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배우 정애리는 자신을 주어진 이미지 안에만 가둬놓지 않았다. 1997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에서 주책 맞은 노파, 철없는 간호사 등 1인 다역을 펼치며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배우로서 제 키를 넘어 한 단계 도약했다. 이후 그녀는 다채로운 이미지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격동의 세월 속에 가족을 이끌어온 꼿꼿한 어머니이기도 했다가 제 몸보다 딸을 더 아끼는 징글징글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화해와 용서의 포용을 보여주는 어머니이기도 했다가 끔찍한 내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남의 자식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어머니이기도 했다. 스펙트럼은 넓지만 공통점은 있다. 모두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 그녀만큼 다양한 모습의 어머니를 연기한 사람이 또 얼마나 있을까. 사실 마흔을 넘긴 대한민국 여배우라면 대부분 누군가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엄마’ 하면 쉽게 떠오르는 소박하고 속정 깊고 생활력 강한 전형적인 한국 엄마 외에도 수많은 형태의 모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모습의 모정을 그때마다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믿음직한 ‘엄마’가 바로 정애리다.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 가족과 모성
그런 정애리가 이번에는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사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희생이라는 생각조차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우리네 어머니를 연기한다. ‘연극열전 3’ 다섯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는 노희경 작가의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주인공 김인희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1996년 MBC 창사특집 4부작 드라마로 방송되며 전 국민을 울렸던 작품이다. 언뜻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어머니’ 같지만 정애리는 또 이 익숙한 느낌 속에서 자신만의 새로움을, 그리고 보는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개 내용에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엄마라고 씌어 있는데 저는 이 엄마가 특별히 희생적으로 살고자 해서 여기까지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던 거죠. 하지만 결국은 그걸 우리는 ‘희생’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싶어요. 온화하지 않아도, 배려가 깊지 않아도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은 ‘현실’이 만들어온 부분이 많잖아요.”
“최근 몇 년 동안 부쩍 엄마 역을 많이 맡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어머니상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그 전형적이라는 부분도 많이 옅어지고 있고요. 사실 드라마 ‘멈출 수 없어’나 ‘태양의 여자’에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정말 ‘못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거든요. 이제는 어머니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아픔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나, 상처를 드러내놓고 남을 할퀼 수밖에 없었나 하는 개인적인 부분에도 집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연극에서는 ‘어머니’ 역을 뻔하지 않게 잘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녀가 초점을 맞추고 싶어 하는 부분은 가족 간의 ‘관계’를 잘 형성하는 것. 실상을 들여다보면 많은 가족들이 생각만큼 그렇게 화기애애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일상에 쫓겨, 삶에 치여 그저 한울타리 안에서 떠밀려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족 간의 ‘관계’인 것 같아요. 그때그때 누구에게 좀 더 집중하느냐 하는 거죠. 그리고 이전에는 주로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가족에게 다가갔다면 이제는 함께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갈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예전엔 내가 누군가의 엄마이고 며느리이고 딸이고 아내였지만 이젠 ‘당신이 내 남편’, ‘네가 내 딸’ 그리고 ‘우리가 가족’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나누며 살고 싶다는 꿈을 꾸는 딸·매사에 딸이 우선인 어머니
가족 간의 소통과 관계, 그리고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매회 무대에서는 물론이고 연습을 할 때도 실제 가족의 얼굴을 한 번씩 떠올려보게 된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그들이 있어 이렇게 내가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져오기도 한다고.
“가족과 저는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예요. 투덕거리며 다툴 때도 있고 아주 가끔은 서로에게 서운해할 때도 있지만 서로 지지해주고 함께하기 때문에 이렇게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 딸과 함께 3대가 함께 살고 있는 정애리의 가족은 항상 일상을 나누며 알콩달콩 지내는 편이라고 한다. 브라운관에서는 온 국민의 ‘믿음직한 엄마’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 지현이에게는 때로는 친구처럼 편안하고 친밀하면서도 때로는 극성스럽기도 한 엄마라고.
“일을 하다보니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있어주지는 못해요. 하지만 솔직히 한순간도 마음속으로는 가족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일을 제외한 시간에는 가급적 아이와 함께 보내려고 노력해요. 저녁에는 하루 종일 있었던 일도 얘기하고 주말에는 교회에도 함께 나가요. 봉사활동을 하러 같이 다닐 때도 많고요. 살다보니 언젠가부터 깨달은 게 있어요. 시간의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순간순간 얼마나 진심을 다했느냐,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그 사람에게 집중했느냐가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을 나눔을 통해 깨닫게 됐어요.”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 딸은 세상에서 저를 가장 존경한대요. 저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아요. 그리고 가끔은 ‘나도 엄마처럼 나누면서 살고 싶어’라는 말을 종종 해요. 그러면 저는 대답하죠. ‘너는 엄마처럼 안 살걸? 충분히 더 많이 나누면서 더 행복하게 살 거야’라고요. 사실 제가 그 아이만 할 때 저는 그런 생각을 아예 못했는데 벌써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 걸 보면 지현이는 정말 다르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나누면서 더 넉넉해지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고등학생인 지현이는 이미 구체적으로 삶의 목표를 정해뒀다. 지현이의 꿈은 바로 국제 NGO에서 일하는 것.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모두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싶다는 뜻이 반영된 목표다.
“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확실히 봉사하는 쪽에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저절로 끌리는 게 있나 봐요. 특히 지현이는 흑인 아이들을 참 좋아해요. 계속 자기는 언제 아프리카에 데려갈 거냐고 졸라서 올해 여름쯤엔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작년 겨울에 ‘지라니 합창단’ 아이들이 한국에 왔을 때 그 아이들 숙소가 저희 집 근처였거든요. 말도 제대로 안 통하면서 동생들과 금세 친해져서는 같이 놀고, 잠도 같이 자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그 친구들을 좋아하고 예뻐해요.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스스로 케냐 아이도 후원하고 있어요.”
특별히 가르쳐주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누는 기쁨을 깨달은 아이가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봉사활동에 누구보다 열심이고 진심인 딸을 보면서 어떤 때는 오히려 그녀가 더 많이 배우기도 한단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순간순간 저를 돌아보게 될 때가 있어요. 얼마 전에도 인도네시아 지진 현장에 같이 갔거든요. 사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직접적으로 재건 사업을 하거나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 도울 수는 없잖아요. 최대한 현장에 많이 들러 구호품을 전달하고 희망을 일깨워주기 위해 돌아다녔는데 지현이가 그러더라고요. ‘무슨 선거 나온 사람들도 아니고 여기 사진 찍으러 왔냐’고요. 제 딴에는 한 명 한 명 만나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보살펴주는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도 딸처럼 진심으로 이 사람들을 대하려고 했었나’ 생각도 해보게 됐고요.”
딸의 어른스럽고도 순수한 마음이 언제나 정애리를 감동시킨다면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어머니는 그녀의 마음속에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여든이 넘어 그야말로 ‘할머니’가 되어버린 어머니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도움과 사랑 없이는 그녀의 하루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는다. 그녀도 이제는 다 큰 딸의 엄마인데, 어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손녀보다 그녀가 더 먼저 눈에 들어오고 신경 쓰이는지 언제나 그녀 걱정뿐이시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좋은 딸이 되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특별히 잘 모시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은 지켜요. 엄마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는 거요. 막내이기도 하고 같이 살다 보니 엄마가 제게 형제들 이야기며 당신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말씀하세요. 제가 집에 들어가면 ‘피곤할 테니 얼른 쉬라’고 하시면서도 슬그머니 방에 따라 들어와 앉으세요.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가끔은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씩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짜증내지 않고 잘 들어드리려고 해요.”
가끔은 문득 작품에서처럼 사랑하는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2년 전 아버지와의 이별을 겪으면서 어머니 또한 많이 쇠약해지셔서 걱정이 크다. 그래서 좀 더 신경 써드리고 좀 더 함께하며 행복한 기운을 불어넣어드리려 한다. 그리고 자신도 더 건강하고 강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3대가 사이좋게 일상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정애리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항상 그녀를 믿고 지지하며 마음을 기울이는 어머니와 딸이 있어 그녀가 이렇게 항상 따스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그녀의 온화한 미소를, 햇살 같은 손길을 자주 볼 수 있길 바란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