 열세 살 때 링컨센터 데뷔 등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떠오른 그의 음악적 재능은 부모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더욱 빠르게 성장해갔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아버지는 뉴욕대 재활의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어머니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서주희가 그의 사촌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정통 클래식 바이올린이 아닌 전자바이올린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전혀 반대하지 않으셨다. 열다섯 살이었던 그에게 처음으로 전자바이올린을 사준 것도 부모님이었다. 처음 전자바이올린을 잡은 이유가 다소 엉뚱한데, “인기를 얻고 싶어서”였다고.
“클래식 바이올린은 친구들이 지루해했어요. 좀 더 자유롭고 트렌디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전자바이올린에 록을 접목시켰죠.”
그렇게 시작한 전자바이올린 연주는 그에게 친구들의 인기뿐 아니라 1990년대 세계적인 연주가 바네사 메이에 비견되는 천재 전자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명성까지 가져다줬다. 그러한 명성과 함께 그는 1996년 줄리어드 음대 졸업 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한국 데뷔는 KBS-1TV ‘열린음악회’였다. 한국말이 서툰 스무 살 전자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당시 달콤한 가요가 유행이었던 한국 음악계에 신선한 파격을 안겨주었다. 대중의 뜨거운 반응은 결국 그를 한국에 눌러 앉혔다.
“처음에는 한국에 초대를 받아 공연하러 온 거였어요. 생각보다 열렬히 호응해 주셨고 제 음악을 한국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한국 사람이니까요.”
1997년 발매된 1집 앨범 좥더 브릿지좦 / 1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에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축하 공연에 참석해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다. 장르의 벽을 넘나들며 춤추듯 현을 지휘하는 화려한 무대매너는 ‘유진 박’ 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마크다. 종종 정통 클래식 연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전자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자유로웠다.
그는 요즘 1990년대 음악에 심취해 있다. 로큰롤과 재즈는 언제나 그의 연주에 영감을 주는 장르. 비틀즈나 엘비스 프레슬리 등 ‘고전’들을 들으며 즉흥적으로 솔로 파트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마치 록 공연에서 기타 솔로 연주를 하는 것처럼. 함께 공연하고픈 사람으로는 서태지를 꼽았다.
“서태지씨가 데뷔했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힙합부터 록까지 다양한 영역의 음악을 소화하잖아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적도 있고요. 언젠가 함께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콘서트 ‘봄의 기적’으로 새로운 시작
스무 살 무렵부터 줄곧 그의 이름 앞에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찬사인 동시에 족쇄가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에게 이름에서 오는 부담감은 없어 보였다.
“맨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음악계에 전자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굉장히 새로운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천재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물론 들을 때마다 기분 좋죠. 많은 분들이 어느 순간부터 제가 시선에서 멀어졌다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전 제 연주 인생에 ‘Break’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어느 순간부터 유명해지지 않았다는 느낌도 없고요. 제가 연주하는 곳 어디서든 관객 분들은 항상 환영해주셨거든요.”
그의 말 속에는 아무리 초라한 무대라도 연주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이올린만 있으면 그에겐 세상 모든 곳이 무대다. 그는 얼마 전 ‘유진박 & WE 투어 콘서트-봄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크로스오버 국악앙상블 팀 ‘WE’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전에도 김덕수 사물놀이패와의 공연을 통해 국악과 접목을 시도한 적이 있다. 전자바이올린의 태생과 같이 그는 퓨전을 즐기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팬들을 만난 소감을 물으니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층이 공연을 보러 와 놀랐다고 한다. 나이 어린 학생부터 대학생, 아줌마, 봄나들이 나온 가족까지, 다양한 관객들로 공연은 매진이었다. 다정히 아이 손을 잡고 공연을 보러 온 아빠들을 보고 느껴지는 건 없었을까? 그의 나이 어느덧 서른다섯이다. 나이 얘기를 꺼내자 눈치를 챘다는 듯 웃으며 바이올린이 여자친구란다. 말 나온 김에 이상형을 물었다.
“결혼 생각 당연히 많이 하죠. 친구들도 결혼을 하고, 요즘 부모님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우선 제가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걸 느껴요. 운전도 못하고 빨래도 못하고…. 하나하나 모자란 점을 배워 나가야죠. 그 전에 슈퍼우먼이 나타나주면 좋고요(웃음). 자상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여자였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준비하는 그의 손에는 어느새 바이올린이 들려 있다. “바이올린이 여자친구”라는 그의 말이 떠올라 잠시 웃음이 나왔다. 어두운 시간을 지나 다시 돌아온 그와 그의 바이올린이 언제나 행복한 음악을 연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 협찬 / SJ 뷰티갤러리(02-563-7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